법제처 50년의 발자취
- 구분특집(저자 : 임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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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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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9,191
- 담당 부서
대변인실
법제처 50년의 발자취
임 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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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언 |
|Ⅱ. 조직의 변천과정 3. 정부입법총괄·조정기능의 강화 |
| 1. 법제처의 발족 4. 행정심판제도의 총괄 및 국무총리 |
| 2. 법제실로의 개편 행정심판위원회 운영 |
| 3. 국무원사무처 법제국으로의 개편 5. 부대기능 |
| 4. 법제처로의 환원과 조직의 보강 Ⅳ. 시대별 입법활동 |
| 5. 3대 기능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1. 법제처 창설이전 근대적 법제의 |
| 조직정비 도입과정 |
| 6. 국민의 정부 출범과 조직축소정비 2. 법제처 창설과 국법제도 형성기 |
| 7. 정원 및 예산의 변천 3. 정치적 변혁기의 입법활동 |
|Ⅲ.법제기능의 발전추이 4. 경제성장 최우선시대의 입법활동 |
| 1. 개관 5. 민주주의 이념의 회복과 국민의 |
| 2. 법령심사기능의 유지·발전 정부 출범 |
| Ⅴ. 결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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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언
5천년 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과 함께 법제처도 창설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법제처는 건국 직후부터 국가경영의 기본이 되는 법제를 마련하였고 그후 경제성장과 근대화정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민주화와 복지향상에 관한 국민들의 요구를 법령에 반영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우리 헌법이 표방하는 법치주의 이념을 기본원칙으로 삼아 왔는 바, 법치주의의 가치는 계량하기 어렵고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행정편의 내지 성과과시에 치중한 정부 각 부처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고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 채 묵묵히 뒷전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담당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조직이 여러차례 변천을 겪는 과정에서도 법제처는 창설 당시의 지위를 유지하여 왔고 오히려 기능면에서 당초의 법령안 심사를 통한 입법통제기능외에 정부입법총괄·조정기능과 행정심판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법치주의를 보다 철저히 구현시켜 나가는 체제를 갖추었다.
이는 선배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관계기관과 국민 모두의 보이지 않는 성원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정부수립 50주년을 축제분위기 속에서 맞이하기는 커녕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지난날의 잘잘못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위기상황이 초래된 원인을 찾아낸 후 정부와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책무를 완수해 나간다면 위기를 호기로 전환시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2천년대에는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세계무대에서 주역을 담당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법제처가 걸어온 50년을 조직과 기능의 변천, 그리고 시대별 입법활동의 측면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Ⅱ. 조직의 변천과정
1. 법제처의 발족
법제처는 48. 8. 15. 정부수립과 동시에 남조선과도정부 司法部의 법률기초국·법률조사국과 사무처의 도서관을 인수하여 1室 3局(행정법제국·경제법제국 및 법제조사국) 10課와 도서관으로 발족하였다. 이와 별도로 처장직속의 법제관 7인(법제직 2급 또는 3급)을 두어 심사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법제처직제가 정식으로 제정·시행된 것은 48. 11. 4의 일이었다.
이 때의 법제처는 현재와 같은 국무총리소속의 독립된 중앙행정기관이었으며 처장은 국무위원은 아니나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었다.
당시 법제처장을 비국무위원·비장관으로 한 것은 초대 법제처장으로 내정된 유진오박사가 정부조직법을 기초하면서 개인적인 겸양지덕을 발휘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2. 법제실로의 개편
54. 11. 29 2차개헌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됨에 따라 국무총리소속기관이 모두 폐지되었는 바, 법제처는 명칭을 법제실로 바꾸고 독립된 중앙행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간직한 채 법무부장관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56. 7. 19.에는 법령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구법령정비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 때 법제실장밑에 제1국과 제2국을 두고 제1국에는 법제관 외에 총무과를 따로 두었다.
법제실장은 장관급으로서 국무회의 출석·발언권에도 변경이 없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60년 제2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존속되었다.
3. 국무원사무처 법제국으로의 개편
60. 6. 15 3차개헌으로 의원내각제가 채택되고 행정권이 國務院에 소속됨에 따라 행정각부에 대한 국무총리의 통할·조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국무원사무처가 신설되었는데 법제실도 동 사무처내의 법제국으로 흡수·개편되었다.
당시 국무원사무처에는 처장 2인을 두고 그중 1인은 법제사무만을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하부조직으로 총무국·인사국·법제국·공보국·방송관리국을 두면서 차장 1인은 법제국만 지휘·감독함으로써 법제국은 사실상 법제담당차장을 수장으로 하는 독립된 조직체계로 운영되었다.
법제국장밑에는 7인의 법제관과 3개과를 두었다. 그 후 5.16혁명후인 61. 7. 1에는 국무원사무처가 내각사무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4. 법제처로의 환원과 조직의 보강
61년 5.16혁명후 군사정부는 대대적인 제도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법제도의 개선·정비작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는 바, 일제시대 법령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구법령정비사업에 막대한 노력이 소요되는 점과 각 부처가 제안하는 법령을 심사하고 정부입법사무를 총괄·조정하는 법제기능의 중요성 등을 고려하여 61. 10. 2 정부조직법을 개정할 때 내각사무처 법제국을 법제처로 개편하고 법제처장은 장관급으로 보하도록 하였다.
그후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법제처는 내각소속에서 국무총리소속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1. 10. 2 당시 법제처는 처장(국무위원급), 차장(1급), 총무과, 제1국(조사과 및 법제관 4인), 제2국(법제관 4인)의 단촐한 조직이었다.
63. 12. 16에는 차장직속으로 기획관리관(4급)이 신설되었고, 66. 8. 1에는 공보관(4급)이 신설됨과 아울러 차장을 차관급으로 격상시켜 차관회의 正委員이 되도록 하였다.
70. 2. 24에는 공보관을 폐지하는 대신 법제조사담당관(그후 법제조사관으로 격상) 및 법령보급담당관을 설치하였다.
그후 중요한 직제개정내용을 보면 78. 5. 1에는 그전에 신설된 법제조사관을 확대개편하여 법제조사국을 신설하였으며 법제관 4인을 증원하였다.
80년대초에는 62년부터 법제처에 설치된 법제조사위원회의 상근직원(예산에 의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비정규직으로 2급상당 전문위원 13인, 4급상당 참사 10인, 5급상당 조사원 5인)을 별정직화하여 4급상당 법제연구관 3인과 5급상당 법제연구담당관 6인, 6급상당 3인, 7급상당 2인을 각각 신설·증원하였고, 81. 7. 28에는 그전에 신설된 기획관리관(2급)을 법제조정실(실장 1급)로 확대개편하여 그 밑에 법제기획관(2급)과 법제관(3인) 및 행정관리담당관을 두었으며, 85. 6. 14에는 개정헌법에 따라 행정심판이 개정되고 법제처가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의 서무기능을 수행하게 됨에 따라 차장직속으로 행정심판관리관(2급)을 신설하였는데 이는 법제관중 2급 1인을 대체 활용한 것이었다.
5. 3대 기능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조직정비
가장 최근의 대규모 조직개편은 96. 3. 15 법제처직제를 전문개정한 것인데 그 내용은
첫째 정부입법총괄·조정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법제조정실을 대폭 확대개편한 것으로서 법제조정실 소속 법제관 3인을 없애고 법제기획과·법제행정과·법령전산담당관을 신설함과 아울러 행정관리담당관과 법제정보과(법제정보국을 대신하여 존속)를 법제조정실밑에 둔 것과,
둘째 폭주하는 법제심사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종전의 제1국·제2국을 행정법제국·경제법제국·사회문화법제국의 3국으로 증편하고 법제조정실 소속 법제관 3인을 심사국에 배치함과 아울러 법제관을 증원하여 총 16인(종전에는 13인)을 두도록 한 것,
셋째 행정심판기능에 있어 종전에 각 부처에 두었던 행정심판위원회를 모두 폐지하고 그 소관업무를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로 이관함에 따라 행정심판관리관을 행정심판관리국으로 확대하였고 그 밑에 심판심의관(3급), 심판총괄과외에 일반·경제 및 사회문화 3개분야의 행정심판담당관을 두도록 하여 정원을 크게 늘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중복된 조직을 과감히 감축하였는 바, 한국법제연구원이 정부출연을 받아 특수법인으로 설립되어 정부수립이래 법제처의 고유업무로 이어져 내려온 법제연구 및 법령집편찬 등의 사업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법제정보국(종전의 법제조사국)을 폐지하고 그 정원(2급 1인, 4급 6인, 5급 10인, 기타 실무직원)을 확대된 실·국의 정원으로 상계 활용하였다.
이로서 법제처는 3대 주요기능인 정부입법총괄·조정, 법령심사 및 행정심판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6. 국민의 정부 출범과 조직축소정비
90년대에 들어와 지나치게 비대화된 정부조직 및 기능의 축소가 국정의 중요 현안이 되었으며 몇차례 정부조직감축이 단행되었다. 그리고 97년말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와 IMF한파는 국가전체차원의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정부는 이를 선도하기 위하여 모범을 보여야만 했다.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사상 최초로 정상적인 헌정제도 하에서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새정부 발족전에 단행된 정부조직개편은 98. 2. 28 정부조직법의 전문개정과 전부처 직제개정으로 일단락되었는데 여기에서 법제처도 대규모 조직감축이 이루어졌다.
이때 수많은 부처가 없어지거나 통합되었으나 법제처는 국무총리소속의 독립된 중앙행정기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처장의 직급이 장관급에서 장관과 차관의 중간급으로 하향조정되고, 이에 따라 차장은 1급상당 별정직으로 격하되었으며, 1급 보조기관이던 법제조정실이 2급 보조기관인 법제기획관으로, 2급이던 공보관이 4급의 법령홍보담당관으로 각각 격하되었고, 법령전산담당관이 통·폐합되는 등 전체적인 조직규모가 약 20년전으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법제처 조직개편의 특징은 기능의 감축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관의 직급만 격하시킨데 있는 바, 이는 다른 부처의 경우 불필요한 규제철폐 등 기능감축이 중요 이슈였던 점과 비교가 된다. 결국 법제처는 지금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수행하여 왔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며 따라서 인원의 감축도 8인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법제처가 입법통제기관 내지 행정심판기구로서의 본래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장관급 타 부처와 직급상의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무직 1인, 2급 1인, 4급 1인 등 중·고위직 위주의 감축이 단행됨으로써 상당한 위축을 보이게 된 점이다.
다만, 조직감축의 와중에서도 행정심판기능에 있어서 만큼은 종전에 1급상당 별정직 상임위원 1인이 2인으로 증원되는 예외가 인정되었는데 이는 행정심판업무의 폭주로 인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업무증가량에 비추어 볼 때 이 역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7. 정원 및 예산의 변천
공무원제도가 확립되고 정원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60년대 중반부터의 정원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64년 당시에는 정무직인 처장·차장과 2급 2인, 3급 6인, 4급 7인(별정직 2), 5급 15인(별정직 1), 6급 6인, 7급 2인, 9급 2인, 기능직 내지 고용직 6인으로서 총 50인의 정원을 두었다(일부 직급은 현재 직급 기준).
그후 일부 하위직이 감축되기도 하였으나(77년에는 총 47인), 78년에는 67인으로 크게 늘어났는데 이때에는 2급 6인, 3급 6인, 4급 9인, 5급 16인 등 상위직의 증가와 고용직 16인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80년에는 법제조사위원회 비정규직의 일부 별정직화 등으로 인하여 정원이 87인으로 늘어났고 81년에도 비정규직의 별정직화가 계속됨과 아울러 대망의 1급(법제조정실장)이 신설되는 등으로 인하여 정원이 98인으로 늘어났다.
86년에는 정원이 100인에 이르렀는데 이 때의 직급별 분포를 보면 정무직 2인, 1급 1인, 2급 6인, 3급 6인, 4급 12인, 5급 27인(별정직 1), 6급 13인, 7급 5인(별정직 1), 9급(별정직) 2인, 고용직 26인이었다.
그후에는 행정심판기능의 확대에 따른 인력충원과 법제관 등 법령심사인력의 보강이 꾸준히 이루어져(획기적인 증원으로 91년에 4급 법제관 2인, 5급 4인 등 14인의 증원이 있었다), 97년에는 148인의 정원을 갖고 있었다.
법제처 인력변천과정의 특징을 든다면, 핵심인력인 법제관의 직급이 1개 또는 수개 부처의 법제업무를 전담하는 업무특성상 원래 상위직급(2급 내지 3급)으로 채워졌으나 그후 법제수요 증가에 따른 증원과정에서 점차 하향조정되어 현재는 3급 내지 4급으로 충원되고 있다는 점, 다른 부처에는 그 숫자가 많은 1급(실장)이 81년에야 신설되는 등 상위직급의 증가율이 매우 저조하여 다른 부처의 직급인플레 경향과 대조를 이루었다는 점, 그리고 90년대이후의 증원은 입법수요폭증과 아울러 신설업무인 행정심판사건의 폭주로 인한 것으로서 업무량 증가에 비교하여 인원보강이 매우 저조함으로써 직원 1인당 업무부담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98년에 단행된 조직감축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점이 고려되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인 구조조정 분위기에서 상임위원 1인의 증원 등 상징적인 조치에 만족하여야만 했다.
참고로 97년과 98년의 인원증감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연 도 | 계 | 정무직 | 1급 | 2급 | 3급 | 4급 | 5급 | 6급 | 7급 | 기능직 |
+--------+--------+---------+------+------+------+------+------+-----+-----+--------+
| 97년 | 148 | 2 | 2 | 6 | 7 | 21 | 50 | 19 | 4 | 33 |
| 98년 | 140 | 1 | 3 | 5 | 7 | 20 | 50 | 17 | 3 | 30 |
+--------+--------+---------+------+------+------+------+------+-----+-----+--------+
주) 1급 : 차장 1인, 행정심판상임위원 2인(1인 증가)
3급 및 4급의 경우 복수직급은 제외(4·5급 복수직은 2인 증가)
법제처는 오랜 경험과 법률지식을 요구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법제요원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한 바, 과거에는 법제직렬을 따로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우수인력의 확보에 지장을 초래하는 측면이 있어 이를 폐지하였고, 현재는 인력충원시 전공과목 등을 고려함과 아울러 법제처 배치후 적절한 보직관리를 통하여 업무를 숙지할 기회를 부여하고 국장 및 법제관에게 소속 하위직 공무원에 대한 교육책임을 부과하며 이러한 徒弟式 양성방법의 한계를 감안하여 법령안합동심사회의 등 공식적인 교육기회와 법제실무연구회를 통한 자생적 연구활동 기회를 확충하는데 힘쓰고 있다. 그 결과 우수한 법제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여 담당업무를 대과없이 수행함은 물론 훈련된 법제요원이 여러 부처로 진출하여 전반적인 업무능력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법제처의 예산은 업무의 특성과 예산확보에 관한 관심부족 등으로 인하여 매우 작은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48년 발족 당시 1,746만원(당시 화폐기준)으로 시작하여 58년에는 1억환을 기록하였고, 현재 화폐단위로 바뀐 62년에는 2,046만원으로 시작하여 74년에 1억5,850만원으로 1억원을, 83년에 10억1,241만원으로 10억원을 넘어선 후 98년에는 89억2,905만원을 기록하고 있어 다른 부처 예산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한다(국가 총예산의 0.01 %로 중앙행정기관중 최하위).
이러한 예산속에는 한국법제연구원의 출연금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실제 예산규모는 그보다 작으며 대부분이 인건비와 업무활동비로 계상되어 있다.
Ⅲ. 법제기능의 발전추이
1. 개 관
법제처는 행정부내에서 국가경영의 기본틀을 마련하는 법제업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법제업무는 행정기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 헌법이 요구하는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국가의 통치권이 人治가 아닌 법의 지배아래 행사되도록 보장하며 따라서 국가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통제수단으로 작용함과 아울러 국가권력을 창출하고 그 행사근거를 확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입법부의 기능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오늘날 복지행정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정부기능이 비대화됨에 따라 여기에 대하여 적정한 통제를 가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행정기능에 대한 사전적 통제수단인 입법기능은 의회주의 원칙에 따라 국회가 담당하여야 하겠으나, 현실적으로 국회의 입법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행정부가 입법에 관여하는 정도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행정부는 자체입법통제기능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담당하는 법제처의 역할은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행정에 대한 사후통제기능을 수행하는 사법부와의 관계를 본다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찾아낸 위헌법령의 정비 등 입법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것 역시 법제기능의 중요한 고려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보면, 법제처의 기능은 국가권력의 3대축인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의 교차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법제처는 원래 법령안 심사 및 이를 뒷받침하는 법제조사를 주요업무로 하여 출발하였으나 80년대이후 폭주하는 정부입법수요에 대처하여 정부입법 총괄·조정기능이 강화되고,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민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대폭 강화된 행정심판기능을 법제처에서 담당하게 되어 법제처는 행정부 소속이면서도 준입법적·준사법적 기능을 관장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밖에 법령유권해석, 법령홍보 및 법령정비, 자치입법지원 등 다양한 부대업무를 수행함으로써 행정부내에서 법제업무에 관한한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2. 법령심사기능의 유지·발전
법제처는 48년 발족당시부터 지금까지 법령안의 기초 및 심사를 핵심업무로 삼고 있다. 발족 당시 법제처직제는 ⅰ)대통령·국무총리의 명에 의한 법률·명령안의 기초 ⅱ)법률·명령의 제정·폐지 또는 개정에 대한 의견상신 ⅲ)법률안·조약안·대통령령안·총리령안·부령안의 심사와 수정에 대한 의견상신 ⅳ)기타 법제에 대한 의견상신을 법제처의 직무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법제처직제에서는 이 부분에 관하여 ⅰ)대통령 및 국무총리의 명에 의한 법령안의 기초 ⅱ)국무회의에 상정될 법률안·조약안 및 대통령령안의 심사 ⅲ)총리령안·부령안·대통령훈령안·국무총리훈령안 및 각 부·처·청의 훈령·예규 등의 심사 ⅳ)기타 법제행정일반에 관한 사무로 규정하여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법령안의 기초는 심사업무와 표리의 관계에 있으나 법제처가 직접 자신의 명의로 법령안을 기초하는 경우는 드물다.
법령심사기능은 ⅰ)각 법령에 반영된 정부정책의 헌법합치성을 보장하고 ⅱ)국회의 입법권행사에 따른 사후관리(위임입법의 한계일탈 억제)로 의회주의 이념을 수호하며 ⅲ)사법부의 위헌법률, 상위법 위반법령의 판단결과를 입법에 반영하고(feed back) ⅳ)법령상호간의 모순·충돌 방지로 정부정책의 일관성을 제고하며 ⅴ)훈령·예규·고시 등 증가일로에 있는 행정규칙의 적법성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법제처의 법령심사 결과 현재 시행되고 있는 법령은 헌법 1, 법률 954, 대통령령 1,319, 총리령 및 부령 1,185 총 3,459건에 이르는 바, 연도별 심사실적을 보면 48년에는 법률 17, 대통령령 43, 총리령·부령 5 총 65건이었고, 5.16직후인 62년에는 법률 887, 대통령령 790, 총리령·부령 357 총 2,034건에 이르기도 하였으며(1천건이상을 처리한 연도는 63년 1,245건, 69년 1,799건, 70년 1,385건, 81년 1,092건) 97년말까지의 누계는 법률 5,965, 대통령령 17,940, 총리령·부령 11,688, 총 35,773건으로서 20년간 연평균 법률 298, 대통령령 897, 총리령·부령 584 총 1,789건에 이른다.
법제처에서는 법령안심사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각 부처에서 법령안을 입안하는 초기단계부터 관계법제관이 직접·간접으로 참여하며 합동심사회의를 개최하고 국회제출법률안의 수정사항에 대한 자체평가회의 등을 통하여 업무수행상의 미비점을 점검하며 법제요원의 전문성 배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훈령·예규·고시의 경우 사후심사를 통하여 적법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85년 동 제도를 도입할 당시 1,291건의 훈령·예규·고시 등을 심사하여 22건에 대한 정비촉구의견을 제시하였으며 97년까지 총 19,381건을 심사하여 429건의 정비촉구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훈령·예규·고시 등의 정비촉구 실적이 저조한 것은 사후심사이기 때문에 법령에 명백히 저촉되는 것만 지적하며 또한 순수한 행정규칙에 해당하는 것은 가급적 부처의도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정부입법총괄·조정기능의 강화
70년대말까지는 각 부처에서 임의로 법령안을 기초하여 법제처에 심사의뢰하고 대국회활동 등을 담당하여 왔기 때문에 입법활동이 체계적으로 수행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사일정 촉박으로 인한 졸속입법가능성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법제처는 이와같은 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80년 정부입법추진계획을 도입한 것을 필두로 하여 정부입법전반에 대한 총괄·조정기능을 대폭 보강하였다.
중요한 정부입법총괄·조정기능은 ⅰ)입법이 특정시점(특히 정기국회)에 폭주하는 현상에 대처하여 입법의 효율성·계획성을 강화하고자 정부입법계획을 수립·시행하며 ⅱ)입법예고를 총괄함으로써 민의 반영을 통한 입법의 정당성을 제고하고 준법을 위한 홍보효과를 거양하며 ⅲ)법령입안심사기준의 확립 및 입법기술의 개발을 통하여 국법체계를 확립하고 입법의 경제성을 확보하며 ⅳ)행정부의 대국회 입법협조의 창구역할(입법의 연중 안분제출, 법리적 쟁점에 대한 정부의견 개진, 법령심사기준의 통일 등)을 수행하고 ⅴ)각 부처 기획관리실장회의 및 법무담당관회의를 개최하여 정부내 입법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부입법계획의 도입목적은 ⅰ)정부의 입법활동이 계획적·체계적으로 수행되도록 함으로써 입법의 특정시기 집중현상을 방지하고 법안심의의 능률화를 도모하며 ⅱ)입법추진에 있어서 각 원·부·처간의 사전협조를 충실히 하도록 함으로써 정부 전체 차원에서 입법내용을 종합적으로 조정하고 ⅲ)법안에 대한 충분한 심의기간을 확보함으로써 법제처와 국회의 법안심의의 충실화를 도모하며 ⅳ)수립된 정부입법계획을 관보·컴퓨터통신망 등을 통하여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입법과정에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기회를 보장하고 입법과정의 민주성을 높이는 데 있다.
입법계획 결과 정부제출법률안의 임시국회와 정기국회 분포비율이 도입초기인 82년에는 52.2%대 47.8%, 83년에는 43.5%대 56.5%, 84년에는 73.5%대 26.5%로 양호한 실적을 나타내었으나 그후 임시국회제출이 다시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96년에는 11.5 %대 88.5%로 가장 저조). 그러다가 97년에는 67.4%대 32.6%로서 다시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입법계획에 나타난 법률안의 입법반영비율을 보면 93년 75%, 94년 57%, 97년 68%로서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입법계획제도는 최초 국무총리훈령으로 도입하였으며, 제도가 어느정도 정착한 95년에도 대통령령인 법제업무운영규정을 제정하여 법령상의 제도로 격상되었다.
다음으로 입법예고제도를 보면 83년에 법령안입법예고에관한규정(대통령령)을 제정하여 처음 도입된 것으로서 행정절차로서는 효시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그후 98년부터 시행된 행정절차법에 의하여 법률상의 제도로 격상되었다.
83년에는 634건의 심사법령 가운데 12건이 입법예고되는데 그쳤으나 그후 84년 72건, 86년 108건, 90년 269건, 93년 388건으로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였으며 97년에는 890건중 610건이 입법예고되어 69%의 비율을 보였다.
예고매체는 97년의 경우 예고법령 610건중 관보가 610건, 이해관계자에 대한 개별통지 83건, 공청회 63건, 대중매체 84건으로 나타났는 바, 관보의존도가 여전하지만 최근 법제처에서 신문유료광고예산을 확보하여 연간 22건정도의 주요 법령안을 직접 예고하는 등 매체다변화 내지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좋은 성과가 예상된다.
입법예고에 따라 제출된 의견은 반드시 반영할 의무가 없으나 50%에 가까운 반영률을 나타내고 있다.
법령안입안심사기준은 법제처 내규로서 제정·시행되어 왔으나 관계기관에 책자를 배포하여 입안단계에서부터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입법기술 내지 입법체계 등 입법학 분야의 권위있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 그리고 95년 법제업무운영규정 제정시 법령상 근거를 부여하고 주요 내용을 동 규정에 반영하였다.
행정부의 대국회 입법협조업무의 경우는 종전부터 국회회기중 법제관을 국회에 파견하여 정부측의 입법의도를 관철하는데 총괄적인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80년 입법계획제도 도입시 이에 관한 사항을 아울러 반영하였고 그후 95년 법제업무운영규정에도 명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별도로 법제처는 국회와 법제관급 인사교류를 통하여 상호간의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공동의 업무능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그밖에 법제처는 각 부처 법무담당관의 업무를 지원하고 그 기능을 강화시키는 데에도 노력하고 있으나 각 부처의 인식이 저조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4. 행정심판제도의 총괄 및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운영
법제처는 81년 행정심판제도의 전신인 소원제도 운영 당시 총무처로부터 국무총리소원심의회 운영을 이관받아 수행하다가, 81년 헌법개정에서 재판의 전심절차로서 행정심판제도가 헌법에 반영되고 행정심판절차에 사법절차가 준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함에 따라 84년말에 행정심판법이 제정되고 여기에서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동 위원회의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는 최초 각 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의 처분에 대한 행정심판의 재결을 담당하다가 헌법상 사법절차 준용의 핵심요소인 제3자적 기관이 독립적·전문적으로 행정심판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95년 행정심판법을 개정하여 그 재결대상을 시·도지사의 처분에 대한 행정심판청구사건까지로 확대하고 각 부처에 설치된 행정심판위원회의 기능을 이관받음으로써 그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또한 95년부터는 행정심판법의 운영자체를 법무부로부터 이관받고 시·도에 설치된 행정심판위원회에 대한 지도·지원기능까지를 행정심판법에 명시함으로써 행정심판제도의 운영을 총괄하게 되었다.
법제처가 행정심판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은 위에서 본 제3자적 독립기관에서 행정심판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헌법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입법기능을 담당하는 법제처가 입법과정에서 파악한 입법의도를 정확히 반영하여 국민의 권리구제에 만전을 기함과 아울러 행정심판 결과 도출된 법령의 미비점을 입법에 반영하여 보완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의 확보 내지 feed back 기능의 보강에서도 제도적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행정부내에서의 잘못된 처분을 행정부 자체의 노력으로 시정한다는 행정의 자기반성적 의미와 소송비용 등 경제적·시간적으로 국민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법제처에서는 행정심판제도를 운영하면서 민간인 위원의 확대, 재결청에 대한 행정심판청구 허용, 청구기간 연장, 구술심리 확대, 위법한 명령에 대한 시정요청 등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하였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심리를 실시함으로써 행정심판제도를 활성화시키고 국민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이와같은 점은 행정심판청구의 급증에 의하여 입증되는 바, 과거 소원제도를 법제처가 이관받은 후 사건증가율 및 인용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원제도 운영시기]
+----------+-------+-------+-------+-------+-------+-------+-------+
| 연 도 | 81 | 82 | 83 | 84 | 85 | 총계 | 평균 |
+----------+-------+-------+-------+-------+-------+-------+-------+
| 처리실적 | 69 | 53 | 77 | 117 | 42 | 358 | 71.6 |
+----------+-------+-------+-------+-------+-------+-------+-------+
| 인 용 | 20 | 15 | 22 | 39 | 19 | 115 | 23 |
+----------+-------+-------+-------+-------+-------+-------+-------+
| 기 각 등 | 49 | 38 | 55 | 78 | 23 | 243 | 48.6 |
+----------+-------+-------+-------+-------+-------+-------+-------+
| 인용률% | 29.0| 28.3| 28.6| 33.3| 45.2| 32.1| 32.1 |
+----------+-------+-------+-------+-------+-------+-------+-------+
[행정심판제도 운영시기]
+----------+-------+-------+-------+-------+-------+-------+-------+
| 연 도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
| 처리실적 | 54 | 332 | 476 | 554 | 243 | 507 | 970 |
+----------+-------+-------+-------+-------+-------+-------+-------+
| 인 용 | 23 | 113 | 99 | 177 | 29 | 149 | 97 |
+----------+-------+-------+-------+-------+-------+-------+-------+
| 기 각 등 | 31 | 219 | 377 | 377 | 214 | 358 | 873 |
+----------+-------+-------+-------+-------+-------+-------+-------+
| 인용률% | 45.1 | 35.6 | 21.5 | 32.8 | 14.5 | 33.0 | 10.2 |
+----------+-------+-------+-------+-------+-------+-------+-------+
+----------+-----+-----+-----+-----+------+------+--------+--------+
| 연 도 | 92 | 93 | 94 | 95 | 96 | 97 | 총계 | 평균 |
+----------+-----+-----+-----+-----+------+------+--------+--------+
| 처리실적 | 632 | 463 | 494 | 277 | 3,386| 7,316| 15,804 | 1,215.7|
+----------+-----+-----+-----+-----+------+------+--------+--------+
| 인 용 | 119 | 91 | 92 | 69 | 1,443| 1,736| 4,237 | 325.9|
+----------+-----+-----+-----+-----+------+------+--------+--------+
| 기 각 등 | 513 | 372 | 402 | 208 | 1,943| 5,580| 11,567 | 889.8|
+----------+-----+-----+-----+-----+------+------+--------+--------+
| 인용률% | 19.0| 20.6| 19.4| 19.1| 43.9 | 38.4| 26.8 | 26.8 |
+----------+-----+-----+-----+-----+------+------+--------+--------+
위 표에서 소원제도 운영시기보다 행정심판제도운영 시기의 인용률이 낮은 까닭은 소원제도 당시에는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인용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 주로 청구되었고 행정심판기능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각급 행정관청에서 적법한 행정처분이 되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라고 판단되며, 행정심판제도 운영시기의 인용률에 변화가 심한 까닭은 사건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되는 바, 인용률의 변동은 결국 행정심판제도가 어떤 선입견없이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96년이후 사건수가 폭증하고 인용률도 높아진 이유는 각 부처 소속 행정심판위원회 관할 사건을 통합관할한 데 따른 것으로서 운전면허취소사건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일선 경찰관의 획일적 처분에 대한 불복이라는 동 사건의 특성상 인용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법제처에서는 96년이후 사건폭증에도 불구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인력이나 조직의 확충이 뒤따르지 못하여 1인당 업무량이 턱없이 과다하고 심리 및 재결이 지연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97년도에는 법정시한인 60일을 초과하여 처리된 사건이 47%에 달하여 청구인측의 민원을 야기시키고 있다).
98년부터는 법원조직법과 행정소송법의 개정으로 행정법원이 신설되고 행정심판전치주의가 원칙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변화가 예상되지만, 입법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민의 권익을 구제하는 법제처의 역할이 감소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며, 특히 경제적 부담없이 신속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행정심판제도의 장점을 국민들이 널리 인식할 경우 제도변경에 따른 영향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5. 부대기능
가. 정부유권해석기능
법제처는 법령안의 입안심사를 책임진 부처로서 법령의 입법취지를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행정각부와 달리 특정업무의 집행에 관하여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중립적·객관적 입장에서 법령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법제처는 정부유권해석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바, 이는 특정법령을 놓고 정부내 각 부처·기관간에 해석상 의견대립이 생겼을 때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내리는 기능으로서 그러한 유권해석 결과는 행정부내 모든 기관을 기속하게 된다.
정부유권해석기능은 48년 법제처 창설당시부터 법제처의 고유기능이었으나 50년대후반 법무부 법제실 체제를 겪을 당시 법무부(법무국)에서 이를 공동으로 행사하도록 하였으며, 60년대 법제실이 국무원사무처의 법제국으로 개편될 때 법무부에서 이를 완전히 이관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후 84년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유권해석기능은 법제처에서 관장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에서 법제처로 다시 이관되었던 바, 법무부의 요구사항이 일부 반영되어 법무부 소관법령(민·형사법령 및 각 법률의 벌칙규정 등)에 대해서 만큼은 법무부가 최종 해석권을 갖도록 타협이 이루어졌다. 정부해석기능은 행정각부를 총괄·조정하는 기능에 해당하기 때문에 특정한 행정각부에서 담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국무총리 직속기관인 법제처가 관장하는 것이 우리 정부조직체계에 부합된다고 하겠으나, 한편 생각하면 민사법령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고, 형사법령은 수사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들 법령의 해석은 법무부에서 전속적으로 담당하도록 한것도 타당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정부해석기능은 법령집행과정에서 정부입법견해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법제처의 유권해석 실적을 보면 48년부터 59년까지 총 542건을 처리하였고, 법무부에서 동 기능을 돌려받은 이후인 85년부터 97년까지 총 398건을 처리하였다.
나. 법령보급 홍보기능
법제처는 준법 및 국민의 법생활에 대한 편의제고를 도모하여 법령보급·홍보기능을 관장하고 있다. 특히 법제처는 대한민국현행법령집을 편찬하고 있는 바, 우리는 법령개정에 있어 증보방식(amendment)이 아니라 흡수개정방식(revision)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관보에 게재되는 개정문만 가지고는 법령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고 이를 편집한 현행법령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현행법령집의 편집은 입법기술에 따라 작성된 개정문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함과 아울러 한시법 등의 실효여부 판단, 위헌법률의 표시 등의 문제와 소관부처별·법령내용별 편제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법제처의 직접적인 관여가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방대한 법령을 모두 수록한 현행법령집을 발간하고 수시로 개정되는 법령을 그때마다 추록가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은 정부에서 직접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령집의 편찬은 정부에서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행정자치부에서 관보발간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법령원본의 관리, 공포사무의 주관이 법제처의 기능인 점에서 볼 때 법령관보를 별도로 법제처에서 관장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법제처는 정부수립직후부터 법령집편찬을 고유기능으로 유지하여 왔으나 작은 정부론에 입각하여 민간이양 내지 민간위탁이 가능한 부분은 민간이 담당하게 한다는 취지로 법령집 편찬업무의 상당부분을 특수법인인 한국법제연구원에 맡기고 이를 담당하던 법제정보국의 조직을 대폭 감축한 바 있다. 그러나 관찬 공인법령집의 성격에 변화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법제연구원은 법령집의 발간·보급을 전담하고 있는데 민찬 단행본 법령집이 상업성을 추구하고 있는 점과 비교하여 비영리·공익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발간·보급에서 생기는 최소한의 수익을 활용하여 상업적 출판이 불가능한 법률연혁집(이는 行爲時法主義에 입각한 재판업무에 긴요하다)과 대한민국영문법령집(이는 외국인 투자유치와 IMF 지원조건 이행을 확인시키는데 긴요하다)의 발간을 담당하고 있다.
법제처는 법령홍보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기관지인 「법제」지를 통한 새법령소개와 법령해설·상담을 실시하여 왔으며, 80년대이후에는 TV·라디오·신문 등에 법제관을 출연시키거나 법령 개정요지 및 취지를 게재하게 하는 방법으로 일반국민이 쉽게 법령개정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 법제조사·연구 및 법제정보관리기능
법제처에 독특한 또하나의 기능은 법제조사·연구 및 법제정보관리기능인 바, 법제처 창설 당시 미군정청 도서관을 법제처가 인수한 이래 법제처는 선진입법사례를 조사·분석하고 국내입법수요 및 법의식 조사, 고법전 번역을 통한 전통법제의 계승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헌정운영과 관련된 각종 자료 및 정보의 분석(특히 80년 헌법개정 당시 헌법연구보고서 등 방대한 자료를 편찬한 바 있다) 및 통일에 대비한 북한법제연구에 있어서도 법제처가 강점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이들 각종자료를 데이타베이스화하고 대법원과 공동으로 전산정보망을 구축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라. 기타 기능
그밖에 법제처는 법령정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오래된 법령을 현실에 적합한 법령으로 수정·보완하고 국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법령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며 국내외여건 변화에 따른 국가정책의 적응성을 높여 나가는데 힘쓰고 있다.
법제처는 지방자치제도의 정착 및 발전을 위하여 자치관계법제정비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방자치단체의 자치법규 입법을 직접·간접으로 지원하고 특히 순회 법률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국가기능의 지방이양 추세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Ⅳ. 시대별 입법활동
1. 법제처 창설이전 근대적 법제의 도입과정
한국의 현행법제는 조선말기인 1894년의 갑오경장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흠정헌법이 제정되고 법의 지배와 입법절차의 민주화, 사법절차의 근대화 등 서구적 이념에 입각한 법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등을 박탈하는 보호조약을 체결하고 1910년에는 합병조약에 의하여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는데 이 기간중 한국에는 일본의 법제가 그대로 적용되거나 식민통치에 적합하도록 변형된 법제가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 가족법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구법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에 이식된 일본의 법제는 독일·프랑스등 대륙법계의 법제를 계수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법제도 대륙법계에 속하게 되었고 서구의 근대적 법제에 급속히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오랜 법제전통이 단절되거나 무시되었고 식민통치와 어울릴 수 없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 분야에서는 서구의 근대적 법제와도 판이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남북의 분단을 겪게 되었고 법제면에서도 남북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남한지역에서는 3년간의 미군정을 거쳐 1948년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보게 되었는데, 법제면에서는 식민통치와 관계된 조직법령과 인권관련법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이 도입해 놓은 법제가 그대로 시행되었으나, 새로이 제정·개정된 법령은 미국법제의 영향을 받은 바도 크다고 할 수 있다.
2. 법제처 창설과 국법제도 형성기
48년 정부수립 직전인 7월 17일 제헌국회는 헌법제정과 동시에 법률 제1호로 정부조직법을 공포·시행함으로서 입법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헌법과 정부조직법은 초대 법제처장으로 내정된 유진오박사가 기초를 담당하였다.
그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법률 제5호로 국회법(10. 2)을, 법률 제17호로 국회의원선거법(12. 23)을, 법률 제51호로 법원조직법(9. 26)을 공포하여 권력구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통령령 제1호인 공포식령이 제정되었고 각 부처의 직제가 제정되어 정부의 조직과 작용에 관하여 필요한 법제가 마련되었다.
주요입법으로서는 각종 세법과 지방자치법·병역법·교육법 ·국적법·농지개혁법·국유재산법 등 국가운영의 기초를 이루는 법률들과, 구 일본법제의 잔재를 조속히 없애 나가기 위한 입법으로서 형법·형사소송법·민법 등 기본법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기간중에 이루어진 은행법분야(6.25직전인 50년에 제정)와 노동법분야(6.25중인 53년에 제정)는 미국법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법제처도 그 기틀을 다져 활발히 법령안 심사에 박차를 가하던중 6.25동란이 발발하여 법제처도 부산으로 옮기게 되고 전시에 필요한 법령을 심사하게 되었다. 특히 이 기간중에는 제헌헌법 제57조에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여 긴급명령과 긴급재정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한 바에 따라 14건의 긴급명령과 1건의 긴급재정처분을 발령하였다.
그후 부산에서 국회가 개원되어 피난민수용에관한임시조치법을 공포·시행하는 등 동란을 수습하고 동란중 발하였던 긴급명령도 법률로 흡수 또는 폐지하였다. 다만, 긴급명령 제12호로 발하였던 포획심판령만이 지금까지도 그 효력을 갖고 있다.
제1공화국 정부는 60. 4. 4. 법률 제547호로 민사소송법을 공포하고 막을 내렸다.
3. 정치적 변혁기의 입법활동
60년 4.19혁명이 발발하고 헌법개정을 전후하여 의원내각제 채택에 따른 국회법·정부조직법 및 선거관계법률과 언론·집회 등 기본권 신장에 관한 법률의 제정·개정이 이루어졌으며, 그해 말에는 헌법이 다시 일부 개정되어 부정선거관련자 등의 처벌에 관한 소급입법이 행하여 졌다.
특히 의원내각제에 따라 종래의 대통령령에 갈음하여 국무원령을 발하게 되었는 바, 국무원령 제1호는 60. 6. 17. 공포된 선거위원회법시행령이며, 이는 5.16직전인 61. 5. 10. 국무원령 제257호까지 계속되었다.
5.16후 집권하게된 군부에서는 포고령으로 통치하다가 그해 6월 10일에는 국회기능을 대행하도록 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결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시행하였는데 동법은 「혁명과업」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안에서 기본권을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통합한 일종의 회의제정부를 채택한 비상입법으로서 초헌법적인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 기간중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선거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각종 입법을 추진하였다. 이기간중에는 종래의 국무원령에 갈음하여 「혁명」내각에서 각령을 발하였는 바, 각령 제1호는 61. 5. 31. 공포된 교원보건수당지급규정이며, 제3공화국헌법 시행전 63. 12. 6. 각령 제1765호 서울특별시·부산시·도의교육위원회직제로 그 끝을 맺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2년 7개월동안 법률 제618호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을 위시하여 법률 제1625호 산업재해보상보험업무및심사에관한법률(63. 12. 6.공포)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7건의 법률을 제정·개정 또는 폐지하였다. 이 기간중 특기할 것은 구법령정리사업인 바, 우리나라의 법령은 구한말이래 일제·미군정·과도정부·우리정부에 의한 법령이 혼재되어 왔으나 61. 7. 15.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법률 제659호로 구법령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구법령을 정리하였으며 이 법에서 62. 1. 21.까지 정리되지 아니한 법령은 무효가 되도록하여 그때까지 법률의 정리를 끝내고 62. 3. 31.까지 각령과 부령을 완전히 정리하였다. 이 기간중에는 상법 등 기본법분야의 마무리 입법이 완료되고 근대화 정책을 뒷받침할 각종 법률이 아울러 제정되었다.
4. 경제성장 최우선시대의 입법활동
제3공화국헌법이 시행된 63년부터 71년까지의 입법활동의 특징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경제우선 정책을 뒷받침하는 법령의 제정·개정에 있었다.
그리고 정부형태가 대통령제로 전환됨에 따라 제1공화국시대의 대통령령 제1591호(60. 6. 10.)에 이어 63. 12. 31. 대통령령 제1592호 국무회의규정이 공포·시행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68. 12. 24. 국무총리훈령 제68호로 법령문서를 포함한 모든 공문서의 한글전용이 지시됨에 따라 69년 1월부터 법령중 대통령령과 부령(총리령 포함)을 전부 한글화하는 법령한글화작업을 추진하였고 70년말까지 대통령령과 부령의 한글화작업을 마쳤다.
또한 이 기간중에는 제5차개정헌법 제73조에 따라 이른바 8.3조치라는 사채동결조치를 내용으로 긴급명령이 발령되었다.
제3공화국 말기인 72년에는 남북회담 등을 이유로 국가보위에관한임시조치법이 공포되고 72. 10. 27에는 대통령의 초헌법적 비상조치선언에 따라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기능을 대행하면서 단기간중 엄청난 입법활동을 벌였는데, 비상국무회의법(법률 제2348호 72. 10. 23.)을 필두로 법률 제2617호 철도기본법중개정법률(73. 3. 14.)까지 270건의 법률을 비상국무회의에서 제정 또는 개정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단행된 제7차헌법개정(72. 12. 27.)으로 이른바 유신헌법이 나타났는 바, 여기에서는 대통령의 지위가 대폭 강화되고 국민의 기본권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이른바 「영도적 대통령제」(강학상 신대통령제)의 정부형태를 채택하였다.
유신헌법이 시행되던 기간중에도 제3차 및 제4차 경제사회개발계획이 추진되어 경제성장을 국가의 최우선적 정책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경제관계법령의 입법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 바, 특히 산업구조의 고도화 등 행정여건의 변화에 부응한 입법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한 행정능률의 극대화가 입법활동의 기본목표가 되었다.
한편, 유신헌법 제53조에 근거하여 9건의 대통령긴급조치가 발령되었으며, 유신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10.26 대통령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과도기에는 국회의 권한을 대행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수많은 입법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입법은 제8차개정헌법 부칙 제6조에 따라 추인되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법률 제3260호 국가보위입법회의법(80. 10. 28.)으로부터 법률 제3448호 지방공무원법중개정법률(81. 4. 20.)까지 188건의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였다.
「제5공화국」헌법(유신시대를 제4공화국으로 분류한데 따라 공화국 구분으로서 헌법전문에 명시되었다)은 80. 9. 9. 국무총리가 주재한 헌법개정심의위원회에서 심의안을 확정하고 국무회의의 심의을 거쳐 10월 2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다.
이 기간중에 이루어진 입법활동은 민법·상법·소송법 등 기본법 분야에서 변화된 사회적 여건을 반영한 대폭적인 개정이 이루어졌고,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 지속됨에 따른 법제의 정비·보완과 함께 기본권의 일부를 회복시키는 입법이 추진되었는 바, 민주화의 측면에서는 국민의식의 성숙에 부응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 기간의 말기에는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갈등상황이 전개되었다.
5. 민주주의 이념의 회복과 국민의 정부 출범
85. 2. 12. 실시된 제12대 국회위원선거를 계기로 하여 표면화된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대통령직선제를 통한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선택권 내지 기본권 보장의 확대·강화를 골자로 하는 국민적 개헌요구를 87년 당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이 「6.29선언」의 형태로 수용함으로써 제9차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헌법개정을 위하여 여·야 대표들로 구성된 8인정치회담이 개최되고, 이 회담에서 마련된 단일개헌안이 국회개헌특별위원회에서 채택되어 10월 12일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이어 동년 10월 22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고, 10월 27일에 공포되었으며, 부칙 제1조의 규정에 따라 88. 2. 25.부터 시행되어 지금까지 개정 없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제9차개정헌법의 내용중 가장 특기할 사항은 제7차개정헌법이후 지속되었던 대통령간선제를 대통령직선제로 수정하여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선택권을 보장함과 아울러, 대통령단임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여 민주국가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마련한 점으로서 이에 따라 제13대·제14대·제15대 대통령이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현행헌법 시행직후 출범한 노태우 정부에서는 여소야대의 국회구조가 조성됨에 따라 민주화를 위한 입법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토지공개념법제의 도입등 경제사회구조의 개선도 시도되었다.
김영삼정부에서는 민주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농정개혁·노사개혁·교육개혁·사법개혁 등 각 분야에 걸친 제도개선을 시도하였으며, WTO체제에 대응한 법제정비를 추진하였고, 헌법 제76조의 규정에 따라 금융실명제 도입을 위한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이 한차례 발령되었다.
98. 2. 25. 최초의 정당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면서 출범한 김대중 대통령정부는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의 지역감정을 해소하여 국민통합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의 국가경쟁력을 강화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국정전반의 개혁, 경제난국의 극복, 국민화합의 실현, 법과 질서의 수호를 1998년도 국정지표로 설정하였다.
새정부는 출범전부터 정부조직개편과 사회전반의 구조조정, 외국인투자의 유치와 금융시장 안정을 통한 외환위기의 극복, 실업대책과 경기회복 등을 위하여 다수의 법제를 제정·개정하였으며, 경제·사회의 제반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과도한 행정규제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철폐하여 세계적 수준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이 조성되도록 하고, 행정의 민주성·윤리성을 제고하며, 사회질서의 확립과 건전한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법령의 정비에 노력하고 있다.
Ⅴ. 결 어
정부수립 50주년을 제2의 건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새정부의 방침에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법제처는 정부내 입법통제기관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고 자부하며, 법제처를 거쳐간 선배들이 열악한 조건아래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국민적 정당성을 갖춘 정부에서 국란극복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정비하는 중책을 수행하게 된 우리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조직과 인력 및 예산상의 제약을 극복하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업무를 수행해 온 저력을 발휘하여 2천년대를 내다보는 국가백년대계를 수립하는 일에 140명 전 직원이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법제처 법제기획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