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우일모
- 구분고전명구(형옥야화/고사성어)(저자 : 홍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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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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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809
- 담당 부서
대변인실
九 牛 一 毛
하찮은 존재, 많은 수 가운데 가장 적은 수에 비유해서 이르는 말.
李陵은 漢武帝 때 사람으로, 飛將軍이라 일컬어지던 李廣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잘했으며 대인 관계가 원만했고 사졸들을 내몸과 같이 아꼈다.
天漢 2년(무제의 연호. B.C.99) 가을, 貳師將軍 李廣利가 3만기를 거느리고 匈奴(흉노:북방의 몽고족) 정벌에 나섰을 때 李陵은 보졸 5천을 거느리고 居延을 지나 흉노의 땅으로 1천여리나 깊숙이 쳐들어 갔다.
李陵의 군졸은 5천에 불과했으나 그의 용명은 흉노의 간담을 서늘케하여 이르는 곳에 대항하려는 적이 없었다.
이럴즈음 李陵의 軍候로 있던 管敢이란 자가 군령을 어겨 문책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관감은 흉노에게로 도망, 투항했다.
관감은 "李陵이 비록 용맹스럽긴 하지만 병력은 불과 5천, 주력부대와의 거리가 멀어 그 지원이 어려우므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압박하여 들어간다면 李陵을 꺾을 수 있다"라고 單于(선우:흉노의 추장)에게 말했다.
선우는 관감의 제보에 용기를 얻어 8만 병력을 동원하여 李陵을 포위했다.
李陵의 5천 보졸은 한덩어리가 되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며 싸웠다. 사졸은 반 이상이 꺾이고 보급품은 바닥이 드러났다.
일면 전투, 일면 후퇴를 거듭하기 8일만에 居延 땅을 불과 1백여리를 남겨두고 협곡에서 흉노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군량은 떨어지고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李陵은 기진맥진,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설령 벗어난다 하더라도 5천의 군졸을 꺾인 敗軍之將이 漢나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우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이때 李陵의 군졸로서 흩어져 달아나 한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4백명이었다.
선우는 李陵을 얻고 크게 기뻐하여 자기 딸을 아내로 내어주고 지위를 높이어 주었다.
漢武帝는 李陵의 소식을 접해 듣자 펄펄 뛰었다. 그 처벌 문제를 군신들과 논의했다. 군신들은 격노한 帝의 비위를 거스르면 화를 입을까 하는 위구심에서 눈치만 살피다가 李陵에게 벌을 내림이 옳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太史令으로 있던 司馬遷(史記의 저자)은 감연이 李陵을 변호하여 "5천 병력으로 흉노 땅 깊숙이 쳐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케 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가 困境에 처하자 죽지 않고 흉노에게 항복한 것은 기회를 보아 漢祖國에 보답할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일 것이며, 기민하게 지원해 주지 않은 책임도 있으니 관대하게 처분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武帝는 司馬遷의 말을 듣고 더욱 화를 내어 "조국을 배반한 李陵을 보호하러 든다"라고 하고 司馬遷을 獄에 내려 마침내 腐刑(男性을 제거하는 형벌)을 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李陵의 어머니·아우·처자 등 일족도 모두 斬刑에 처했다.
司馬遷이 부형 당하기전 獄에 있을 때 任安에게 보낸 글에서 「가령 내가 법에 의하여 형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아홉 마리의 소에게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은(若九牛亡一毛), 세상에는 하찮은 일」이라고 하였다.
司馬遷은 폐인이 되자 비분강개한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죽을까도 마음을 먹었으나 "通史를 기록하여 바른 역사를 전하도록 하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그를 죽음에서 붙들어 앉혀 붓을 들게 하였다.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여 20여년, 마침내 그는 1백 30권이란 방대한 《史記》를 저술해 냈던 것이다[前漢書 六十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