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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관지(4)
  • 구분특집(저자 : 편집실)
  • 등록일 2009-01-01
  • 조회수 2,924
  • 담당 부서 대변인실
秋 官 志 (4) 奸 淫 奸淫으로 因하여 妻를 죽이다. 〔補〕 宣祖 10年의 本曺 啓目에 의하면 大明律에 妻를 죽인 자는 絞刑에 處하고 妻를 죽인 자는 徒 3年刑에 處하게 되어 있다. 書吏 盧舜卿이 지금 花妻 丁伊를 죽였는데 우리나라에서 賤人들이 本妻外에 또 다른 女子에 장가들면 그것을 花妻라고 하였으니 大盖 이것을 妾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大典 鄕吏條에 이르기를, 良女와 밑 官婢로 妾을 삼으면 鄕吏들이 이미 妾이라 하였으니 書吏도 역시 마땅히 妾이라 할 것이다 하였으나 法律을 다룰 때는 妻라고 하는 것과 妾이라 하는 것이 그 輕重이 아주 다른 것이니 이것을 大臣들에게 議論하도록 請하였다. 議政 朴 渟의 奏議에 이것은 마땅히 妾의 例에 의하여 論할 것이라 하였다. 위에서 奏議한대로 이에 의하여 允許한다고 裁可 하시다. 肅宗 15年 本曺啓目에 의하면 平安道사람 잉복의 妻 己香이 金有先과 가만이 通奸하였는데 잉복이가 宋望從과 같이 己香과 有先을 잡아 가지고 江물에 집어넣어 죽였다. 律文에 依하면 殺人을 主謀한 者는 斬刑에 處하고 殺人하는데 加功한 者도 絞首刑에 處한다고 하였는데 그 註釋에 이르기를, 사람을 죽일 때에 비록 직접 下手는 하지 아니 하여도 길을 막고서 못가게 하여 犯行하는데 容易하게 한 것도 곧 이것이 加功한 것이라 하였으니 望從이 비록 己香과 有先을 沈殺할 때에 直接 下手는 하지 아니 하였다 할지라도 그때 힘을 같이 하여 그들을 驅迫하였으니 이것이 길을 막고서 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請컨데 잉복은 斬刑에 處하고 望從은 絞首刑에 處하라 하였더니 判決하신 內容에 依하면 잉복이 비록 奸淫할 때에 捕捉하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奸淫한 場所에서 捕捉한 것은 다름이 없으니 그 情狀은 容恕할만도 하다. 잉복에게 이미 그 情狀을 參酌하여 死刑을 하지 아니한다면 望從에게도 加功하였다는 律로서 絞刑을 施行할 수는 없으니 아울러 死刑에 1等 減刑하여 定配시키게 하라 하였다. 英租 3年 黃海監司 金의 啓本에 依하면 谷山郡罪人 宋之元이 그 妻 笑花라는 女子가 본래 良家 女子인데 婚禮를 갖추어 장가가서 같이 16年이나 살아왔는데 이 笑花가 중 令熙·弘律等으로 서루 同奸하여 그 罪로 官婢에 定屬되고 말았는데 之元이는 그 妻와 平生을 같이 살아오던 糟糠의 情을 잊을수가 없어서 찾아가서 집으로 같이 가자고 하니 笑花가 듣지 아니하므로 憤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가 차고있던 칼을 뽑아서 찔러 죽였던 것이다. 三覆審하여 判決한 內容에 依하면 笑花가 이미 官婢에 定屬한 後이라면 本夫로서 그때를 타서 죽였다 하여도 심히 異常할 것은 없는 것이니 또 본래 잘못 疑心하여 죽인 것도 아니니 强逼하여 죽인 罪에 대한 法律로 論하는 것은 꼭 當着하지 못할 것 같으니 特히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英租 20年에 서울 사는 金世萬이 그 妻 印召史를 찔러 죽였다. 世萬의 供招에 의하면 이몸이 印召史에게 장가들어 25年이 되었는데 아들도 4名을 낳았으나 또 花妻를 얻어 살았더니 印女가 妬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남편에 對하여 不順한 擧措가 많았다. 한번은 저의 자식 두아이가 울면서 이 몸에게 말하기를 항상 殊常한 사람이 어머니에게 늘 往來한다고 하므로 每日 가서 어떤 男子가 오는가 가만이 였보고 있었더니 어느날 밤이 깊어 人定鍾이 울 무렵에 果然 印女가 어떤 男子와 같이 房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곧 뒤따라 들어가서 잡으려 하였으나 캄캄한 어두운 밤에 혼자 들어 가면 또 意外의 念慮될 일이 있을가 두려워 하여 밖에서 燈불을 밝히라고 하였더니 그 男子는 卽時 逃走하여 갔습니다. 이몸이 憤함을 먹음고 집에 돌아왔더니 印女가 뒤에 이몸을 쫓아와서 發惡할 뿐아니라 저의 어미에게 달라들어 떼 밀고 辱說을 막 하여 그치지 아니 하므로 憤痛함을 이기지 못하여 果然 佩刀를 뽑아 가지고 찔러 죽였다 하여 自服을 받아 罪案을 終結하였는데 30年에 다시 査實하게 되어 判決한 內容에 依하면 特別한 下敎를 모시고서 自服한 招辭로 본다면 그날 밤에 불을 밝히라고 한 것은 어둔운 방에 들어가면 그 女子와 奸夫가 도로 찌를까 두려워 한 것이니 이쪽에서 먼저 소리 쳐서 恐喝하고 威 한 實狀은 그 供招만 들어도 보는것 같이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바로 들어가서 잡지 아니하고 밖에서 燈불을 켜라고 했을 것인가 또 옛날 사람은 어미 앞에서 그 妻가 개만 꾸짖어도 그 妻를 逐出하였다 하거던 하물며 印召史가 直接 그 어미에게 辱만 하였음이랴 故意로 죽였는지 與否는 위선 두고서 말할 것도 없고 이 一節만으로도 그 罪人에 可히 參酌할 端緖가 되는 것을 오늘 와서 크게 覺得하였다. 子息이 어미의 奸行을 證言함으로써 그 아비를 殺人罪로 죽인다는 것은 倫理로 보아서 크게 옳지 못한 것인데 그가 特別下敎한 뒤에 20年後에 아무 말없이 遲晩自服한 것은 亦是 人心이 있는 것이니 그 事件 內容이 이러하고 法律條文이 또 이러한데 다시 여기서 臆測으로 逆解하여 刑을 加重한다면 어찌 人命을 살려서 愼重히 하는 道理라 하겠는가 지금 나의 뜻은 特히 이뿐만 아니라 子息으로서 어미의 證言을 한다는 것은 倫常에 크게 關係되는 것이니 그 根本問題가 子息에게로 부터 일어 났으면 이 犯罪를 問罪하느냐 不問하느냐는 또한 可히 議論할 것도 아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나 이것을 不問한다는 律文으로 引用하여 勘案한다는 것은 너무 輕率한 것이니 金世萬은 遠地에 定配하게 하라 王者는 孝道로서 政治의 根本으로 삼는 것이니 世萬의 두 子息이 옛날 朱春昌의 아들 道郁에 比하면 나이 비록 어리고 弱할 것이나 지금은 이 事件이 일어나고서 이미 數十年이 지나서 그들의 나이도 마땅히 찼을 것이니 그 두아들을 決杖을 쳐서 徒配의 刑에 處하게 하라 하였다. 39年에 平安監司의 啓本에 依하면 嘉山사람 李壽得山의 妻 徐召史가 無端히 逃亡쳐 避身하므로 겨우 搜索하여 잡아오니 그 女가 또 請하기를 달리 살러 갈곳이 있으니 너와는 永久히 떨어져서 버리도록 誓約을 하자고 하므로 夫 壽得山이 憤痛함을 이기지 못하여 毆打하다가 죽기에 이르렀다 詳覆할 때에 判決한 內容을 보면 지금 이 事件 處理를 爲하여 日氣가 차가운데도 이와 같이 啓覆하는 理由는 하나는 可히 參酌하여 處決할 것이므로 未決로 한해를 더 넘길 것 없다는 것이오 또 하나는 犯人을 사람죽인 자는 제목숨으로 代償하여 被殺된 者를 慰安하여 주는데 亦是 이런 事件인 만큼 해를 넘기지 말고 年內로 處理하자는 本意임은 알겠으나 王者의 重要하게 여기는 것은 倫氣와 이則이다. 徐召史가 그 남편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간곳을 알지 못하게 逃亡쳤다가 또 그 남편의 叱語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또 서로 갈여지자고 誓約을 請求하는 것을 보면 그 女에게는 벌써 倫氣는 다 亡하고 없는 것이다. 或者는 일르기를 이런 무리들에게 어찌 可히 倫常과 이칙으로 規定할 수 있겠는가 하지마는 만약 이런 것을 그대로 尋常히 넘긴다면 三綱行實中에는 장차 賤한 身分을 가진 者로서는 烈女는 없을 것으로 斷定할 것이란 말인가 3次 檢驗에도 그 犯罪의 實地 原因이 다 堅固 또는 强硬한 證據가 없고 그 女의 被死한 것은 果然 이것이 어찌다가 이루워진 邂逅인 것이니 特히 壽得山의 罪는 死刑에서 減하여 極邊地方에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補〕 今上(正祖) 2年에 江界에 사는 居士 式連이 그 妻를 打殺하여 招辭를 받아 罪案을 終結하였는데 三覆할 때 判決한 內容을 보면 殺人한 形跡은 비록 甚히 昭然하게 明白하여 疑心할 餘地가 없으나 大盖 이것이 그 女를 죽기에 이르게 한 것은 거의 偶然的 邂逅라고 보기에 가깝다. 또 그들이 싸움을 일으킨 原因이 그 女가 가만이 奸淫하였다는 데에서 일어난 것이니 그 實情을 原究하여 보면 이 犯人에게는 살려주는 恩典을 베푸는 것이 合當한 것이니 式連을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기로 하라 하였다. 〔補〕 5年에 順天사람 金加八伊가 그 花妻 朴召史를 毆打하여 죽기에 이르렀다. 道監司 徐有隣의 啓本 記錄에 因하여 本曺判書 金魯鎭의 回啓하기를 그 屍體를 비록 發掘하여 檢査하지는 아니 하였으나 頭部가 破傷되었다는 것과 下陰部를 후벼 파낸것이 兩村의 여러 사람과 韓巖回의 置人과 面質할 때에 한입에서 나오듯이 같은 말을 하였으니 加八伊의 兇惡한 行爲는 極히 慘毒한 것이니 이것으로 獄事를 成立시켜서 犯人의 生命으로 代償케 할 것은 아니할수 없는 바이나 그 中에도 一分쯤 可司 容恕할 것은 加八伊와 朴召史와는 처음부터 結髮한 夫婦關係가 아니고 朴女가 元남편이 죽으니 子息을 버리고 그 隣洞에 와서 살고 있을때 加八伊와 더불어 交接하여 往來하게 된지가 거의 6, 7年이나 되었는데 加八伊가 오래동안 오지 아니하니 그 女가 또 李太水와 가만이 奸通하였다는 것은 太水의 自服에서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裵太王等이 보고서 證言하는 데서도 亦是 다 드러난 것이니 그 女의 亂行과 奔淫한 것이 이미 다 露出된 것이다. 今番에 錚을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이것이 加八伊의 正妻인 朴女이고 이번에 죽은 朴召史는 즉 加八伊의 花妻이다. 시집가면 妻라 하고 제데로 달라빼서 오면 妾이라고 한다는데 上下의 階級에 間隔은 없는 것이나 大明律의 妻妾을 毆打한 夫의 條에 詳考하면 실려 있기를, 남편이 妻를 毆打하여 죽기에 이른 것은 絞首의 刑에 處하고 妻을 毆打하여 죽게 한 것은 杖 100度 徒3年이라 하였고 또 萬曆 丁丑年에 宣祖王의 受敎에도 亦是 花妻를 毆打하여 致死케한 者는 妻를 打殺한 例로 論하여 杖 100度 徒3年으로 하라 하였으니 이 罪가 赦免할 수는 없으나 律文은 定해져 이미 依據할 것이 있읍니다. 그러나 이 獄體가 至極히 重大하여 敢히 擅便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위에서 裁決하여 判定한 內容을 보면 妻를 毆打한 것이 妾을 毆打한 것과 律文이 輕重이 있어 明나라의 斷定한 律文과 우리나라의 受敎한 것이 實로 고칠수 없는 法典이다. 卿等이 이것을 引用하여 遵守하려는 것이 진실로 的確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加八이 朴女를 때려 죽인 것은 그 情理의 兇慘한 것이 近來의 殺人獄事로서는 듣기에 드물 만치 큰 것이다. 頭腦 破碎하였다는 것은 或憤에 이기지 못해서 그렇게 하였으리라고 하지만 陰門을 후벼파 냈다는 것은 어찌 차마 이런 짓을 下手하겠는가 이런 罪를 가볍게 處理한다면 어찌 죽은자의 寃慟함을 慰勞하겠으며 또 먼 地方의 兇惡한 風俗을 단속할 수 있겠는가 나라에서 法을 適用하는데 더디게 끌면서 疑心을 많이 하여 能히 急작스럽게 決定하지 못하는 것이 그 意義가 참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여 보니 卿等의 말이 이미 依據하는 明文이 있으니 道司에게 命하여 用刑을 기다려 다시 嚴刑을 더 하여 年限의 制限이 없이 다시 覇實한 記錄을 고쳐서 分付를 받게 하라 하였다. 〔補〕 同年에 光州사람 朴同叱介가 그 妻 李召史를 찔러서 죽기에 이르렀다. 道臣 徐有隣의 事實記錄한 啓本과 本曺判書 金魯鎭의 回啓에 依하면 사람을 죽인 者는 죽어야 된다는 것은 三尺의 法文이 至極히 嚴한 것인데 홀로 奸淫한 現場에서 捕捉한 男女는 같이 죽여도 代償으로 목숨을 가져오지 아니한다는 律文이 法典에 실려있는 것은 大蓋 淫行을 止息케 하고 奸惡을 단속하며 風俗을 敦厚하게 激勵하려는 本意가 그 사이에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 朴同叱介가 妻를 죽인 獄事에 對하여서는 그 屍帳에 記載된 實地死因과 行兇한 情節은 우선 그냥 두어 論하지 말고라도 먼저 그 妻의 淫奸하였다는 虛實로서 同叱介가 償命하여야 될 것인가의 當否가 斷定될 것이다. 金成玉이가 가만이 朴의 妻 李召史를 奸淫한 事實은 元犯人의 3次에 걸쳐 證人을 세운 招辭는 비록 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李女가 코를 비일 때를 當하여 그 어미나 그 甥侄이 직접 보고서 팔장만 끼고서 救해 주지 아니하고 또 成玉이가 볼기를 때릴 때에도 그 祖父나 그 아비가 아무런 다른 말은 없고 그저 살려 달라고 빌기만 하는 것을 본다면 李女가 奸淫을 한 것은 元犯人의 供招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라도 착착이 證據가 되는 것이다. 또 結髮 夫婦의 妻로서 아들을 4人이나 낳고 19年동안이나 同居生活하여 나이 젊은 것도 아니고 愛情도 깊으지 아니함이 아닌데 一時의 淫慾으로 從弟의 남편과 通奸하였으니 그 情節을 들추어 본다면 萬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本夫된 者로서는 참으로 血氣가 있는 자라면 그런 事實을 한번보고 두번 보고서 어찌 죽이자고 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술집에서 降服받은 것이라던가 本家에 다리고 간 것등이 그가 處置한 所行이 條理가 없이 한 것도 아니다. 또 그 傷處로 보아도 元來에 그 傷處난 곳이 要害의 場所로서 致命傷을 이룩할 곳도 아니니 그 本情을 따져보면 처음부터 반드시 죽이려고 下手한 것도 아닌 것인데 이와같은 犯人에게 그 목숨을 代償케 함은 獄事를 審愼히 하고 救恤하는데 欠缺되는 것이 있으며 또 獄體가 至極히 무거우니 敢히 擅하여 處斷할 수 없으므로 主上의 裁可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하신 內容에 依하면 情理上로나 法理上으로나 다 容恕할 點이 있고 그 女가 淫奸한 形跡이 그와 같이 分明하다면 同叱介란 者가 오히려 血氣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下平하는 擧措를 하지아니 하겠는가 그러나 그 處置하는 方法이 또 條理가 없지도 아니하니 이 犯人을 살려주자는 議論은 刑獄을 審愼하는 政事에 害되지아니 한다. 그러므로 特히 朴同叱介는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補〕 同年에 安義사람 金七甲이 그 妻 朴召史를 毆打하여 죽게 하였다. 道臣 趙時俊의 稟啓와 本曺判書 徐浩修의 回啓에 依하면 檢驗할 때에 傷處난 痕跡이 모두 致命傷을 줄만한 要害處가 아닌 곳이 없다. 그가 供招한 中에 依하면 어떤 사람이 自己妻와 같이 누웠는데 밝은 달빛이 窓에 들어 있기에 자세히 그 사람을 살펴보니 이것이 곳 田正直이 였다 라고 하였으니 어디 間夫와 奸婦로써 그 本夫가 곁에있는 것을 알면서 제마음대로 서로끼고 이와같이 奸淫을 한단 말인가 平常時에 서루 通하였다고 하면 이것이 異常한 일이라 할 수도 없겠으나 七甲의 供招에 依하면 이것은 抑勒한 것이 明白하다. 이 犯罪에 關係되어 干連된 것은 모두 七甲의 어미와 妹와 妹夫인 義兄이니 이들은 참으로 公平한 證人이라고 할 수도 없으나 그 中에 金再中은 七甲의 妹夫로서 나이도 가장 많은 者이다. 그 사람의 招詞에 依하면 七甲이가 그 어미와 妹弟로 더불어 등을 밀치면서 나가라고 쫓아내서 朴女은 딱 버티고 앉아서 가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七甲의 母가 그 女의 머리채를 검어잡고 七甲의 妹는 앞으로 朴女를 동여 묶고 七甲이는 朴女의 배우에 쓰러져서 주먹으로 그 등과 배와 밥통과 어깨를 막 때렸으니 孕胎한지 7朔이 된 朴女가 落胎하고서 죽게 되었다는 것은 진실로 必然의 勢이니 犯人에 償命의 律을 適用한다는 것은 다시 더 議論할 餘地도 없는 것이니 道臣의 結辭에 이르기를, 남편이 妻를 죽였으니 法으로는 償命할 것이다. 비록 그러나 그 妻가 奸淫한 嫌疑로 가볍게 毆打當한 것이라 하니 犯人의 心情도 容恕할만한 것이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意外라고 하겠다. 그 毒한 毆打로 因하여 어미와 胎兒가 아울러 목숨을 잃었으니 이것이 더욱이 殘忍한 것이니 請컨데 法에 依하여 같이 推鞠할 것이라 하였다. 判決한 內容을 보면 屍帳에 記錄된 被殺된 實地原因은 비록 狼藉히 맞인 것이라 하였으나 證人들의 招辭에 보면 마침내 明白히 分辨이 되지 못한다. 大抵 朴女가 奸行하였다고 疑心을 받게 되어 마침내는 奴婢로 定屬되었다고 하니 그 남편으로서 憤 함을 못이기는 것은 人情으로서 떳떳한 것이고 家人들이 놀랍고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도 事理로 보아서 當然한 것이다. 그러나 그 女가 媤집에서 쫓아냄을 當하여도 스스로 發惡하면서 가질 아니하고 스스로 돌아오려고 할 때를 當하여 한쪽에서 반드시 奸淫한 女人이라고 몰아내려고 하였고 女人쪽에서는 그것이 억울하니 반드시 그냥 머물어 있으려고 하여 서로 딩굴며 넘어지며 싸움이 層激을 만들어 그 때 光景이 위험하고 무서웠는데 畢竟은 七甲이가 그 女를 끌고 나올 때에 男子는 힘이 강하고 女子는 弱한데 손을 뿌리치고 땅에 누워서 서로 들어받고 깔아 뭉기고 하다가 그만 넘어지고 엎드러지고 하였으니 7朔째나는 胎兒가 가슴을 치고 어깨를 두들기지 아니하였다고 해도 이미 반드시 죽을 徵兆가 充分히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그 妹가 팔을 동여 묶고 그 母가 잔등이를 두들기고 七甲이는 발을 꺼꾸로 들고 貴三이는 허리를 붙잡았다하고 그 外에 許多한 여러 사람들이 각기 또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한즉 그 女의 죽기로서 가지 아니하려는 마음으로 相對便의 반드시 죽기로서 쫓으려고 威勢에 對應하느라면 그 사이에 서로 치고 박고 한 것은 可히 미루워서 알 수 있는 것인즉 朴女의 不日內에 목숨이 끊어진 것은 果然 어느사람의 손에 맞은 것인지 的實히는 알 수 없고 또 그 屍親의 처음 招辭中에 朴女가 죽기를 臨하여 말한 것으로 본다면 七甲이와 順結이와 그 妹와 妹夫 貴三이 再中등이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서로 두들기고 차고 하였다 하니 만약 이것이 七甲의 혼자 犯行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 女가 이 여러 사람의 같이 힘을 써서 죽인 것을 자세하게 들어 말하고 七甲이가 혼자서 下手하였다는 것은 分明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을가 가령 再中과 貴三의 招辭에 비록 依據할 만한 證言이 있다할 지라도 저들의 같이 손질을 犯行했다는 것은 계절하게도 屍親의 첫번 招辭에 나왔으므로 自己가 關係되는 犯行에 對하여 바양으로 發明하는데 妹夫의 生死를 어느 餘暇에 돌아보겠는가 이것이 처음에는 어름어름하면서 주책없는 소리만 하다가 끝내는 비로소 삼켰다가 吐說도 한 것이 전혀 발뺌과 罪를 免하려는 計算에서 나온 것이다. 두놈이 供招한 것은 더욱 足히 取信할 價値도 없으니 이 獄事는 宜선當히 朴女가 말한 여러 사람이 서로 차고 때리고 하였다는 說로서 第一가는 背棨으로 할 것이고 七甲이를 그女의 남편이라하여 바로 이 獄事의 元犯으로 잡는 것은 마침내 疑問의 그믐밤으로 드러가고 말 것이다. 元犯이 主體가 되는 것인데 元犯을 이미 的實히 犯하지 못하게 되었으면 罪는 여러사람이 같이 毆打한 것에 있다할 지니 그런데 刑은 한 사람에게만 미치게 함은 어디까지나 獄事를 審愼하는 方道가 아닌 것이다. 道臣의 啓辭에 말한 奸淫의 嫌疑로 因하여 가벼히 毆打한 것이니 그心情도 可히 容恕할 만하다고 한것도 亦是 依據한 바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마땅히 疑獄에는 가벼운 刑罰을 쓰라는 原則으로 施行할 수 밖에 없으니 七甲은 死罪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 6年에 黃龍金이 都召史를 찌르고 때려서 卽地에서 죽게 하였는데 實地 原因은 두들겨 맞은데 있다고 하였다. 道臣의 狀啓에 依하면 都女가 金益重이와 通奸하고 逃走하다가 本夫에게 現地에서 잡혔으니 이것이 相奸하는 現場에서 捕捉한 것과 甚히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니 그 贓跡이 發露된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 그 兄과 그 叔이 往來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즉 그 사이 3年동안이나 참아 오다가 도리혀 賂物로 돈 20兩을 討索하고서 이와 같이 殘酷하게 忽地에 처죽였으니 世上의 應當 죽여야 될 것은 제 말대로 죽인 것과는 그 罪가 조금 重한 것 같다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依하면 都召史가 金益重이와 同居한 지가 이미 3年이 되었는데 龍金이가 官에 告訴하여 公奴婢로 定屬케하여 이미 絶緣한 뒤에 이때 와서 賂物을 討索하다가 듣지 아니 하니 비로소 찌르고 두들기고 하여 죽였으니 龍金은 法에 依하여 推鞫할 것이라고 하였다. 判付한 內容에 보면 本妻를 잃고서 다른 데로 장가 간것이 이미 3年前에 한 일인데 성을내서 兇行하고 또 20兩의 賂物로 因하여 칼과 망치를 같이써서 犯行한 情跡이 至極히 凶惡하니 卿의 主管하는 刑曺로서는 法지키는데 主로하여 그러한 結論에 到達한 것은 宜當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골 오막살이 집에서 切近한 人情으로 지금 반드시 죽는 가운데서 살기를 求하려 한다면 또한 스스로 可히 살아날 길이 있기도 할 것이다. 대개 이 龍金이가 지극히 가난하고 궁한 사람으로서 겨우 艱辛히 妻를 하나 얻었 다가 忽地에 또 잃게 되어 주려도 밥을 끓일 수 도 없고 추워도 옷을 꿰매서 입을 수도 없으니 妻잃은 憤한 마음이 어찌 일찌기 하루라도 그 心中에 살아질때가 있겠는가 妻있는 곳을 알아도 推尋도 못했고 官에 呈訴하여도 속시원히 그 女의 罪를 猛烈히 다스려 주지도 아니하고 自己 혼자 홀애비로 있으면서 無聊하게 지나니 갖은 苦楚를 다 겪게 되었던 것이다. 쌓인 憤怒가 가슴에 가로질러서 한번 이것을 속시원히 해워 내고자 하고 있었을 터이니 世上에 妻를 잃고서 다시 찾고 또 찾았다가 또 곧 버려서 계집의 가는데로 맡겨두고 그냥 두었다가 서로 잊어버리는 者들과는 크게 그 間隔이 있는 것이다. 어찌 그동안 歲月이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論할 것인가 비록 5年이나 10年이 지났다 해도 都女와 金漢이 같이 있는 곳은 龍金의 恥辱을 솔질하여 주는 奸淫하는 場所인 것이다. 그 兄과 그 叔이 비록 通信은 하여 주었다고 하지만은 그 女의 現住하는 집을 가르쳐 주는 데와 그집에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모두 不正確하였다는 한가지 일로 말하여도 可히 그 女의 淫行이 本夫에게 맞아 죽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 반드시 償命하여야 할 證案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 本夫가 賂物을 討索한 것이 이미 極히 괘씸한 짓이고 또 죽인 方法이 또한 甚히 殘酷하니 重刑으로 勘定하여 科罪하지 아니할 수도 없으나 漢나라의 約法 3章이 이따위 種類의 犯罪를 이름이 아닐 것이니 龍金은 特히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고 因하여 配所官에 命하여 用刑할 때를 기다려 다시 嚴刑하여 懲礪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8年에 朔州 洪宗淵이 銃으로 그 妻 金召史와 및 그집 머슴 鄭尙元을 쏘아 鄭尙元은 卽地에서 죽고 金女는 重傷을 입고 61日만에 죽었는데 實地原因은 다 銃에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道에 올린 啓本에 의하여 刑曹의 回啓에 의하면 淫行하는 妻와 奸通한 間夫를 同時에 捕捉하여 같이 나무 밑에 붙들어 묶어 놓고 총 한방으로 貫通시켜 죽이려 한 것이다. 大槪 그 奸通한 男子는 卽 自己집 雇工이고 淫奔한 女子는 이것이 自己의 正妻이니 머슴놈이 主人의 正妻를 도적질 하여 이미 죽을 罪에 犯하였고 또 그들이 같이 품고 자던 房이 곧 奸行한 場所이니 法律의 本意로 따져 보면 이것은 죽여도 償命하는 것은 不當하다고 하였다. 判付하신 內容에 보면 官에 告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죽인 것이 그 律文은 至極히 嚴하고 아비같은 位置에 있는자가 자식 같은 그 雇工을 죽였다는 것은 그 心情을 論하면 至極히 殘忍하다. 門앞에서 銃을 둘러 맬적에 이미 한 꼬지로 꾀뚫을 마음을 가진 것은 判定할 수 있는 것이고 고개 위에서 藥을 살고있는 것이 三尺의 法典에 定하여 있는 死罪를 달갑게 犯할 計劃이었다. 當初에 獄事가 成立할 때부터 大槪가 어렵고 愼重한 事件인데 犯人을 執捉한 것이 奸淫한 場所에서 하였고 淫行한 자는 또 그의 雇工놈이니 憤한 마음을 타고서 兇行을 犯한 것도 이것이 異常한 일은 아니다. 兵器를 私用한 것이 正當한가 아닌가를 말함은 참으로 몽둥이나 칼로 죽인 것이 어찌 다르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本夫가 奸夫를 죽였을 때는 罪를 論하지 말라하는 法文도 또한 足히 間接으로 照準할 수 있는 端緖는 되는 것이니 이 犯人은 參酌하여 刑을 더한 후에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9年에 楚山사는 朴初廷이 발로 奸夫 崔有西를 차고 奸婦 劉永每를 눌려 숨통이 막히게 하여 그날로 둘이 다 죽게 하였다. 죽은 實地原因은 발로 차이고 눌려 숨이 막힌 것으로 記載되어 있다. 道臣의 啓本에 의하면 깊숙한 숲속에서 狼藉히 奸淫하다가 本夫가 忽地에 現場에 달려가서 잠간 사이에 男女를 모두 죽여 버리고 나니 犯人은 다만 사람을 죽였으니 自己도 마땅히 죽는다는 法律만 알았고 奸淫하는 그때에 捕捉한 犯行은 罪를 論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크게 겁심을 먹고서 그 殺害한 形跡을 덮어서 숨기려고 죽을 者를 끌어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自殺한 模樣을 꾸며 法의 눈을 眩亂케 하려는 計策을 한 것은 비록 心情이 極히 兇慘하다고 하겠으나 그 뒤에 犯人自身이 나와서 스스로 告白하였고 奸淫한 形跡이 이미 現場에서 捕捉하였으니 이 事件은 마땅히 償命할 罪로 完全히 決定하기에는 가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甲辰年의 受敎에 의하여 槪況을 記錄하여 狀啓를 上聞하는 바이라 하였다. 刑曺 回啓도 같은데 判付한 內容을 보면, 奸夫와 淫女를 一時에 奸行하는 現場에서 같이 죽였으니 律文에 參照하여 그 本夫를 一毫라도 罪줄만한 端緖는 없는 것이다. 犯人이 假짜로 被殺者가 목매여 죽은 흔적을 만들어서 法의 눈을 막아 보려는 計策을 한 것은 이것이 無識한 쌍놈이 律文에 定하여져 있는 것을 모르는 所致이다. 하물며 尹가와 金가도 이미 다 白放하였으니 初廷은 尹·金 두사람에 比하여도 더욱 罪가 적은 것이니 初廷도 卽時 釋放하여 보내주라 하였다. 〔重補〕同年 務安郡 鄭金不이란 자가 그 妻 金召史의 코와 팔을 칼로 잘라서 11日만에 出血過多로 죽었다. 죽은 實地原因은 팔을 자른 때문이라고 記錄되어 있었다. 道臣의 狀啓에 의하면 金召史가 行奸한 것은 中伊란 자가 目擊하여 다 暴露된 것인데 金不이가 찾아 다니다가 마침내 奸夫의 房에서 捕捉하여 憤氣가 激發하므로 반드시 죽이는 變故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 목숨이 끊어지기는 奸行하는 卽時에 한것과는 다른 것이고 팔을 자른 所行이 實로 兇慘하니 이 犯罪는 可히 容恕할 수는 없으니 嚴重히 訊問하여 償命케 할 것이라 하였다. 判付하신 內容에 보면 이 犯行은 傳해서 들은 것이니 現場을 目擊한 것과는 이미 다른 것이고 또 捕捉한 것도 또 直接 行奸한 場所에서 한 것과도 다른데 코를 베이고 팔을 자르고 하여 兇臆한 行動을 恣行하였으니 慘毒하기 至極하며 獰毒하고 頑惡하기도 甚하다. 情으로 봐서도 容恕할 수 없고 法으로 해도 容恕할 수 없는 것인데 本 奸淫에 對한 法文制定한 本意를 가지고 理會하여 본다면 奸行한 場所에서 目擊한 本夫가 奸淫한 男女를 같이 죽인 것은 元來에 償命할 責任이 없다고 定해진 律文은 大盖 淫奸을 禁하려는 本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도망쳐 간 곳이 果然 破回의 집이 였으니 그 時刻에 잡은 것이고 그것을 問責하는데도 中伊의 目擊한 말을 들어서 하니 아무런 말이 없이 自服하였다 하니 奸淫한 場所에서 目擊한 것과 다르다고 爭議하여도 그 差異點은 한자나 한치만치의 짧은 距離에 不過하다. 코를 베고 팔을 자른 것이 비록 甚히 兇慘하였으나 코와 팔은 본래 사람이 致死하는 要害의 곳도 아니고 만약 卽時로 求療한다면 죽지 않을 수에 이르게도 될 것이니 卽席에서 손으로 칼로 죽인 것과는 크게 間隔이 있는 것이다. 만약 옛날 張釋이 같은 名刑吏로 이 事件의 科罪를 上奏하게 한다면 반드시 杖·流刑에 이르고 말 것이나 또한 이것을 그다지 가벼이 勘案하여 放送할 수도 없는 것이니 金不을 3次에 걸쳐 嚴刑하고 死罪에서 減하여 絶島로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14年 서울 사는 曺命根이 그 妻인 婢女 三每를 칼로 찔러서 卽席에서 죽게 하였다. 實地死因은 亦是 찔려서 죽은 것으로 되어 刑曺에서 完結하기를, 三每가 行淫한 것은 本夫가 이미 目擊한 적도 없고 그女를 3곳이나 찔러서 죽였다는 것은 犯人도 이미 遲晩하여 自白하였으니 이로써 結案하여 取服한 것이라 하였다. 判付한 內容에 依하면, 이獄事는 한 말로 덮어서 말한다면 마땅히 獄事가 成立될 수 없다고 하겠다. 앞서 先朝에서 내린 敎命을 받을 적에 有夫女의 치마를 끌어잡는자나 有夫女와 같이 마주 對하여 밥을 먹는 者를 보고서 本夫가 그 男女를 죽여도 그것은 獄事를 成立시킬수 없다 하였으니 지금 三每의 所行이 어찌 치마자락을 끌어 잡힌데 比하겠으며 또 어찌 마주 對하여 같이 밥먹은데에 比할 것인가 그女가 私賤의 身分으로서 淫奔하는 所行까지 兼하여 아침이면 李哥놈하고 저녁이면 張哥놈하고 눈이 맞아서 날뛰니 이세상 사람은 다 그女의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形跡이 和奸하는 것보다도 더 甚하고 그 證臟이 奸淫하는 現時에 發覺된 것보다도 더 한 것이다. 所謂 그 남편 命根이란 者는 特히 창자와 부와가 생기지 아니한 놈이니 憤함을 참기도 너무하였고 知覺이 없기도 너무나 비길데가 없어서 여러번 奸夫의 毒한 주먹에 얻어 맞고 피를 淋리하게 흘렸던적도 있었으나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處置하여야 되는 方策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及其 奸夫놈이 도리혀 賊反荷杖格의 兇計를 하려하고 그 三每년이 도리혀 창끝을 꺼구로 돌려 自己를 처치하려는 謀計하기에 이르러서는 命根이도 처음에는 千萬번 주저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나 생각다 못하여 自己의 찼던 칼을 뽑아서 三每에 向하여 칼날을 번쩍이면서 그 허벅다리를 찌르니 三每가 發惡하는 바람에 命根이나 蒼黃罔措하였으나 조금지나서 淫女가 목숨을 지우니 이로써 足히 天道를 속일수 없는 것을 알겠다. 假令 百步를 사양하여 三每가 참으로 寃痛히 죽었고 命根이가 故意로 犯行하였다 해도 一般으로 남편이 妻를 죽인 獄事는 大槪가 過誤에 가까운 것이 많고 犯情이 偶發的이 많고 거기다가 어린 所生이라도 있으면 많이들 살려 주는 法典으로 決案하는 것인데 하물며 命根이는 子息이 7名이고 딸이 하나인 8男妹의 아비가 아닌가 암닭이나 송아지 같은 것도 오히려 1分의 人心이 있는데 그女는 도리혀 豹狼과 호랑이 처럼 제 새끼 생각하는 마음도 없는 년이니 이것을 前例로 쳐도 죽여서 아까울 것 없고 後에 난 法으로 봐서도 죽여서 아까운 것이 없는 것이다. 卿等이 先朝의 受敎한 것을 어기여 가면서 앞질러 完結하게 한 것은 獄事審理를 잘못한 責任을 免하기가 어렵다. 卿等에게는 推考하도록 하고 命根은 特히 釋放하라 하시다. 奸行으로 因하여 殺人한 것 肅宗 17年에 京畿監司 睦昌明의 啓本에 依하면 殺人獄事의 罪人 崔厚先이 그 妻 宗禮와 여러 해를 같이 살아왔고 子女도 낳아 키워 왔는데 문둥병에 걸려서 다른 사람과 같이 居處할 수 없으므로 산 골짜기에 避하여 가있었는데 그사이에 全己奉이가 가만이 와서 그 妻와 奸通하였다. 그 妻가 또 己奉사이에 딸을 하나 出産하였고 또 前남편 厚先을 害치려까지 하므로 憤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己奉을 찔러서 인하여 죽기에 이르렀다. 三覆審理할 때에 判付한 內容에 이르기를, 厚先이 己奉을 찔러죽인 것은 실로 너무나 憤痛한 所致이다. 宗禮는 厚先이와 서로 떨어져 살아 온지 오래된 뒤에 다시 己奉이와 같이 살면서 女兒를 낳았으니 비록 現在 같이 사는 妻를 奸通한 奸夫 죽인 것과는 間隔이 있다고 하겠으나 厚先의 犯行은 可히 容恕할 點이 있는 것이니 特히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英祖 15年에 執義 金이 上疏하기를 "엎드려서 얻어 듣자오니 忠淸道 大興땅에 烈女 禹氏가 있는데 그女가 朴哥의 며느리로 出家하였으나 그 남편이 죽은 뒤에 그남편의 從孫되는 자가 짐승 같은 行動을 하려고 여러번 脅迫하였으나 그女가 終始로 굳여 拒絶하였더니 그놈이 이 女子를 때려 죽여서 그 屍體를 어디에 감추어 숨기고 자취를 없이 하였더니 아홉달이 지난뒤에 비로소 그 시체 있는 곳이 發覺되어 官에 告하여 檢驗을 實施하였는데 여름을 지난 屍體가 낯모양이 살아있는것 같아서 조금도 變하지 아니 하였으니 이것이 그女 貞烈의 感動한 所致가 아니겠는가 大興一郡이 두해나 가뭄이 들어 곡식이 다 골아졌는데 郡守 李道善이 마음으로 그女의 寃痛함을 알고서 祭文을 가지고 가서 祭祀하였더니 그날로 큰비가 내려서 湖南사람들이 節婦雨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天地神明의 感應한 理致가 昭昭히 볼수 있는 것이니 이와같은 窮天의 지극한 원한과 서리를 능멸히 하는 貞節을 결코 끝까지 그냥 없이 할 수는 없으나 元犯人이 逃亡가서 아직도 獄事가 成立되지 못하였으니 빨리 그놈을 잡아서 快하게 그죄를 바르게 하고 道臣에 命하여 事實을 狀啓로 올려서 旌表를 하여주는 것이 어찌 貞烈을 表奬하는 盛德이 아니겠나이까 하였다". 答하기를 곧 該曺에 命하여 稟議하여 處理하게 하였다. 20年에 公州땅의 童蒙 金世興이가 그 이웃에 사는 李氏姓을 가진 處女를 강간하려고 그집에 다른 사람이 없이 허수한 틈을 타서 그방에 들어가서 달려드니 李女가 굳게 拒否하여 奸行은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李女는 이로 因하여 목을 매어 죽었다. 金世興을 잡아다가 自服을 받아서 結案하였다고 監司 李德重의 狀啓가 올려왔는데 詳覆 할 때에 判付한 內容에 依하면 李女가 스스로 죽은 것은 그 犯人의 强逼에 緣由한 것인즉 이것이 犯人側으로 본다면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칼이 죽였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尋常 强逼한 律文으로 處理할 수는 없는 것이니 犯人은 嚴刑한 後 絶島에 定配하게 하고 李女는 조금 사이에 正理를 잡고서 貞節을 지켰으니 可히 嘉尙할 일이다. 特히 旌閭하여 주게 하라 하였다. 52年에 慶尙監司의 啓本에 依하면, 宜寧 官奴 業伊의 小妻 丁心이가 金談不里와 서로 對하여 있는 態度가 人情이 자못 尋常치 아니한 것 같으므로 疑憤함을 이기지 못하여 雇工 金七丁을 시켜서 談不里를 오라고 불러서 바로 배꼽있는 데를 찔러 그날로 죽기에 이르렀다. 正祖2年에 初·覆審理를 하였는데 判付하신 內容에 이르기를, 五敎를 펴서 施行함은 王者의 敎化이고 五刑을 쓰는 것은 王者의 刑政이다. 刑은 可히 늦출수도 있거니와 敎化는 一刻도 弛緩히 할 수는 없다. 지금 覆審의 罪人의 여러 罪案中에 宣寧懸 殺獄罪人 業伊의 推案中에 다시더 詳細히 審理하여 處理할만한 것이 있다. 獄事成立하는 格式이 스스로 바꾸지 못할 主體가 있는 것이니 크고 작은 여러 獄事를 勿論하고 아비의 事件에 子息으로 證據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또 남편의 事件에 그 妻로 證據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五敎를 펴서 施行하는데 成立된 憲章이다. 옛날부터 비록 반드시 죽여야 할 罪人이 있어도 或은 그 招詞나 證據가 未備하여 法網에서 漏落되어 刑을 잃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限定할 수 없다. 이 業伊事件을 다시 審査하여 完結하려는 案을 보니 業伊의 妻 莫禮가 屍親의 看證으로 되어 있고 正犯의 干連者로 되어 있다는 것이 이미 刑의 正道를 잃은 것 中에서도 큰 것이라 하겠다. 道臣이 또 莫禮의 招詞와 證言을 記錄하여 啓聞하였으나 이것은 可히 늦출 수 있는 형을 늦추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도리혀 늦출수 없는 敎를 弛緩케 하려는 것이니 五敎를 펴서 施行케 하는 大義로 볼때에 果然 어떠 한 것일가 다시 本道에 命하여 莫禮를 證人으로 세울 招辭 一切를 전부 拔去하게 하고 다시 具格式하여 啓聞하게 하라. 그리고 莫禮도 亦是 該道臣에 命하여 위선 3次의 嚴刑을 加하여 敎를 펴서 施行하기 爲하여 刑罰을 쓰는 뜻이 같은 길로 施行하여 어그러지지 아니하게 하라 하셨다. 이 事件은 今上 3年 11月 覆審理할 때에 이르러 業伊는 律文에 依하여 處理되었고 莫禮는 嚴刑을 3次나 더하고서 放送하게 하였다. 〔補〕 今上(正祖) 3年에 咸平 童蒙 金孟浩가 그 아비 鳳起가 寃獄에 걸리였다 하여 伸辨하기 爲하여 上言한 것에 對하여 本道에서 審査를 施行하였다. 처음 金鳳起와 같은 洞里사람으로 崔孟徵이란 者가 있었는데 孟徵의 妻가 毒藥을 먹고서 죽었으니 그 理由는 鳳起가 强奸하려 하다가 成就하지 못하였으나 그 女는 自身의 純潔을 爲하여 自裁한 것이라 하여 官에 告訴하여 獄事가 成立되었다. 乙未年 初·覆檢할 때에 孟徵의 招辭에 依하면 7월 19日에 自身은 밖에 나가서 없는 사이인데 그날 밤에 도적이 自己 妻의 房에 들어와서 奸行을 하려고 달려 드는 것을 그 妻가 잇빨로 그 놈의 어깨를 깨물고서 크게 소리쳐서 쫓아 보냈는데 도적놈의 짚신이 門앞에 떨어져 있음으로 주어서 자세히 보니 이것이 앞에 自身이 만들어서 鳳起에게 주었던 그 짚신이다. 그리고 鳳起의 어깨 위에 입으로 물린 痕跡이 있으니 鳳起가 어떻게 發明할 수가 있겠는가 卽時 官에 呈訴하여 懲治하여 주기를 願하였다. 그 뒤 8月 11日에는 鳳起의 甥侄 金成道가 또 自己 妻에 向하여 侵辱을 加하므로 自己 妻는 毒藥을 마시고 自處하였다고 하였고 金鳳起의 供招에는 自身의 어깨 위에 傷한 痕迹은 7月 18日에 이웃 사람과 장기 두다가 손톱으로 후볏기 때문이고 입으로 물린 것이 아니라 하고 그 짚신은 果然 孟徵이가 만들어서 自己에게 준 것인데 19日 밤에 논에 물대기 爲하여 自己 甥侄 金成道에게 빌려 주었더니 成道가 들에 나갔다가 잃고 돌아 온것이니 自身은 처음부터 奸行罪를 犯하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다. 監司 鄭元始의 狀啓에 依하면 崔孟徵이 貧窮하여 流離轉接하면서 남편은 신을 짜고 妻는 방아품을 팔아서 平素의 행세하던 身分이였으나 全然 兩班의 모양은 없었는데 金女가 强奸의 暴行은 免해 가면서 마침내 自裁까지 하였으니 實로 可尙한 것이나 그가 목숨을 끊은 것이 逢變한 後에서 20餘日이나 지났으니 비록 鳳起의 主張하는 말과 같이 犯罪를 免하려는 計策이 畢竟은 成就하였다 하드라도 어찌 그 죽는 時日이 늦추고 빨리 한 것을 論할 것인가 士族의 妻를 劫와 同字奪한 罪는 死刑에 까지 가게 되는 것이니 鳳起가 비록 崔哥의 庶派와 結婚하였다 하여도 이것은 쌍놈이니 等級이 自別한 것이 있으니 더욱이 議論을 낳게 하는데 부칠수는 없는 것이다. 刑曺의 回啓와 判付의 內容도 道臣의 結案을 允許하였던 것이다. 甲辰年에 刑曺에서 議啓하는데 正郞 金絅采는 이르기를, 짚신을 빌려서 신고간 金成道가 다만 그 女에 辱만 하였다 해서 刑推한 後에 放送되었다면 또 무엇이 두렵고 겁이 나서 卽地 逃走하였을까 아무래도 推案이 소漏하여 마침내 잘된 審理는 되지 못한 것이라 하였고 參判 李亨逵는 이르기를, 金女의 貞烈은 옛날사람의 斷臂하는 節介에 讓步할 것이 없다고 할 것이며 常賤이 兩班婦女에 强奸하려는 것은 奸行이 成事하였거나 未遂이거나를 莫論하고 死罪로 處置하는 것은 법의 眞意가 至極히 嚴하니 風敎를 세우고 幽寃을 慰安시키는 方道에 있어서 嚴刑하여 實情을 얻어야 한다 하였다. 判付의 內容을 보면, 이 獄事의 긍계은 어깨를 물리고 짚신을 떨어트리고 간 두가지 일에 더 들어날 것도 없고 또 疑端도 亦是 이 點에 있는 것이다. 大抵 厥女가 이르기를 입으로 깨물었다 하였는데 厥漢에게는 어깨에 물린 痕跡이 있으니 이것을 잡고서 證據로 하는 것이 진실로 不可할 것도 없을 것인데 19日 낮에 장기 두다가 싸움이 벌어져 손톱으로 傷하게 되어 약간 피흔적이 있었다 하는 것은 非但 成采龍의 供招한 것이 分明할 뿐만 아니라 잇빨 자국과 손톱 자국이 가장 가리기 쉬운 것인데 獄事 成立할 때에 일찍이 그 傷處의 痕跡도 집어 내지 아니 하고 이것이 明白히 손톱이 아니고 잇빨로 문것이라 해서 어찌 鳳起의 말을 屈服케 하며 鳳起의 마음을 心服케 할 것인가 짚신에 對해서는 果然 이것이 孟徵이 만든 것이고 鳳起가 신던 것이라면 주둥이가 석자가 된다해도 어찌 敢히 發明할 수 있겠는가 그 신을 成道에게 빌려 주었다고 하는 說은 窘遁한 發明에 屬한 것인데 一切로 內容을 査問하지 아니 하였으니 獄事禮統으로 따져 봐서 極히 曖昧하기 그지없다. 金女가 辱본 것에 憤을 참지 못하여 從容히 죽음으로 간 것은 그 時期의 早晩과 遲速이 무슨 關係가 있겠는가 畢竟은 自裁하기를 成道의 辱說한 後에 決定하였다 하나 그 女가 이미 그 남편과 어린 자식을 생각하여 죽기를 20餘日이나 미루어 나갔는데 만약 成道의 辱說이 없었다면 그냥 이럭 저럭 미루어서 한달이나 두달이나 지나가다가 나중에는 죽지 아니하고 있었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아니 또 한가지 더욱 疑心나는 것이 있으니 그날 짚신을 빌려 신고 간 것도 成道이고 그 뒤에 辱說을 恣行한 것도 成道인데 所謂 이와 같은 成道를 이 犯罪에 連坐로 關係시켜 가지고 單 한번 刑推하고 放送한 뒤에 그만 逃走하여 終始 돌아오지 아니하여 위에 말한 行査할 때에 盤問하지 못하고 있은즉 그날밤 일이 또한 鳳起가 한 것이 아니고 成道가 한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事件이 臆斷한 것에 가까우니 반드시 追究할 것도 없이 足히 鳳起의 自己 辨明할 한 方道가 되는 것이다. 證據物이 이미 明確的實하지도 못하고 獄案도 疎漏 한 點이 많은데 이대로 그냥두면 마침내는 한사람 生命을 償하기에 이를것이니 疑心나는 罪는 가볍게 하라는 刑政에 어그러 지는 것이다. 鳳起는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라. 사람의 死生이란 큰일이다. 金女가 雇傭사리 품을 팔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처음에도 몸을 깨끗이 하였고 끝에는 죽음까지 辨定하였으니 그의 一片 貞心이 兩班族의 本色을 잃지 아니 한 것은 足히 嘉尙할 것이 있다. 特히 復戶의 恩典을 給施하여 風敎를 樹立하고 불상히 간 魂을 慰安하여 주게 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에 安州 金春同이 李能白의 妻 金召史를 劫奸하여 그 後 33日만에 毒藥을 마시고 10日만에 죽었다. 實地死因은 飮毒으로 되어 있다. 道臣의 狀啓에 依한 刑曺의 回啓를 보면, 春同이 能白과 울타리를 사이에 가려두고 살았는데 그 남편을 먼곳에 나가게 하고는 그 妻에게 强制로 奸行을 하였다. 金女가 憤함을 먹음고 辱됨을 참아가면서 그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같이 官에 가서 呈訴한 뒤에 毒藥을 마시고 自裁하였다. 春同의 罪는 본래 死罪에 該當한다 하였다. 判付하기를, 다시 사핵하라 하였더니 癸卯年에 春同의 아들 慶秋가 擊錚하니 平安監司 李性源이 査實하여 狀啓하기를, 春同에게는 두가지 疑心點이 있으며 金召史에게는 한가지 可惜한 일이 있느니 能白의 爲人이 무슨 일을 하여낼 才幹도 없는데 새우알 젓 두 항아리를 사오라고 그 값을 미리 주고서 멀리 가게 한 것이 疑點의 한가지요, 金女가 藥을 마시고 自殺한 것이 저에게 무슨 相關이 있기에 子息을 보내서 救療한 것이 疑點이 두가지요, 金召史는 한번 强奸의 汚點을 입은 뒤에 이미 반드시 죽으려는 뜻을 決定하였다면 卽時 죽는 것도 可할 것이고 또 그 다음날 죽어도 可할 것이고 또는 그 남편이 돌아오던 날 죽어도 可할 것이며 또 官에 가서 告訴하던 날 죽어도 可할 것인데 6月 14日에 訴狀을 내고 7月 初4日에 毒藥을 마셨으니 너무 지나치게 從容하였고 너무 오랫동안 隱忍하였으므로 春同으로 하여금 藉藉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可惜한 것의 하나이다. 刑曺에 命하여 稟處케 한다 하였다. 刑曺의 回啓로 判付內容을 보면, "道臣의 狀啓中에 疑心點이라 하는 것과 可惜하다는 것이 참으로 條理가 있는 말이다. 疑心하는 것은 아마 그 奸行이 成就한 것을 疑心하는 것이고 아깝게 여기는 것은 그 일이 다 되지 아니한 것을 아끼는 것인데 疑心이 아끼는 것보다 많고 아끼는 것으로 疑點을 맞출수는 없는 것이니 이 罪案을 勘定할 때에 鑿鑿히 그 가운데 疑核이 있으니 朝家에서 이 獄事에 어찌 別意見이 있겠는가 卽時 道伯에 命하여 酌量하여 放送하고 上聞하게 하라" 하였다. 5年에 公山사람 林男伊이가 朴召史를 强奸하다가 죽였다. 道臣 洪秉찬의 啓本에 依하여 本曺判書 徐浩修의 回啓에는, 男伊의 罪犯은 朴女를 손으로 犯行하여 죽게한 것은 論할 것 없고 强劫으로 奸淫한 것이 犯罪에 該當되는 것이니 목아지에 손톱 痕跡과 볼기짝과 넙적다리에 가죽이 찢어진 것과 옷끈이 다 떨어진 것과 치마 폭이 다 찢어진 것이 다 모두 强劫한 明證이며 朴女의 옷과 褙子에 묻은 흙빛과 男伊의 팔굼치에 붙은 흙빛이 다 같이 黃色이니 또 이것이 奸行을 이룩한 實跡이니 제 아무리 주둥이가 석자가 되어도 무엇으로 發明하겠는가 道臣의 살려 주려는 論은 그 依據한 바를 알지 못하겠으니 다시 嚴히 刑을 더하여야 한다 하였다. 判付의 內容을 보면, 지금이 事件에서 强奸한 罪案으로 잡고 있는 것은 손톱흔적과 가죽이 傷한 것과 옷끈이 떨어진 것과 치마가 찢어진 것과 彼此의 衣服에 흙이 묻은 것등에 不過한데 强逼하여 달려드는 것과 抗爭할 즈음에 엎어지며 자빠지며 딩굴 때이라 形跡이 이와같이 되는 것은 形勢上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 奸行이 이룩되었다는 形跡이라고 斷定하겠는가 朴女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當初 告訴를 할 때에 어찌하여 이같은 긍계한 事項을 提示하지도 아니 하고서 다만 두들겨 맞었다고 만 하였을까 劫逼은 비록 疑心할 것없다 하겠으나 奸行이 成功하였다는 것은 오히려 明白한 證據가 缺欠된 것같으니 奸行은 하지 못한 것으로 勘案하여 處理하게 하라 하였다. 同年에 晉州人 鄭元己가 林女를 强奸하고자 하여 어린 아이를 차서 죽였다. 道臣의 稟啓에 依하여 刑曺判書 徐浩修의 回啓에는, "元己가 깊은 밤에 가만이 들어와서 덮치니 林女가 놀래서 拒否하던 차에 弟夫 仲文이가 쫓아와서 서로 毆打하고 있을 때 밤은 어둡고 房은 狹窄하여 襁褓에 쌓인 어린 아이가 어두운 곳에서 어느사이에 어떤 사람이 밟았는지도 잘 모르고 밟혀져 있었다. 設使 元己가 밟아죽였다 하여도 實은 故意로 미리 用意하여 밟은 것은 아니니 强奸律로서 論한들 제가 어찌 敢히 逃亡갈 것인가 그런데 급작스레 償命의 法典으로 斷定하는 것은 審理를 公正히 하는 方道가 아닐 것 같으며 道臣의 疑罪라고 하는 論도 진실로 意見이 있는 것 같으니 上裁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判付한 內容에 이르기를, 元己가 有夫女를 姦淫하려고 하여 보자기에 쌓여 있는 어린 아이까지 밟아서 죽인 것이 이미 獄案으로 되어 있고 또 査핵하여 奏啓된 것이니 그 光景을 미루어 보고 事理로서 생각해 보면 반 밤중에 달팽이 집같은 적은 房에서 3사람의 角戰이 벌어져서 彼此에 서로 두들겨 패고 左右로 서로 밀고 박고 하는데 어린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깨달을 여지가 없어서 필경은 밟아 죽였는데 어느 발길에 밟혔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곳 償命의 律에 斷罪하지는 못하겠으니 强奸未成律로서 參酌審理하여 定配로 決案하게 하라 하였다. 同年에 全義사람 吳日運과 徐行進 두사람이 한 마을에 같이 살았는데 하루는 日運이 徐의 집에 갔더니 行進이는 없고 그 동생인 處女가 혼자 앉아서 벼이삭을 훑으며 있다가 避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日運이가 밖에서 치마를 끌어 당기니 徐女가 부끄럽고 憤함을 참지 못하여 목매어 죽었다. 道臣 李崇祜의 啓本에 依하여 刑曺判書 金魯鎭의 回啓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日運이 담구멍을 뚫고서 엿보고 있다가 치마꼬리를 잡고서 戱弄한 것은 强奸未成의 律을 免할 수 없는 것이고 徐女의 從容히 義로운 節介를 가진 것은 그 行實이 嘉尙하다. 日運이를 죽이지 아니하면 徐女의 魂을 慰安할 수 없는 것이니 道臣의 引用한 續典中에 士族의 妻女를 劫奪한 者는 死罪에 處斷한다는 것도 또한 依據할 바가 있는 것이니 依前 同推할 것을 奏請하였다. 判付의 內容에 이르기를, 徐女의 自縊死는 日運의 치마자락 당기는데 綠由하였으니 그 犯情은 비록 絶悖하나 律文으로는 여기에 適用할 것이 없다. 이것을 强奸罪에 準하려 하니 이미 相奸하지 아니한 證據가 있고 이것을 劫奪罪에 擬施하려 하여도 또 劫奪當한 形跡도 없는 것이니 續典의 律文은 果然 이 事件에 친貼하지 못한 것이니 다시 稟處하라 하였다. 判書 金魯鎭이 啓하기를, 臣等이 처음부터 이 罪人을 가벼운 罪에 敢히 붙이지 못한 것은 그 犯情이 絶悖할 뿐만 아니라 또한 民間의 惡習을 懲戒하기 어려움을 念慮한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직 넓게 물어서 裁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領議政 徐命善은 말하기를, 徐女의 情節이 卓異함은 실로 日運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不幸한 厄會이다. 이것으로 日運의 生命을 代償으로 함은 그의 本情이 아니니 輕罪에 붙이지 못한다는 말은 잘 알수 없다 하였고 徐善復이 知中樞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日運의 한 罪는 치마 당긴 것에 不過한데 償命까지 한다면 奸未遂罪의 定한 律文에 어긋나는 것이니 死刑의 다음가는 律로서 嚴治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江華留守 김익이는 말하기를, 漢나라 法에 亂民은 斬刑하라 하였으니 그 罪가 죽여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日運이 어찌 償命의 律을 免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禮曺判書 徐浩修가 말하기를, 徐女가 不幸히 自處하였으므로 日運으로 償命하는 것은 어찌 至極히 寃痛하지 않을가 하였다. 王이 이르기를, 徐女에 對하여 旌褒의 典을 하여야 될가. 卿等은 각기 意見을 陳奏하라 하니 徐命善·徐善復·金익等, 다 이것은 빨리 旌褒의 典을 施與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對答하였다. 司直 李性源이 이르기를, 旌褒는 이것이 너무 過重한 法이니 그 다음가는 恩典으로 復戶를 給與하는 例가 있다 하였고, 判尹 李命植은 이르기를, 斷獄을 愼重히 審理하는 方途로서 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啓聞케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王이 말씀 하시기를, 여러 議論이 別로 다른 것이 없으니 日運에게는 道臣으로 하여금 用刑을 기다려 加刑하여 定配律에 決定하게 하고, 徐女는 마땅히 旌褒하여야 하나 判尹의 奏達한 말이 正히 나의 意思에 合致된다. 그 事體를 重하게하는 道理에 그다지 輕易하게 擧行할 수 없으니 곳 道臣에게 命하여 實狀을 採錄하여 狀啓로 올리라 하여 道臣의 다시 調査한 回啓에 依하여 特히 旌閭하라고 命하다. 〔重補〕 6年에 能用사람 李昌範이가 金己丹을 劫奸하여 그 다음날 죽기에 이르렀다. 죽은 實因은 自縊死이다. 道臣의 啓奏에, 通奸하지 아니한 律을 施行한다 하니 刑曺의 回啓에 이르기를, 昌範은 兩班이고 己丹은 常女이다. 兩班名色으로 常女를 奸通하기는 이것이 容易한 일인데 하물며 그때는 盛暑이므로 村女의 몸을 가리고 있는 옷은 치마한겹에 不過하다. 그때 다른 사람은 없고 텅 빈 방안에서 健壯한 사나이가 弱한 女兒의 몸을 움켜잡고서 꺼꾸러트러 눌리고서 强奸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己丹이 비록 죽기로서 막고 막았으나 强하고 弱함이 懸殊히 다르고 그 女를 救해 줄 사람은 없으니 비록 그 마음이 氷玉 같고 그 속이 鐵石같다 할지라도 實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連丹의 供招로 보면 昌範이가 己丹의 배에 걸터타고서 두사람의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보았는데 昌範이가 손을 저으면서 보지말고 나가라고 하더라는 말과 己丹이 꼼짝 못하게 눌려서 울부짖으며 있더란 말을 綜合하여 본다면 그 證言이 可히 그 當時 强奸하던 形容을 그림으로 그린 것 같으니 어찌 强奸이 成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昌範이가 스스로 强奸罪를 犯하면 死刑에 處함을 알고서 敢히 圖脫할 計策을 부리고 己丹은 常漢의 女子로서 能히 몸을 깨끗이 하려는 義理를 알아서 곧은 마음으로 盟誓하여 한번 죽기를 스스로 다 하고 말았으니 窮한 바닷가의 鄕村에서 이같은 卓異한 烈行이 있을 것은 料量도 못하였으니 그 三尺을 嚴하게 하고 烈女의 魂을 慰勞하는 方道에 있어서 犯人을 살려주기로 한다는 것은 容議하기 어려운 것이니 李昌範은 用刑을 기다려 嚴重히 訊問하여 自服을 받게 하라 하였다. 判付한 內容에 依하면, 士族이라고 이름하면서 武斷의 威力을 恣行하여 시집도 가지 아니한 良女를 제 마음대로 劫奪하여 이 事件이 轉輾하여 殺獄을 생겨 나게 하는 地境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비록 그날 擧措로 말한다 하여도 白晝에 널리 바라보이는 處所에서 이와 같은 빨간 낯으로 奸騙의 擧措가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 제가 發惡하며 높은 소리를 질러서 날뛰는 것은 더욱 橫暴한 것이니 所謂 兩班이라고 하는 者가 일찍이 상놈만도 못하니 마땅히 嚴重히 訊問하여 自服을 시켜 重罪에 處斷하여 己丹의 魂에 謝할 것이나 이 犯人을 死刑이냐 살려 주느냐의 法適用의 關頭는 奸淫行爲가 되었는가 안되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을 硏究하지 아니하고 곧 臆斷으로 하려는 것은 審克하는 길이 아니다. 道臣의 狀啓에는 昌範이가 强奸 "하려고" 라는 "欲爲"2字를 써서 奸淫은 하지 아니 하고 하려다가 못한 것으로 돌렸고 刑曺의 回啓에는 女子의 배위에 걸터 타고 앉았다고 證言한 句節을 가지고 奸行이 이미 된 것으로 解釋하여 두가지 意見이 各其 스스로 成說하였으나 朝家의 意思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의 死生이란 또한 큰 일이다. 왜냐하면 己丹이가 鄕曲間에 있는 18歲의 女兒로서 能히 强制로 劫奪 當하는 것이 辱되는 것을 알고 죽기로 작정하기를 樂地에 돌아가듯 하니 昌範이 비록 獰暴하고 悍惡한 者이나 果然 죽기로써 抗拒하는 己丹의 뜻을 빼앗아서 奸行을 完全히 하였을가 疑問이다. 道臣의 狀啓中에 말하기를, 己丹이는 그 일이 지나간 뒤에도 삼(麻系)을 삼고 밥도 하는등 일을 하여 처음에는 반드시 죽으려는 마음이 없었다가 나중에 洞里사람이 많이 와서 구경하고 또 昌範의 妻가 와서 그녀에게 發惡한 뒤에는 부끄러움을 먹음고 죽었다고 한 것은 이것이 어디에 依據하여 이렇게 論하였을가 그女의 죽던 날 목맨 노끈을 풀어 준 것은 崔哥 女子와 金哥 女子가 丁寧히 立證되니 己丹의 죽으려는 決心은 이미 劫奪을 當할 때부터 決心한 것을 미루어서 알수 있으니 麻系를 삼고 밥을 짓고 한 것은 어찌 이것은 그 家族들이 自己가 죽으려 하는 注意를 주지 않으려고 이렇게 泰然히 지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한번 죽으려는 決心이 일찍부터 이미 스스로 辨定되였으니 비록 賁育의 勇猛이라도 能히 屈伏케 못할 것이니 이것으로도 그 奸行이 成就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明白히 未成就라는 것을 알면서 犯人을 死罪에 決斷하기에 急히 하여 奸行을 成就한 것이라고 몰아넣는 것은 널리 資料를 綜合하여 核實을 핵出하는 刑政에 欠缺이 되는 것이고 또 足히 己丹의 깨끗한 貞操를 더럽히는 것이다. 전번에 湖西의 徐女事件에서도 亦是 그女의 貞節을 揚하고 또 元犯의 罪律은 減한 것이니 지금도 이미 쓴 前例를 쓰는 것이 可히 準備된 일이라 하겠다. 己丹은 위선 復戶하여 그 節義를 表賞하여 주고 昌範은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기로 하는데 지금 만약 嚴重히 訊問하여 먼 地方에 쫓아보내지 아니하면 무릇 良家의 女子는 몸을 죽여서 까지 潔身하지 아니하면 保命할 수 없는 事例가 種種있을 것이니 昌範은 北道極邊으로 定送하되 發配하기 前에 三次에 準하여 嚴刑하라 하였다. 〔重補〕 8年에 堤川 李器大가 處女를 劫逼하여 毒藥을 마시고 卽死하게 하였다. 道臣이 啓奏하기를, 길에서 붙들고서 戱弄하였다 하니 果然 强制로 劫奪하여 成奸한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을 通해서 請婚도 하였으니 亦是 當面하여 威逼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器大가 自身이 士子의 몸으로서 謹飭하는 道理를 알지 못하고 이같은 挑達한 行習을 하여 길에서 붙잡고 戱弄한 것이 淫悖한 擧措임을 免할 수 없고 저도 또한 獄에 잡혀서 校械를 지고 또 鄕會에서 笞罰을 받았으니 반드시 저자에서 매맛는 것같은 羞愧心이 있었을 것이니 마땅히 혀를 깨물고서 뉘우칠 것을 알아야 될터인데 또 色慾을 堪耐하지 못하여 다시 劫婚할 計策을 꾸며서 마침내 處女로 하여금 목숨을 버리게 까지 하였으니 그 所行을 따져보면 死刑으로 罪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다만 그女의 간수(로)를 마시고 죽은 것이 한해나 지난뒤에 하였다 하니 奸行을 당하고서 즉시 죽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 하였다. 判付하기를, 女子의 貞節과 信義는 地處가 들어났거나 微賤한데거 나와는 關係할 것 없다. 참으로 强暴한 者의 羞辱을 받게 되면 어찌 빨리 訟訴할 마음이 없을 理가 있겠는가 그러나 男子의 耽色한다고 强暴의 律文을 그대로 適用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大抵 盧女의 죽음이 貞烈은 있다고 하겠으나 어찌 옷깃을 붙잡고 戱弄하던 그날에 죽지 못하고 請婚한다고 四柱單子 보낼적에 죽기를 決心 한것도 그 죽음이 그 자리를 올바르게 얻었다 할 것인가 알수 없는 것이다. 일이란 結果가 善美하게 이룩되는 것이 貴重한 것이니 朝家에서 비록 證言을 다 찾으려는 것은 아니나 이것만으로 바로 故殺罪나 逼殺罪로 몰아서 處斷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아니 한 것일가 한다. 또 器大의 罪됨이 專혀 四柱單子를 勒送한 것에 있는 것 같으나 婚姻에 媒 이 드는 것은 부모도 禁하지 아니 하는 것인데 처음에 담을 뛰어 넘어가서 女子를 보려하듯 한 無禮한 失策만 깊이 追究하고서 이와 같이 束茅하는 禮로써 請婚하기에 이른 것은 器大에 있어서는 足히 禮를 아는 일이라 할 것이고 그것이 罪라고는 볼 수 없으니 이러나 저러나 間에 이것으로 獄事를 成立시켜서 償命까지 한다는 것은 可히 論할 수 없는 일이니 加刑하여 一次 推鞫하고서 放送하라. 處女가 毒藥을 마시기로 決意한 것은 지나간 恥辱이 快하게 雪洗하지 못한데 綠山한 것이니 當初의 器大에 決杖만 한 것은 너무 寬大히 處理한 失手를 免치 못한다. 人命을 重히 하는 意義에 있어서 警懲하지 아니 할 수 없으니 그대의 道臣은 重法에 따라 推考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 9年에 价川 尹金이 칼로 李光白을 찔러서 그날로 죽었는데 死因은 刺傷을 입은 것이라 한다. 道臣의 狀啓에 依하면, 光白이 白晝에 奸淫을 行하다가 房中에서 現場捕捉을 當하였으니 尹金이 그때에 찔러 죽인 것은 이것이 異常한 일이 아니다. 마땅히 法에 依하여 處斷하도록 決案할 것이니 삼가 戊寅年 受敎를 按考하여 犯行 記錄原文을 槪錄하여 狀聞한다 하였고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칼을 꽂은것이 이미 奸行한 場所가 아니라 한즉 그 現時에 죽인 경우의 律文은 여기에 끌어다 適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日後에 사람을 輕率히 殺害하는 弊도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判付한 內容에 이르기를, 남편이 되어 그 妻가 白晝에 다른 男子와 行淫하는 것을 恬然히 보고서 주먹이나 칼을 쓰는 擧措가 없다면 이것은 常人의 感情으로 論할 수는 없다. 檢狀中에 卽時 이것을 잡아서 官에 告訴하지 아니 하고 自己가 直接 죽였다는 理由로서 드디어 償命의 律을 適用하려 하나 이것은 獄事를 公明히 하는 體統이 喪失된 것이다. 또 犯人에게 兇獰이란 그 글자로서 斷罪하는 鐵案을 만들고자 함은 어찌하여 用語를 이다지도 稱停하게 쓰지 못함이 있는가 奸淫한 房中이나 그집 안 庭畔이나 다 奸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殺害하는 것은 當然한 것이고 죽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人心이 없는 자이니 이 罪囚의 獄事成立이란 것은 論議할 수 없는 바이다. 하물며 戊寅·癸巳年의 受敎에 明示한 것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尹金은 卽時 放送케 하라 하다. 〔重補〕 同年에 忠州 朴升文이 黃女를 强奸하니 그女는 卽日로 목을 매어 自殺하였는데 實因은 自縊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道臣의 狀啓이다. 判付한 內容에 依하면, 이 獄事는 年前에 審理한 全義 徐女의 獄事와 大略 서로 彷彿하다. 그때에도 罪人의 犯情은 비록 絶悖하나 律文에는 施行할 條文이 없다. 그러므로 元犯은 加刑하여 定配시키고 徐女의 節行은 本道로 하여금 詳細히 探査하여 狀啓로 올리라고 하였더니 이 獄事도 그 事件과 다르게 決獄할 수는 없을만치 같은 類型이다. 大抵 鄕里에 가면 兩班·상놈의 區別이 없이 나물광주리를 가지고 들에 나갔다가 貞女가 强暴의 辱을 만나게 되면 나물광주리는 한길 가에 팽개쳐 있고 汚辱을 받게 되는데 奸行을 하고 안한 것은 論할 것 없이 奸淫당하였다는 말은 몸이 마치도록 씻기 어렵고 中 구의 말할 수 없는 辱으로 죽음을 마음속에 맹서하여 스스로 決斷하였으니 事件 內容은 暗昧하여 明白하지 못하나 그 情狀은 殘忍하며 凄絶한 悲劇이다. 그 辱을 보고 집에 돌아온 뒤에는 큰 兄과 다음 兄들은 官에 가서 告소라도 한다고 눈물을 닦으면서 나가기도 하고 或 恝視 하면서 다른데로 가기도 하여 텅텅 빈 방안에 寂寂히 혼자 있으니 부끄럼과 憤하기가 마음속에 交錯하여 비록 살아보려고 해도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黃女에게 旌褒의 恩典까지는 輕率히 論議할 수 없으나 要컨데 그女가 潔身自守한 것은 지나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니 檢官이 이르기를, 그 女가 自取하여 和奸한 것이라 하였다 하니 그 사람은 어찌 남의 아름다운 일을 이룩하여 주는 것을 즐겨하지 못하는가 朴升文이가 나물 광주리를 黃女의 가슴위에 숨겨놓고 달려 들었다는 것이 참으로 미친놈의 미친 짓이며 하물며 5사람의 女子 同伴者가 다 直腸에서 나오는 참다운 證言을 하였으니 普通 冷冷한 看證과 比할 수 없는 것이다. 黃女의 죽음은 그놈 때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交奸行爲를 하고 안하였다는 區別은 死後에는 擬議할 것도 없다. 그러나 强逼하여 죽였다는 罪律은 適用하는 것이 꼭 친착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外의 法律條文으로는 施行할 것이 없으니 먼저 全義 事件의 吳日運과 다름이 없으니 升文은 嚴刑하여 死罪에 減刑하여 絶島에 定配하고, 黃女의 貞標도 어찌 泯沒하게 버려 두겠는가. 風敎를 聳勸하는 政事로서 表奬의 典을 施行함이 마땅하니, 道伯에게 分付하여 그 實績을 詳細히 探問하여 狀聞하게 하고 곧 禮曺에 命하여 徐女에게는 前例대로 復戶를 給與하는 恩典을 주라 하였다. 〔重補〕 10年에 驪州 사는 金女 判連이가 姜就文의 誣告로 潛奸하였다는 말을 듣고 간수(로)를 마시고 죽었다. 判連의 父 金完伊의 招辭 內容에 이르기를, 自己딸 判連의 나이 18歲였는데 그 洞里에 사는 姜弼周가 그 아들 就文을 爲하여 請婚하였으나 許諾하지 아니하고 忠州 사람에게 定婚하였더니 綵緞禮物을 받던 날 就文이가 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전에 담을 넘어 들어가서 가만이 奸通한 일이 있으니 이 女子는 다른 곳에 시집 갈 수는 없다."하고 또 官에 가서 呈訴하여 辨正하기를 請하였으므로 그 女는 간수를 마시고 죽었다 하였다. 丁未年에는 就文의 아비 弼周가 擊錚하여 바로 事實을 審査케 하니 監司 徐有防이 사핵하여 狀啓하기를, 金女가 姿色이 있고 姜就文은 外 가 獰悍하고 절룸발이 病까지 있으니 서로 婚事가 될 수 없는 것인데 忽地에 納綵하던 날 처음으로 담을 넘어가서 潛奸하였다는 말을 퍼뜨려서 끝에는 鄕官에 呈訴하여 그 女를 捉來하라는 題辭를 圖得하고 洞任과 締結하여 그 女에게 督迫하는 擧措를 만들어 내게 되었으니 그때 光景은 그 마을 사람들도 다 놀랐거든 하물며 이 金女로 말하면 본래 아무 瑕疵도 없는 姿質로서 猝地에 이같은 씻지 못할 辱을 當하여 官庭에 까지 나가서 萬端昌皮를 當하기 보다는 차라리 집안에서 自己 節介를 完全히 마치는 것이 낫다하여 畢竟 半사발 간수를 마시고서 一朝에 꽃다운 목숨을 끊고 말았으니 臣의 檢題하기를, "判連이 18年來의 貞信한 자취로서 忽地에 千萬번 夢寐에도 생각못한 强暴의 辱을 만나 白玉에 오점을 깊이 寃痛히 여기고 붉은 마음을 지키기로 決心하여 끝내 千金같은 목숨을 鴻毛같이 버리고 熊魚의 大義로서 一死를 辨가름 하였으니 참으로 옛날 烈婦에 比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한 것이 實地에 맞는 題辭입니다. 就文은 여러번 訊問과 推鞫을 받았으나 한말로 誣言을 얽어 놓으니 萬번 죽여도 可할 것이고 한가지도 容恕할 것은 없다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도 그러하였는데 判付하기를, 金女 判連은 그가 鄕曲의 賤人으로서 能히 貞白의 義를 알고서 죽음을 樂土에 돌아가듯 하여 지킨 節操를 잃지 아니 하였으니 卿曺의 覆啓中에 美行을 褒賞하자는 請은 風敎를 砥礪하는 政事에 깊이 도움이 되는 것이니 道臣으로 하여금 地方官에 分付하여 그 집 거리에 旌事를 表하도록 行會하게 하라 하였다. 그 後 庚戌年 別諭의 內容에 依하면, 姜就文의 獄事는 그 犯情을 보나 그 謀計를 想像한다면 참으로 지극히 兇慘한 것이고 하물며 判連의 誣寃한 後에는 더욱이 그놈을 償命하도록 劃定하여 全歸한 判連의 芳魂을 慰謝할 것이다. 그러므로 道臣의 狀啓는 刑曺의 議獄한 前後 여러번 사핵에 그놈의 生路는 주지아니 하게 되며 반드시 그놈에 訊問하여 自服을 要하는 것은 大盖 尋常한 事例의 威脅 逼迫으로 强奸한 罪로 論할 수는 없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就文이가 스스로 構誣涅造한 것을 알고서 일찍이 輸款을 하였다면 朝家에서도 이 事件에 對하여 或 서로 잘 勘罪하여 맞치었을 것인데 그놈이 한결 같이 굳게 뻐기고서 專혀 그녀에게 오멸주기를 固執하여 守紀한 貞節로 하여금 점백한 寃痛을 暴白하지 못하게 하기에 이르게 하니 그놈의 所爲를 따져보면 더욱이 萬萬 獰頑하다. 그러나 大約 因奸威逼의 律文이 반드시 死刑에 까지 이르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은 진실로 그 犯情과 謀計가 兇慘하다 하여 곧 極律을 施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卿은 該牧使에 分付하여 判連의 旌閭의 밑에 끌고 가서 이 判下한 辭意대로 嚴重히 曉諭하고서 그 놈을 本牧의 奴案에 充當하여 使役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 11年 鐵山 徐乭男이 金承秋를 毆打하여 그날 밤에 죽었다. 實因은 被打로 되어있다. 御史 李崑秀의 別單內에 依하면, 이것이 이미 奸所에서 捕捉하여 먼저 淫婦의 頭髮을 자르고 곧 奸夫의 머리를 두들겨 그날 밤에 致命하였다 하니 獄事를 成立시켜 償命케 한다는 것은 論할 수 없다 하였다. 刑曺에서의 回啓도 亦是 그러하다. 判付內에 依하면, 비록 이것이 奸所에서 親獲한 것이 아닐지라도 "치마를 잡아 끌었거나 男女가 對坐하여 밥을 먹은 자취만 있어도 寬大한 法典에 따라 할 것을 許容하겠는가"하는 受敎를 보아도 可히 우러러 알 수 있거든 하물며 이 獄事는 이 男子가 저 女와 潛奸하였다는 것이 이미 그 妻의 自服한 供辭에 나타났으니 어찌 반드시 이것을 乭男이가 식힌 것이라고 疑心할 것이겠는가 여기에 가장 事件이 眩晦하여 明白하지 못한 것이 別로히 있으니 그것은 그 때린 時刻이 서로 틀리는 것이고 또 器仗을 兼用한 것이고 詞證이 俱備하지 아니 하는 것들이다. 이쪽에서는 저녁에 때렸다 하고 저쪽에서는 2更에 때렸다 하니 모름지기 때린 時刻의 早晩을 分辨하여야 그 奸所의 與否도 決定할 것이다. 本夫인 그가 그집에 가서 無心코 문을 여니 눈으로 그 光景을 보고 낫을 들고서 바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또 所謂 참나무 막대기라는 것은 어디서 또 나와서 얻어온 것인가. 낫(鎌)은 奸夫에게 빼았기고나서 門밖에 또 나와서 막대기를 가지고 가려 하던 그 틈에 奸夫는 몸을 뽑아 나갈길도 있었을것이나 혹 움직이지도 못하여 가만이 毒한 毆打를 받았는 것인가 이 獄事 關連人 林白從의 招辭에도 亦是 처음 어두울 때에 被打되었다 하였으니 2更에 作奸하였다는 說은 이것이 어찌 乭男의 夫妻가 연 腸하여 귀에 불어 넣는 計策이 아니 겠는가 獄體를 愼重히 하는 道理에 있어서 한번 더 사핵하는 것도 不可하다 할 수 없으니 回啓에 依하여 施行하라 하였더니 再査 啓奏하니 判付하기를, 乭男은 放送하라 하였다. 〔重補〕13年 龍崗사는 印忠國이 擊錚한 原情內容에, 저의 子息 方信의 妻 朴女가 저의 10寸아우 全墨이와 牟包위에서 行淫하는 것을 저의 妻와 자식이 目擊하였는데 全墨은 逃走하였다가 9個月을 지난 뒤에 돌아왔기로 方信이가 소나무 막대기로 그놈의 정강이를 두들겼더니 全墨은 그후에 食飮을 끊고서 굶어 죽었는데 面任이 官에 報하여 獄事가 成立되었다고 刑曹에서 啓奏하였다. 判付하기를, 奸夫가 挽裳한 것과는 奸女와 對飯한 것이 奸所를 執捉한 것과는 크게 差異가 있어도 오히려 道伯에 命하여 卽時 宥赦할 것을 論奏하게 할 先朝의 受敎가 日星과 같이 昭明하니 어찌 尋常히 金石의 法典에 比할 것인가 한쪽 말만 듣고는 取言하기도 어려우나 今年 봄 監營題辭만 보더라도 朴女의 行淫하는 것은 지금에서 한 것이 아니라 여러번 했던 것이니 方信이 奸淫하는 場所에서 눈으로 보고도 敢히 卽地에서 그 男女를 打殺하지 못한 것은 아직 나이 어리고 힘이 弱하여 마치 게(蟹)를 붙잡아 가지고 물에 띠워 보내는 것과 같음을 免치 못하였나 奸夫의 挽裳과 對飯하는 것에 比較하면 그 比重이 10倍 100倍로만 말할 수도 없다. 뒤에서 奸夫의 정강이를 쳤다는 것이 器仗의 大小와 下手의 輕重을 勿論하고 奸夫의 죽음으로 어찌 獄事가 成立되겠는가 方信의 父子가 朴女도 같이 죽이지 못한 것은 그 節節히 孱弱한 것은 우선 그냥 두고라도 朴女의 媤어미가 不慈하다고 誣告하고 남편이 無罪한 奸夫를 잘못 죽였다고 하는등 이것만으로도 綱常에 關係됨이 얼마나 큰 것이냐 本罪인 奸淫以外에도 이것만 가지고 죽여서 아깝지 않은 것이다. 守令이 이것을 例事로 보고있고 道臣이 이것을 雜犯으로 보고 있으니 이러하다면 先朝의 受敎는 遵用치 않으려고 함인가 며느리가 시어미를 誣告하여도 反坐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妻로서 남편을 誣告하여도 그냥 둘 것인가 奸所의 現場을 捕捉하여도 奸夫와 淫女를 그 該當한 刑에서 요倖으로 환赦하려하는 것인가 以上 여러 가지에 하나라도 該當함이 있다면 地方官의 失責이 가볍지 않은 것이니 印方信은 卽時 放送할 것이며 朴女는 嚴刑하여 格式을 가추어서 狀聞한 뒤에 稟處하라. 安道의 風俗이 本來 淳朴하다고 일컬어 왔는데 挽近에 와서 罪科에 干連되는 것이 모두 두륜패상의 事件만 나오게 되니 가령 이런 것을 나오는대로 호되게 懲罰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 惡한 風俗을 고치기가 쉽지 못할 터인데 이와 같은 獄案을 이렇게 誤決하였으니 더욱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뜻을 問目에 添加하여 行會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同年에 定州 李命興이 朴東金을 毆打하여 그 다음날 죽었다. 實因은 피척이라고 실려있다. 그 妻 李召史가 擊錚原情하기를, 제 남편 李命興이 子息낳기를 바라서 私婢 一色을 妾으로 삼았는데 그년이 朴東金과 潛奸하는 꼴을 보고도 天性이 본래 柔弱하여 憤함을 참고서 較計하지 않았더니 東金은 平素에 蛔痛을 앓아서 그 病으로 죽었는 것을 그 아비 萬得이가 卽時 감장까지 하였다가 忽地 告訴狀을 내고 이미 埋葬한 屍體를 파내서 檢屍하고 저의 남편을 잡아다가 査핵하고 있다 하였다. 道臣이 調査啓奏하기에는 一色은 前에 東金의 妾으로 있다가 뒤에 또 命興의 妾이 되었으니 두사람은 그 女의 前夫이며 後夫인 것이다. 이 獄事의 긍계은 전혀 命興이가 그 女를 現在에 疎棄하고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는데 命興이가 疎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大楚의 證言으로 明白하나 一色이 妾으로 다시 간 事實은 또 隣里에서 다 알고 있는 것이니 한 洞里에 살면서 尋常히 보고 있다가 하루밤 사이에 忽地로 猜기心을 내어 구척을 恣行하여 죽기에 이르게 하였으니 妾으로 率畜하였다고 稱하고 奸所執捉의 法例를 引用하여 僥倖으로 殺人罪를 免하려 하니 그 情狀을 살펴보면 極히 狡惡한 것이니 前例에 依하여 같이 推鞫한다는 것이며 刑曹에서도 같은 내용의 回啓이나 判付하기를, 朴東金이 一色을 潛奸하였음은 隣里에서 다 아는 바인즉, 命興이가 憤怒를 품고 있은지도 이미 오랠 것이다. 캄캄한 밤 좁은 房에서 奸淫하는 形狀을 目擊하고 성난 氣勢를 타서 척打하느라고 要害處도 分別하지 못하여 이로 因하여 致命케 한 것은 疑心할 것 없음을 잘 알겠다. 一色이 비록 賤婢라고 하나 4年동안 남편으로 삼았으니 妾으로 들어간 것이고 命興이 비록 그 女를 疎棄하였다 하나 數朔마다 한번씩 왔다 하니 永永 絶緣한 것은 아니므로 東金이와 相奸한 것은 便是 間夫의 資格인 것이니 律文의 奸所被捉이라 하여도 亦是 可하다. 이러한 獄事는 마땅히 가벼운 刑罰에 施行할 것이니 李命興은 死刑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고 一色은 前後의 供辭에 보면 顯著히 命興을 謀陷하려는 底意가 들어 있는데 命興이나 東金이나 다 저의 남편이니 情이 비록 間夫인 새맛에 옮겨졌다 하여도 義理로서 本夫인 옛 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賤人의 淫行이라 하여 懲治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一色을 一次 嚴刑하여 命興의 定配한 고을에 같이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同年에 楊根 鄭千己가 崔昌起를 毆打하여 第2日에 죽었다. 實因은 被打로 되어 있다. 千己의 아들 一騰이가 擊錚原情하였는데 그 內容은 昌起가 제 아비를 醉정에 辱하므로 아비가 隣里에 가서 避하였더니 다음날 아침에 昌起가 그집앞 밤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것을 그 아우가 誣告하기를, 제아비가 首犯으로 구타하여 죽였다 하니 자세히 覆査하여 주기를 빌었다. 本道에서 査啓하기를, 가만이 屍體를 밤나무에 달아 매고서 假粧으로 自縊한 形狀을 만들었으니 그 情跡이 陰狡하다. 反覆하여 參考硏究하여도 萬가지에 한가지의 살려줄 理由가 없으나 韓女로 말하면 奸夫와 和應하여 그 卽時 告發하지 못하였으니 犯罪의 次律에 施行함이 可하다 하였고 刑曹의 回啓도 그러하다. 判付하기를, 처음 和奸하였음에 因하여 殺越의 變을 恣行하였고 手犯한 形跡을 掩蔽하기 爲하여 自縊한 形狀으로 假粧하였으니 그 犯行의 形勢가 서로 因緣되고 그 犯行의 謀計가 至極히 慘毒하여 犯情으로나 法律로나 하나도 原貸할 수 없는데 자세히 前後의 文案을 檢閱하니 打殺한 者는 비록 千己이나 陰謀를 꾸며낸 者는 반드시 韓女이다. 大蓋 韓女가 外人과 相奸한 形狀은 이미 昌起에게 發覺되었으니 반드시 毆打하고 叱責하여 逼迫당함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밥상을 둘러치고 낫으로 찔렀다는 說를 보아도 可히 알 수 있는데 저 韓女로 말하면 그 本夫에게 情은 이미 다 떠나갔고 원망은 날마다 쌓여 남의 손을 빌어서 自己의 害物을 除去하려고 謀計한 적이 이미 오래 되었으나 昌起는 눈앞에 毒手를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술醉한 뒤에 미친 고함을 질러 單身隻拳으로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갔다가 깊은 밤에 넘어져 죽었으나 어느 누가 붙잡아 救하지도 않았으니 그 原因이 모두 韓女에서 나온것이다 첫번 招辭에 보면 닭이 울 무렵에 처음 깨달아서 나가보고 놀랐다 하는 것은 참으로 낫(鎌)으로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이 두사람의 싸움을 이르킨 根因이 그女에 있을 뿐만 아니라 間夫와 同謀한 情跡도 明白히 있다. 지금 이렇게 疑心하는 것이 果然 臆測으로 말함이 아니니 決코 이 韓女가 娼女退物이라 하여 다만 犯罪의 次律을 쓸 수 없는 것이니 韓女와 千己는 다시 嚴刑을 加하여 奸狀의 有無를 일일이 다 궁핵하라 하였다. 本道에서 다시 査핵한데 因하여 判書 沈願之의 啓한 바에 依하면 韓女가 千己와 潛奸한 것은 全혀 千己의 財産에 침을 흘려 여러가지 實狀을 얽어서 꾸며낸 것이니 비록 目擊하지 못하여도 장해할 마음을 가진 것은 거의 默究할 수 있으므로 嚴重히 訊問하여 自服을 받았다 하였다. 上이 이르기를, 뒤에 같이 推鞫하여 詳細한 査핵을 狀啓로 올리라 하였다. 庚戍5月에 本道의 다시 사핵한 것과 刑曹의 回啓에 이르기를, 淫婦가 奸夫와 托情하여 반드시 本夫를 除去하려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 하였거니와 韓女와 千己의 關係도 그러함으로 嚴訊하여 得情하였다고 한다. 判付하기를, 啓奏대로 하라 하였다. 7月에 別諭한 內容에 依하면 鄭千己와 韓女의 獄事는 韓女가 없었다면 어찌 千己와 같은 手犯이 있겠는가 大凡 殺人獄事에는 謀計를 造作하는 것이 가장 緊要한 것인데 그 造謀한 것이 이 韓女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千己는 죽이지 아니하고 다만 韓女만 죽인다는 것도 獄事體統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때문에 아울러 訊推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지금 滌蕩할 이때를 當하여 한사람만 놓아 줄수도 없고 두사람을 다 그냥 죄 줄수도 없으니 卿이 그 推鞫主任官을 嚴飭하여 嚴刑한 뒤에 放送케 하라 하였다. 淫 獄 顯宗3年 刑曹啓目에 全羅道사람 白이文이 그 異姓4寸 金應振의 妻를 淫奸하였는데 이것은 親族相奸에 屬하므로 本罪外에 參酌하여 罪等을 加重하여 年限을 定하지 말고 遠地定配하기를 回移牒함이 어떠한가 하니 그대로 하라고 允許하였다. 肅宗 3年에 許 積이 領議政으로 있을 때에 啓奏하기를, 陰竹 林丁元이 李女를 淫奸한 罪로서 啓覆에 들었는데 李女는 본래 士族이 아니므로 丁元이 지금 비록 死刑은 免하였으나 從前에 正兵의 妻로서 內禁衛의 妻가 되어 驛子와 和奸한 者는 士族으로 論斷하라는 受敎를 받았으나 옛날에는 內禁衛가 다 士族이었고 正兵도 또한 兩班이 많았다 하니 이 受敎를 생각하여 그 때의 一愛의 獄事로 因하여 士族으로 論해서 衛士의 마음을 慰勞하고자 한 것이나 受敎한지가 이미 오래되어 變更하기도 어려움으로 大臣에게 訪問하여 定式으로 함이 어떠하던가 하니 右議政 許 穆이 奏議하기를, 臣의 意見도 領相과 다름이 없아오니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傳敎하기를, 좋다 하시다. 10年에 刑曹判書 金德遠이 奏啓하기를, 湖南地方에 異姓從兄弟가 서로 奸淫한 者가 있어 이미 承服하였다고 本道에 啓聞하였으니 臣曺에서 마땅이 覆啓할 것인바 그 罪의 律文은 杖 100度에 徒3年刑으로 되어 있읍니다. 지난해에 禮亨의 獄事때에는 大典續錄에 依하여 士族이 奸淫하여 風敎를 瀆亂케 한 者는 奸夫와 아울러 絞刑에 處하라고 定奪한바 있었는데 또 곳 그때 大臣의 稟奏에 依하여 또 時刻을 기다리지 말고 處斬하기로 受敎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罪人도 역시 受敎한 것에 의하여 處斬하오리까 하니 上이 이르기를, 그때 受敎는 一時的으로 懲惡하라는 意思에 不過하였던 것이니 그것을 반드시 기리 定式으로 할 것은 없다 하였다. 同年에 刑 曺啓目으로 鐵山사람 金元綱의 處 禮節이 婢夫 林莫男과 淫奸하다가 逃走하였는데 禮節에게는 通奸雇工律로 處斷하고 莫男에게는 雇工律로서 酌處하도록 定奪하였으나 所謂 雇工律이란 것은 이것이 雇工이 家長의 妻와 相奸한 경우의 法律이니 前에 三省推鞫의 擧措가 있어서 不待時處斬의 뜻으로 本道에 回移牒하고 因하여 이것을 定式을 삼음이 어떠 하오리까 하니 그대로 允許한다 하였다. 15年에 驛吏 金乭伊가 擊錚原情하였는데 그 內容은 그 母 永正이 殺人獄事에 橫罹하여 해가 지나도록 갖혀있다는 것이다. 刑曺啓目에 依하면, 永正의 4寸弟 己賢이가 그남편 論先이와 같이 永正의 집에 있었는데 己賢이가 瘡疾이 있다하여 다른 女子에게 改娶하여 그 妹家로 옮겨 가서 살았다. 去年 9月15日 저녁에 論先이가 永正의 집에 간다고 나가서 다시는 去處를 모르게 되었으므로 그 後妻 次淑이가 말하기를, 永正이가 일찍이 論先이와 相奸하였고 또 다른 男子와도 相奸하였는데 奸人끼리 싸움으로 永正이가 殺害하여 去處를 모르게 하였다 하고 告訴狀을 내서 獄事가 成立되었으나 論先이가 永正의 집에 간다고 나갔을 때도 元來 아무런 看證이 없었고 永正이가 殺害하였다는 때에도 또 아무도 봤다는 證據가 없고 永正이가 일찍이 論先이와 奸淫하였고 또 他人과도 相奸했는 一款에 대하여도 反覆하여 구핵하였으나 亦是 아무런 端緖가 없었다. 永正이가 雇工 朴承業을 3次나 嚴刑하였으나 一向 원抑하다고 만하여 해가 지나도록 추핵하였으나 아직도 究得하지 못하였으니 莫重한 疑獄을 그 子息이 擊錚訟寃한다고 하여 輕率하게 處決할 수도 없는 것이니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判付하기를, 어미를 위하여 訟寃하는 말은 取信할 수 없는 것이 彼此間에 다 아무도 봤다는 證據가 없고 또 相奸한 端緖도 없으니이것은 정녕코 밝힐 수 없는 獄事인데 一向으로 加刑하고 있다는 것이 疑罪를 가볍게 處理하는 原則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을 大臣에게 回議하여 稟處하라 하였다. 右議政 吳始壽가 奏議하기를, 論先이가 한번 나간 뒤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끝까지 去處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 後妻 次淑이가 이르기를, 永正이 일찍이 論先과 相奸하였고 또 다른 間夫와도 相奸하다가 奸夫들 싸움에 永正이 論先을 殺害하였다고 하였는데 永正이 論先과 相奸했다는 것과 다른 間夫와 相奸했다는 것이 다 依據할 證跡이 없으니 이래서는 獄事가 成立될 수 없는 것이며 永正의 집에 論先이가 갔다는것과 永正이가 論先을 殺害할 때에 亦是 아무 看證한 사람이 없으니 또한 이것도 獄事가 될 수 없는 것이다. 論先의 先妻 己賢이는 卽 永正이와 한집에 사는 四寸동생인데 남편 論先이 永正과 通奸하고 己賢을 黜棄하고 잇따라서 永正의 죽인 바가 되었다면 己賢과 永正의 사이에는 마땅히 四寸間의 情誼가 없을 것이고 도리혀 分疎하여 갔을 것이니 이것도 모름지기 疑心할 만한 것이다. 永正의 亡夫의 同生弟가 또 永正이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하는데 永正이가 참 失行의 事跡이 있다고 하면 人情으로 따라서 마땅히 顧藉할 것이 없을 터인데 亦是 그런일은 없다고 하니 이것도 疑問된 일이며 次淑이가 告訴狀을 내고서는 도리혀 獄事가 안될가 두려워 하여 어디로 逃避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니 이것도 疑問된 일이며 論先이가 公然이 나간뒤에 去處가 없이 되었으니 怪常하기 그지 없으나 獄情으로 말한다면 疑問되는 것이 이와 같이 많고서는 獄事成立은 될 수 없을 것 같으니 臣의 淺見으로 이 獄事는 믿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上裁를 받들 뿐이라 하였다. 判付하기를, 이 擊錚과 回啓한 辭意를 본즉 함께 憑據할 明證이 없으며 또 疑心할 端緖도 없으니 獄事는 成立하기 어렵다 特히 가벼운 法典을 따라서 年限을 定하지 말고서 定配하라 하였다. 24年에 黃海監司 李德成의 啓本에 의하면, 平山罪人 金斗宗이 그 5寸叔 論男이가 斗宗의 父의 出他한 사이를 타서 斗宗의 母와 相奸하면서 同宿하는 것을 보고서 憤痛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論男을 찍어 죽였다 한다. 判付하기를, 그 男女의 和奸한 것이 이같이 明白하면 斗宗이가 憤痛함을 이기지 못하여 장살하고 치운 것은 天理나 人情으로 다 같은 것이다. 論男이 먼저 倫理와 끊어진 일을 한 것이니 이 事件은 卑屬이 無端히 尊屬을 刺殺한 것과는 큰 間隔이 있는 것인즉 大明律의 卑幼가 本宗 小功親屬을 毆打한 律을 適用하는 것은 친合하지 못하니 參酌하여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英祖 15年에 京囚罪人 金 夢이 雇工奴의 몸으로서 上典의 妹尙才와 交奸한 情節을 承款하여 結案하였다. 詳覆할 때에 判付하기를, 名分이 이미 무거우니 어찌 可히 兩班과 상놈의 階級으로 法을 低仰할 수 있겠나 하물며 이런 사람에게 名分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더욱 嚴하게 處斷할 것이니 그 文案을 보니 尙才의 所行이 놀랍고 괘씸하기가 金 夢이 보다도 더하나 法典에 없는 律을 지금 처음으로 만들수도 없으며 大典·受敎에 亦是 이미 法앞에는 籍의 差等이 없다는 글이 있으니 各別로 3次에 걸쳐 嚴刑한 後에 死罪에서 減等하여 絶島 定配하라 하였다. 同年에 咸鏡監司 李箕鎭의 啓本에 鍾城罪囚인 內奴 連友가 그아우 連淸의 妻 玉接과 官奴 辰永이 潛奸하는 것을 보고서 連友가 辰永을 亂打하였으나 곧 죽지 아니함으로 노끈으로 絞殺하였다 하여 承款하고서 結案하였다 한다. 啓覆時에 判付하기를, 律文에 이미 곧 그 奸所 現場에서 奸男女를 같이 죽인 者에게는 論罪하지 말라 하였으니 死罪에서 減等하여 遠地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今上 6年에 草溪 都應兪의 子婦 文女가 毒藥을 마시고 自殺하였다. 應兪의 아들 啓大가 擊錚原情하였는데 그 內容은 兄嫂 文女가 靑孀寡婦로 혼자 사는데 그 堂叔 應千이가 庶祖母인 成召史로 仲媒를 하여 文女와 交奸케 하였다. 文女는 남질과 같이 呈單하여 自己에게 그러한 汚名은 曖昧한 말이라 하고서 飮毒 自處하였는데 檢官들이 와서는 더 凶醜한 이름을 啓大의 아비 應兪에게 옮겨서 덮어 씨웠다는 것이다. 道臣에게 命하여 사핵하여 啓奏하게 하였더니 이르기를, 應兪가 그 아들을 시켜 擊錚하여 寃痛을 呼訴케 하고 그 罪는 應千에게 돌렸는데 應千은 그의 從弟이고 寡婦는 그의 子婦이다. 萬若 應千이가 寡婦인 文女와 潛奸하였다면 어찌 참아 한집안에서 같이 두고서 그 惡行을 繼續케 할 것인가 하물며 臘月에 일어난 한가지 事實은 이 獄事를 만든 장본이 되는 것이니 떡시루를 破壞하고 매트리 신발을 버려두고 해서 제 自身 亦是 殊常한 形跡이 있었다는데 지금 應兪와 應千의 從兄弟가 서로 핑계만 대고 있는 것은 實로 人倫의 極變이고 개돼지만도 못한 行爲이어서 嚴하게 사핵하여 得情하였다는 것이다. 判付하기를, 옛적부터 밝히기 어려운 것은 淫獄이니 하물며 이와 같은 綱常에 關係되는 일은 至極히 陰慘하고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應兪는 應千에게 돌려서 핑계하고 應千은 應兪에게 돌려서 핑계하는데 다 같이 證據가 있고 各自가 또 서로 圖脫하려함으로 訟官이 이 사건의 眞狀을 구핵하기에 어렵게 되어 감은 怪常할 것도 없어서 한갖 疑晦點만 더하여 가고 있다. 朝家에서는 蔽一言하고 말하라면 이러한 理致는 決코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 嶺南이라 地域은 곧 鄒魯의 鄕이고 都가와 文가는 두 姓이 다 兩班의 一族이라 하니 鄒魯의 鄕에서 班族의 數가 어찌 이러한 앞서 보지 못한 變怪를 저질렀겠는가 비록 文案으로 考察하여도 또한 스스로 처파되는 것이 있으니 大槪 應兪는 집에다가 나이 젊은 孀婦를 두고서 尋常한 一念이 늘 劫奪하려 오는 놈 淫奔하려고 丘麻田을 찾는 等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所爲 應千은 從弟의 親族으로서 或 應兪의 藥다리는 것도 看儉하고 或 應兪의 廬幕에도 投宿하여 그가 往來하는 範圍는 內外가 없고 밤과 낮도 없었으므로 從叔과 侄婦가 스스로 서로 親近하여 졌으니 應兪는 事理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妄想으로 疑慮를 가지고서 事端을 惹起시켜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한집안에서 舅婦가 원망이 쌓이고 同堂 가운데 兄弟가 원수가 되면 날이가면 하루 하루가 더 甚하여지매 반드시 甘心하려고 하는 것이다. 天倫의 義가 무거우니 시어미는 또 沈默을 지키고 있었는데 成女를 迫逐하여 情을 빼앗고 고쳐서 보낸 뒤에는 세 嫌疑와 묵은 猜忌가 길을 달리하면서 輻湊하였으니 여기에 이르러 臘月의 事件을 摘發하여 鉗制할 資具로 삼으려고 應千은 밖에서 慫慂하고 成女는 안에서 誘說하여 인하여 可憐한 孀婦로서 窮하여 갈 곳이 없게 되었느니 憤하고 峰滿하여 病이 되어 轉輾한 남어지 所志單을 품고서 官에 바치고 毒藥을 마시고서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은 그 지나온 歷程이 불붙는 것같이 환하게 透視케 한다. 前後의 訟官들이 매양 臘月事件으로써 이 事件을 긍계을 삼어 끈덕지게 시달리면서 그 許多한 方法으로 罪저지른 奸計와 許多한 흠집을 드려다 보려는 兆漸이 臘月事件의 有無에 있지 아니한 것인가 하고 있으나 臘月事件으로 이 獄事를 決斷하려 함은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 臘月事件으로 論한다면 빨리 보면 비록 應千에 對하여 疑心을 가지게 되는 案일 것 같으나 좀 자세히 생각하면 도리혀 應兪로서 스스로 發明할 端緖를 마련해 주게 되는 것이니 假使 應兪가 속에 不測한 마음을 품고서 밤에 孀婦의 房문을 지나갈 때에 비록 말(斗)만한 큰 쓸개(贍)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때 妻라든가 며느리라든가가 盜賊이야 하고 큰 소리로 疾呼할 때에 입이 딱벌어지고 마음이 아파서 머리를 움켜쥐고 쥐숨듯이 들어가기에 바빠서 餘暇가 없을 터인데 어찌 敢히 몸을 쑥 내놓으면서 "내다"하고 晏然히 대답할 수가 있겠는가. 망칙한 생각이 있고 없는 것은 "내다"라는 한말로서 可히 곳 判定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떡시루를 발로 차서 깨트린 事件으로 어떤 奇貨나 얻은 듯이 이 獄事의 칼자루로 만들려 하고 있으나 밤에 지나가다가 엎어져서 器物을 차서 깨트리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니 異常할 것도 없다. 참으로 이 說대로 따라 한다면 여러 사람중에 땅을 못보고 넘어지거나 발을 다치는 자는 다 몰아다가 淫奸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應兪는 친구이고 應千은 從舅인데 倫常의 變으로 兩舅가 서로 헐뜯고 있으니 孀婦의 立場으로 있어서는 다만 한번 죽음의 길이 있을 따름이다. 이 臘月事件의 不分的한 說을 가지고서 이 아비를 告訴한다는 것이 이것이 진실로 어떤 마음씨일까 저 孀婦가 참으로 시아비를 告訴하는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죽음을 判決하는 것도 어렵게 여기지 아니하는 意志가 있다면 再昨年 臘月 以後에 告訴도 하고 죽기도 할 날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3年하고도 17달을 지나서 비로소 이런 擧措를 하였을까 朝家에서는 이것이로써 明白히 成女와 應千이가 孀婦를 그렇게 하도록 慫慂한 것이란 것을 아는 것이다. 이 獄事의 元犯은 應兪가 아니고 마땅히 應千인 것이나 또 應千도 반드시 그러하리라고는 할 수 없으니 應兪의 供辭에 이르기를, 제눈으로 應千이가 孀婦하고 같이 자고 같이 앉았는 것을 본 것이 한 두번이 아니라 하였으니 果然 그러하다면 應兪가 應千을 원수같이 보는데 그 憤心으로 만약 같이 자고같이 같이 앉은것을 봤다면 어떤 一半分이라도 그를 愛惜하는 마음이 있기에 官에도 告訴하지 아니하고 이웃에도 퍼뜨리지 아니하고 다만 言語로서 呵責만 하고서 말 것인가 應千으로 替當하였다는 說과 逃 한 事件은 또 疑問이 아님이 없으니 하나는 너무 못난 탓이고 하나는 지나치게 겁을 먹은 所致일 것이니 어찌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서 반드시 그러하다는 罪科에 돌린 것인가 또 應兪의 돈 꾐이를 던졌다는 말이라던가 應千이가 말을 사가지고 짐을 싯고 갔다는 말은 모두가 彼此間에 證參될 것을 만들어 부치고 죽음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計策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取信할 수 있겠는가. 大槪 이 獄事는 처음에는 應兪가 應千을 致疑한데서 일어났고 中間에는 應千이가 應兪를 도로 誣告한데서 이룩하였고 마침내는 成女의 應千이와 같은 마음으로 逞憾한데서 매듭을 맺었으니 孀婦가 시아비를 告訴하고 죽음에 나간 것이 그 根源은 甚히 微小하나 그 흐름은 아주 커졌으니 그 實狀을 考究하면 아직도 참으로 이 罪科의 歸着할 곳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朝家에서 斷定하기를 이러할 理가 決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應兪와 應千은 스스로 다 죽일만한 罪를 지고 있으니 아 저들이 親히 相奸하였다고 囑託하였다 하니 이것이 얼마나 더러운 일이며 또 그들이 어떤 關係인가, 지금 同堂사이에서 아우는 兄을 誣告하고 兄은 아우를 誣告하여 傷倫悖俗함이 다시 더말할 餘地도 없다. 입을 열어 말을 하려니 입이 더러워진다. 律文을 詳考하면, 應兪는 罪가 三省推鞫에 關係되는 것이고 應千이는 일이 處斬에 該當되는데 應兪와 應千이 서로가 誣告하여 出場할 期限이 없으니 비록 一切로 아울러 罪를 주어도 저들은 敢히 辭退할 수는 없을 것이나 다만 律文에 이르기를, 死罪로 誣告한 사람은 誣告대로 決定된 것이면 誣告한 자가 死罪에 反坐 未決中이면 杖 百度 流3千里의 刑에 처한다 하니 應兪와 應千은 다 이것이 未決折의 類이니 犯情은 죽일만하나 法에는 가벼히 處斷함에 依據할 바가 있으나 文召史의 自殺한 데에는 마땅히 한사람쯤은 償命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나 應兪·應千을 莫論하고 自身이 惡名을 둘러쓰고서 各其 圖脫하려 애쓰는 짓들이니 所謂 내몸도 容納이 않되거던 하물며 내 뒤에것을 생각할가 하는 것이 正히 이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들에게 奸意가 있어 滅逼하였다거나 設計하여 文女를 故意로 自殺하게 하였다고 論罪할 수도 없고 또 손으로 때리고 칼질하고 입으로 허물어서 어떻게 하였다는 것으로 論할 수도 없는 것이나 이러나 저러나 여기에 꼭 適合한 律을 施行하여야 될 것이므로 都應兪·應千등에게는 特히 死刑에서 減等하여 絶島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重補〕8年에 羅州 朴얼朴의 獄事에 대하여 判付하기를, 今審 獄案의 判決에 있어 特히 申飭할 것이 있으니 先朝戊寅年受敎에, 男女가 한 房에서 같이 對食하는 것이 奸所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下敎하였고 또 癸巳年 受敎에는 奸所와 다름이 없는 行爲를한 者는 그 刑案을 完決하지 말고 狀聞한 뒤에 擧行케하라고 下敎하여 京·外에 命하여 이 傳敎를 받들어 遂行시켰더니 近來에 와서는 諸道에서 이와 같은 獄事는 처음부터 狀聞 또는 稟處하는 일이 전혀 없으니 刑曹에서 特別히 闕文으로 行會하여 諸道의 이러한 類의 獄事는 旣完決·未完決을 莫論하고 아울러 卽時 原文案을 개錄하여 狀啓로 올리도록 分付하라 하였다. 〔重補〕同年에 大丘 成聖一의 擊錚한 原情 內容에 이르기를, 逃亡갔던 婢女孟春이가 돌아와서 自現한 뒤에 金世貞등이 孟春의 母女에 嗾囑하기를 너희들이 成哥父子가 孟春의 色情을 두고서 싸우고 있다는 風說을 퍼뜨리기만 하면 成哥들이 이땅에 살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되면 孟春이는 값을 치루지 아니 해도 스스로 贖良할 수 있다 하였으므로 孟春의 母日丹의 母女는 그 말대로 하여 街路上에서 그 말을 퍼뜨리다가 도리혀 목을매어 自殺하였는데 金世貞의 무리가 제아비인 成泰郁이가 차고 때려서 죽었다고 官에 告訴하여 獄事가 되였다고 하였다. 本道에 査핵케 하였더니 調査하여 啓奏하기를, 奸淫의 事件은 말만하여도 더럽다 孟春이 泰郁의 婢로서 暴言을 無難히 말하였고 日丹이는 孟春의 母로서 肆然히 呼唱하니 泰郁이 憤함을 참지 못하여 때리고 차서 열흘만에 죽었다 하니 亦是 必然의 理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였고 刑曹回啓에도 그러하다. 判付하기를, 事件이 陰慘하며 醜穢하고 形迹이 알不分明하여 朝家에서 그 證言을 다 찾아서 風化를 傷하게 하려하지 아니하나 비록 常情과 事理로 말하더라도 所謂 被告人 成泰郁은 이미 班名을 가졌고 또 이성을 가추고 있는 者이니 어찌 참아 이따위 짐승같은 行爲를 하여 스스로 倫常을 허무르는 罪科에 달게 빠져 들겠는가. 萬一 참으로 干犯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孟春의 母가 되었다면 마땅히 굳게 隱諱하여 다른 사람이 猜忌함을 두려워 하여야 될 것인데 도리혀 村會에 口傳하고 또 洞長에게 手本을 해주었으니 別般 事端이 介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어찌 이같은 用計를 하겠는가. 大抵 泰郁이는 他鄕에서 나그네로 붙여 있는 사람이나 家産이 富饒하다는 이름을 가졌고 父子와 兄弟가 亦是 蕃盛한데 어찌다가 四隣에 和睦을 잃고 미움이 그사람 一身에 다 돌아오게 되어 이로서 成致文·朴弘逑·金世貞의 무리가 가만이 蜚語를 煽動하여 私憾을 갚으려 하고서 忽地에 검은 밤에 밝혀질 수 없는 案件을 가지고서 白地로 虛構하는 術法을 做出하여 어리섞은 노구를 선동하고 치애한 少女를 指嗾하여 成哥의 집을 헐고 그 鄕에서 쫓아낸다는 등 或은 賤婢를 良人으로 놓아주고 田土를 얻게한다는 등 하여 파먹기도 하고 脅迫도 하기를 하지아니함이 없으니 저 愚蠢한 것이 平素에 免賤하려고 애쓰던 것과 좋은 田土를 얻는다는 慾心에 그말을 口傳으로 하고 또 不足하여 手本으로 만들고 또 不足하여 다짐하는 誓文까지 받아서 姓氏의 집을 滅亡케 하고 그집이 紀倫을 요란케 하여 그들로 그 고장에 住接해 살지 못하도록 하고야 말게 하니 이런 경위를 당하여 비록 知覺이 없고 廉恥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같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事件이 自己에 當着이 된다면 그것을 보고서 입을 다물고 팔장만 끼고서 모르는척 하면서 있을 者가 어디 있겠는가. 官에가서 事實을 暴白하고 辨明할 것 까지는 깊이 해아릴 餘暇를 차리지 못하고 憤氣를 타고서 相對의 惡人을 毆打한다는 것이 그다지 怪異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죽은 사람의 傷處가 많고 卽死할 要害의 分界點도 아니며 證人으로 봤다는 者는 다 그에게 憾意를 먹고있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 또 한가지 疑問이 되며 또 容赦할 만한 端緖가 있으니 父子 4人이 一時에 함께 달려들어 犯行하였다 하면 그中에 元犯은 누구이며 또 隨從은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이것을 無視하게 네사람中에서 强別하여 그中에 疑心나는 것 같으나 그런 것이 의희하다는 形跡을 잡고서 이르기를 이것이 元犯이고 이사람들이 隨從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크게 獄事를 審理하는 體統과 人命을 무겁게 여기는 刑政의 大義에 어그러지는 것이며, 孟春으로 泰郁의 證據는 서게하면 이것은 奴婢로서 上典을 證하게 함이고 聖二로서 泰郁을 證據하게 한다면 이것은 子息으로 아비를 證하게 하는 것이니 그것도 될 말이 아니다. 成泰郁은 死罪에서 減等하여 定配하게 하라 하였다. 審 理 〔重補〕 太宗11年에 李之剛등을 各道에 派遣하여 원옥을 審理하게 하였다. 敎하여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掌刑(刑律을 管掌함) 官吏들이 하나 뿐도 아니면서 오히려 誤斷하는 경우가 있거든 하물며 州와 郡이겠는가, 옛날 趙大臨의 獄事를 獄官들은 大臨에게는 急하게 하고 仁海에게는 늦추었다 함을 듣고, 다시 黃喜를 派遣하여 監問하였더니 果然 그 實情을 把握하므로 仁海를 伏誅하였다. 만약 다시 핵實하지 아니 하였다면 반드시 誤斷되었을 터이니 이로부터 더욱 獄訟을 審愼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로다. 너의들은 操心하여 할지어다. 〔重補〕 成宗 11年에 敎하여 이르기를, 獄事를 掌理하는 官吏들이 失手가 하나뿐이 아니로다. 苛酷慘刻한 官吏들은 없는 죄를 꾸며서 받들기(羅織)도 하고 昏速庸懶한 官員은 그 罪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淹滯하니, 羅織을 좋아 하면 拷訊을 嚴加하고, 深文峻法을 억지 끌어대어 아무 허물이 없는 사람도 부질에 橫罹하게 되고, 淹滯를 좋아하면 진작 處決하지 아니하고 時日을 끄는 동안 과곡이 加聖하고 飢寒이 切身하여 疾病에 悲號하다가 드디어 안폐(獄)에 죽게되니 이 어찌 寃痛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찍 듣건대 한사람이 向隅하여도 온 집안이 不樂한다 하였으니 匹夫와 匹婦가 그의 허물이 아님에도 죽는다면 그 責任을 누가 진다는 것인가. 대저 獄辭란 것은 처음은 교(갈複雜한것)한 것 같으나 모든 情狀을 因緣하여 자세하게 推究하면 모든 실마리가 제대로 풀려지고 司法官으로서는 自己의 私意를 加할 것이 없을 뿐이니 혹은 羅織하지도 말고, 혹은 淹滯하지도 말아서 仁恕로써 根本하고 明允으로써 施行하여 死者로서 自己 허물에 굴복하게 하고 生者로서 寃情이 없게하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補〕 仁祖13年 備忘記에 百姓들이 農事지을 時期를 當하여 兩澤이 失期함은 寃獄이 있을가 두려워 하고, 내 甚히 軫念되는 바이니 서울과 地方으로 하여금 各別히 審理하여 寃抑이 없게 하라 하였다. 義禁府에서 啓하여 이르기를, 兩澤이 失期되어 亢陽(旱魃)이 甚하므로 大小의 群情이 悶缺함을 잊을 수 없으며, 지금 이 聖敎는 民生을 軫念하여 먼저 寃獄을 審理하도록 하니, 재殃을 덜기 위하여 刑獄을 欽恤하는 道理가 至極하온지라, 臣等이 時囚中 犯情이 極重하여 輕解할 수 없는 것은 除外하고, 그 나머지 罪人은 順序를 區分하여 睿裁에 價覽한다 하였다. 答하여 이르기를, 依啓하라 하였다. 〔重補〕 孝宗8年 唐津人 李挺의 誣告로 雪寒이 酷甚한데 湖右士民의 被逮된 中에서 동뇌한 사람이 많은지라, 上이 한번 이들의 供辭를 보고 申直을 洞辨하여 告한 者를 處罰하고 억울하게 被囚된 者를 全員釋放하는 同時에 有司로 하여금 食糧을 賜給하도록 하니 囚者들이 感祝하여 눈물을 흘리고 돌아 갔다. 〔重補〕 顯宗 5年 上이 凍寒에 罪人이 오래도록 囚禁되어 있음을 念慮하여 食糧과 衣服을 支給하도록 命하고, 寃獄을 審理함에 있어서 罪籍을 親히 閱覽하여 그의 輕重을 핵實하고, 한 사람이라도 抱寃함이 있을까 念慮하여 한번 文案을 閱覽함에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犯人을 論罪함에 있어서는 刑官이 遺忘한 것도 문득 記錄되어 있다. 〔重補〕 8年 海西人이 上變하는 者 있었으나 이를 한번 물어 보고 이 誣告임을 알아 그 사람을 處刑하고, 被逮된 者 70餘人을 釋放하는 同時에 食糧까지를 주어 歸家하게 하고, 吏卒들에게 財物을 掠奪당한 것은 모두 찾아서 돌려 주었다. 〔重補〕 肅宗18年 八道方伯에게 諭示하여 이르기를 人命보다 더 重한 것이 없고, 한번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는지라, 이러므로 비록 人主가 雷霆의 威嚴을 가지고 生殺의 權柄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람을 刑罰하거나 또 死刑함에 있어서 私的인 氣分에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며 그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한번 公議에 付하여 處決되어야 하는 것이나 지금 殺人·僞印등 반드시 死刑에 處하여야 하는 容恕하기 어려운 罪惡에도 오히려 卿宰를 集合하여 再三 詳覆하고 律文의 引用과 罪科의 適用에 있어서 반드시 死刑하여야 할 것도 生道를 講究하여 보아 도저히 容恕할 수 없고 여러 大夫들이 모두 死刑에 處하여야 한다고 한 뒤에 死刑하는 것이 어찌 人命을 重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와같이 아니 한다면 혹 포원枉死되어 和氣를 損傷시킨 것이 念慮되나 大小州懸의 官員들은 欽恤하는 道理를 잊어 버리고 罪人을 處決할 때에 法대로 施行하지 아니하는 일이 많으며, 혹은 微細한 嫌意로 인하여 혹은 一時의 觸怒로 인하여, 別途의 大杖을 使用하여 恣意로 사람을 撲殺하고, 人命을 輕視함이 草芥와 같이 할뿐 아니라, 昨日 歲抄를 보건대 各道 守令들이 이러한 犯行으로 인하여 譴責을 當한 者도 또한 한 두사람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類를 징집하기 위하여는 別樣으로 申飭하지 아니 할 수 없으니 各道 方伯은 이 뜻으로써 列邑에 효유하여 各自 상念하여 이러한 弊習을 革罷하고, 모든 字牧이 된 者는 이 明敎를 체득하지 아니하고, 法을 違反하여 濫刑하기를 前日과 같이 하고, 隨事 發見될 경우에는 마땅히 嚴刑하여 決코 饒貸하지 아니 할 터이니 卿은 着實히 擧行할지어다. 〔重補〕 今上9年 傳敎에 이르기를, 지금 海西의 査案을 보건대 各道에서 罪囚들을 錄啓하지 아니한 者에 대하여 滯獄하는 弊端이 있음을 推知할 수 있도다. 近來에는 매번 審理를 執行하였으나 滯獄은 또다시 如前하다 하니 이는 대개 事過한 후이면 문득 放置하여 事件講究에 致意하지 아니하기 때문인 것이며 錄啓한 罪人에 이르러서도 한번 登聞하면 이를 永久한 鐵案으로 하고, 審理하라는 命이 없으면 擧論하지 아니하니 이렇게 된즉 錄啓한 것이 도리어 錄啓하지 아니한 것보다 못하게 되니 自今 各道監司들은 到任한 후는 먼저 道內의 錄啓한 文案에 대하여 潛心究理할 것이며 그중에 疑端이 있는 곳은 仍해 또 調査하고 그 結末을 기다려 別途로 意見을 갖추어 狀聞할 것이며, 만약 아무런 疑端이 없고, 또 傳輕할 수 없는 罪囚라면 道內의 錄啓 罪囚를 依前推訊한다는 뜻으로써 措辭하여 狀聞하고 이 傳敎는 該曺의 受敎에 載錄하여 定式으로 施行하게 할지어다. 〔重補〕 14年 傳敎에 이르기를, 서울과 地方의 重罪囚를 審理하여 日前에 겨우 이미 判決하였도다, 각 道伯이 仍推한다는 案을 다시 審閱하도록 한 것은 實로 [要囚服念]의 뜻에 合致한 일이며, 일찍 道伯을 歷任한 者로서는 그들의 情實을 잘 알 것이고, 서울에 있는 獄官들이 그 書面만을 보고 그 情狀을 遙度하기 보다는 낳을 터이며, 諸臣들은 이미 承命하였으니 筵退한 후에는 각자 公癬에서 두루 살펴보고, 각각 그 意見을 갖추어 稟啓하면 判決할 터이니 먼저 이 뜻으로써 각 道에 下諭하고, 혹 更査할 類가 있는 것은 아직 處分을 기다리오록 政院에서 有旨를 만들어 보내게 하라. 〔補〕 罪人을 審理하여 狀啓하는 規式 今上3年 本曺判書 鄭好仁의 所啓에 의하면 지금 罪人을 審理하라는 下命은 實로 우리 聖上께서 罪囚를 측은히 생각하여 欽恤하는 至意에서 나온 것이므로 臣子의 班列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누가 欽頌하지 아니하겠으며, 八道의 審理는 近來에 처음으로 있는 盛擧이나 각 道의 獄案에 詳略이 같지 아니하고 規式이 각각 다르므로 이를 一定한 規式에 의하도록 臣曺에서 規式을 書出하여 八道에 知委함이 如何하올가 하였든 바 上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狀 啓 規 式 某邑罪囚 某人의 毆打, 혹은 足척, 혹은 刃刺에 대한 事實은 그 犯行에 따라 記錄하고 弟幾日만에 致死되고, 某年某月某日에 罪人을 囚禁하여 幾次로 刑推한 事實을 記錄한다. 屍親의 告狀 혹은 面里任의 手本을 添付한다. 初檢의 傷處·實因·行檢한 日字를 記錄한다. 屍親·正犯·于犯·于連人등의 招辭는 問目만을 除外하고 이를 記錄하되 各人등의 招辭中 緊關한 것만 記錄하고, 不緊한 招辭는 省略하여 支繁한 弊가 없도록 한다. 初檢官 某邑守令 某氏의 結辭를 添記한다. 道臣 某氏의 題辭를 添記한다. 覆檢의 傷處·實因·行檢日字를 記錄한다. 各人의 招辭는 初檢의 例에 의한다. 覆檢官 某邑守令 某氏의 結辭를 添記한다. 만약 3·4檢을 하였을 경우에는 傷處와 實因, 各人의 招辭, 檢官의 結辭를 모두 初·覆檢과 같이한다. 同推할 때에 받은 招辭는 일일이 記錄할것 없이 그중에 別語와 緊關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記錄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初同推에 取招한 主推官 某邑守令 某氏의 姓名만을 記錄한다, 巡營으로부터 疑端을 이르켜 行査하였거나 推官이 어떤 意見을 내어 論報한바 있으면 이는 모두 記錄하고 道臣과 推官의 姓名을 아울러 記錄한다. 屍親과 正犯의 家屬을 혹 登聞하고 行査할 경우에는 그들의 原情, 本曺의 回啓, 本道의 跋辭, 本曺의 覆啓와 그 年月日을 詳細히 記錄한다. 現時 道臣의 跋辭를 添記한다. 啓本中에 某邑罪人의 某의 이름 위에는 大黃籤으로써 書付하고, 邑號·人命·傷處·實因 및 各人의 招辭, 道臣의 題辭, 檢推官의 結辭위에는 모두 少黃籤으로써 書付한다. 各道의 死囚를 完結同推할 경우에 卽時 錄啓하게 됨은 元來法의 通例이므로 現實에 따라 修啓하고 반드시 審理를 기다려서 비로소 修啓하여서는 아니된다. 審理할 때의 審理하는 罪人등은 한 狀啓에 幷錄하고, 만약 錄啓할 만한 것이 있을 경우라도 한 狀啓로써 聯書하여 修啓하고 審理에 관한 錄啓는 한 啓本에 幷錄할 필요가 없다. 獄 案 肅宗6年 忠淸監司 尹以濟의 啓本에, 幼學 徐盤石이 子息까지 있는 婢夫 澤龍을 打殺하였다. 三覆할 때의 判付에 特히 減死하여 定配하고, 이 뒤로는 이 例를 引用하지 말라 하였다. 7年 慶尙監司 李秀彦의 啓本에, 善山 私奴 四雲이 千學과 一村에 同居하였다. 그 洞規에 每年 正月15日이면 [曳索戱](줄다리기)를 하게 되어 있는바 今年 正月 15日에도 一洞의 老少가 齊會하여 줄다리기를 하고, 罷할 무렵에 四雲이 칼을 빼어 줄을 끊으려 할 즈음에 千學에게 吳觸되여 致死하였다. 三覆時의 判付에, 法文으로써 論한다면 死刑을 免하기 어려운 일이나 千學의 刃傷은 無情에서 나온 것이요, 本來 故意로 犯行한 것이 아니므로 酌處할 道理가 없지 아니하니 特히 減死하여 定配하라 하였다. 同年 西部童蒙 俊傑과 虎良이 서로 작난하다가 虎良이 被打致死하였다. 本曺啓目에 俊傑의 나이는 9歲이며 虎良의 나이는 11歲이므로 律文內에 10歲以下로서 殺人한 경우에는 罪를 議論하여 奏聞하게 되어 있으므로 上裁한다 하였다. 敎하여 이르기를 殺人한 者를 死刑에 處한다 함은 三尺(法)이 아무리 至嚴하다 할지라도 나이가 9歲이니 이는 特히 蒙昧無知한 사람인지라 一律로써 處斷한다는 것은 實로 怜惻한 일이니 大臣들에 議論하라고 命하였다. 左議政 閔鼎重의 議에 이르기를, [禮曰卓與毫 雖有罪 不可刑]이라 하였으니 지금 이 俊傑은 즉 9歲의 小兒인지라 聖上께서 그 어림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또 그 情이 故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참아 法으로서 處斷하지 못하여 特히 矜惻한 敎旨를 發하심은 實로 禮經에 [悼不加刑]이라는 뜻이나 생각컨대 此後로 閭巷에 稚少한 아해들이 鬪홍으로 인하여 殺傷에 이르게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父兄을 治罪하되 모두 笞와 杖을 施行하여 징집하오면 그 華俗化民하는 治道에 있어서 小益이 없지 아니 할 것이라 하였는바 上이 議에 의하여 俊傑은 減死하여 定配하라고 命하였다. 英租 19年 黃州處女 金者斤連伊가 처음으로 金就興의 幣帛을 받았으나 그 父母가 就興이 妻가 있으면서 妻를 娶한다 하여 卽時 退婚하였더니 就興이 밤을 타고 入室하여 劫奸코저 하므로 者斤連伊가 發惡하여 驅逐하였더니 就興이 거짓 말을 꾸며 내 이미 通奸하였다고 소문 퍼뜨리므로 者斤連伊가 그 惡名을 痛憤하여 月波樓의 絶壁에 떨어져 죽기로 하였으나 사람들의 救濟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로부터는 한 칼에 就興과 같이 죽기로 하여 그 父의 衣服을 갈아입고 就興의 집으로 가서 품에 감추었던 칼로 就興의 腹部를 찔러 인해 致死하게 하고, 承款結案하였음을 監司 徐命九가 啓聞하였다. 詳覆時의 判付에 이르기를, 殺人에 대한 償命은 비록 漢高祖의 寬法이 3章에 있다 할지라도 風習을 矯正하고, 世俗을 懲礪하는 것도 또한 王者의 治道인지라 者斤連伊의 犯行은 俠義에 가까운 일이며 비록 王政의 扶護할 바 아니라 할지라도 一身의 累名을 벗고저 岩壁에 自殺한 것도 嘉尙한 일이며 結果의 擧措는 비록 常例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貞烈이 嘉尙하니 特히 放送하라 하였다. 34年 江原監司 沈 鏞의 啓本에 黃腸木을 偸斫한 罪人 金世亨을 死刑에 處하기로 馳啓하였으나 臣이 이 事件에 대하여는 若干의 意見이 있으므로 이에 敢히 陳附하는 바 世亨의 子 圭璧이 昨年겨울에 病死하였으나 그가 臨死하여 그의 妻 朴召史에게 이르기를, 父가 國禁을 犯하였으니 그 罪가 極刑을 當할 것이므로 내가 피눈물로 官에 呼訴하여 父命을 代身하고자 하였으나 不幸하게도 나의 病이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죽는다 하여도 눈을 감을 수 없는 鬼神이 될 터이므로 네가 나의 뜻을 잊지말고 죽을때 까지 哀訴하여 父의 刑罰을 贖하도록 하라고 하므로 그의 妻 朴召史가 夫喪을 치른 후에 獄門을 來守하면서 獄中의 媤父를 奉養하고 官庭에 들어 와서는 訴狀을 올려 그 夫의 遺言을 泣訴하면서 自身이 媤父의 罪를 代身하여 處刑을 받기 願하고 있으니, 삼가 漢史를 按察하건대 齊의 太倉令 淳于意가 有罪하여 刑을 당할 즈음에 그의 少女 제영의 上書에 아뢰기를, 죽은 者는 다시 살릴 수 없고, 刑이란 것은 다시 繼續할 수 없는 것이므로 後日에 아무리 改過하여 自新코저 하여도 어찌할 길이 없는 것이니, 官婢에 沒入하고 父罪를 贖하여 주기를 願한다 하였든바 文帝가 그 뜻을 憐 悲하여 詔勅으로서 肉刑을 免除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朴召史는 그 父의 遺志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自身으로써 媤父의 罪를 代身하기 願하니 情事의 悲切함은 제영과 다름이 없고 臣이 이미 節孝의 卓越함을 自見하였으며 한갓 法만을 지키고, 이러한 事實을 報上하지 아니함은 聖意를 仰體하는 道理가 아니므로 啓本의 末尾에 이를 陳達하지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本曺判書 吳彦儒가 啓하여 이르기를, 世亨은 마땅히 一律에 處하여야 할 터이나 그의 子婦 朴女가 官庭에 泣訴하여 代身處罰하기를 請하고, 道臣이 그 孝誠을 嘉尙하여 狀請稟處하기에 이르렀으므로 敢히 이에 仰達한다 하였다. 上이 이르기를, 大臣에게 議하라. 領議政 兪拓基가 아뢰기를, 世亨이 여러해 동안에 黃腸木을 투작하고 지금 비로소 發覺되였으면 律에 의하여 處斷하는 것이 疑心할 바 없거늘 그 子婦가 代身하기를 願한다 함은 비록 嘉尙한 일이라 할지라도 末俗에 假面이 많고, 一定한 國法을 어긋치기도 어려운 일이며, 이를 한번 寬恕한다면 이로 인한 後弊가 반드시 불어 날 터이니 法대로 施行하는 수 밖에는 다른 道理가 없다고 하였다. 左議政 申 晩은 말하기를, 金世亨의 子婦 朴女가 그 媤父를 爲하여 代身하기를 請하므로서 道臣이 狀稟하는 擧事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 孝心이 至極함을 알 수 있으나 생각컨대 黃腸木을 투석한 罪는 一律에 屬하고, 또 이미 承款하여 結案까지 하였으니 輕率하게 容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左議政 李후는 말하기를, 朴女가 獄門을 來守하면서 그 媤父의 贖罪를 願하고 있으니 그 悲切한 情事는 朴女를 褒彰하도록 論하고, 准法結案의 罪人으로 推及함은 不當한 일이라 하였으나 이를 容恕한다면 封山禁令이 장차 解弛하게 되고 이같은 罪人들이 그 僥倖을 바라 반드시 接踵하여 생길터이니 法대로 勘斷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이 審理時의 일이 아님에도 道臣이 獄案外의 일을 論列하여 세영의 事績을 들어 隱然히 傳生할 뜻을 考覆狀聞하는 중에 말 한것은 자뭇 穩當한 일이 아니므로 臣으로서는 當該道臣에게도 또한 警飭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領府事 李宗城은 말하기를, 朴女가 그 父의 孝心을 이어, 그 媤父의 命을 乞貸하는 情跡이 제 과 같고, 또 情狀이 可悲하다 하였으니 孝理로서는 容或可議할 수 있는 일이나, 생각컨대 聖王의 刑律은 그 本情을 參酌하여 勘律하는 것이므로 臣으로서는 朴女가 代命하기를 請願한다는 것이 果然 제영의 情狀과 같은지 아닌지를 알 수 없고 圭璧이 生時에 눈물로서 官長에게 哀乞하였다는 것이 果然 朴女의 오늘날의 所爲와 같은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것이며 朴女의 오늘날의 擧事가 또 어찌 僥倖히 皇天好生의의 仁德을 바라고 猾胥와 奸民이 또 敢히 前後에 屈法貸死하는 異恩을 窺測하여 敎誘로서 敢行하는 일이 아님을 알겠는가, 世亨은 死囚로서 繫獄한지도 또 이미 여러해가 되었다 하니 이는 반드시 實績을 廉訪하고, 形色을 稽察하여 그 實情을 把握한 후에 비로소 用法을 議함이 如何하올지 區區한 賤見으로서는 然疑가 없지 아니하므로 上裁를 바란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슬프도다, 三尺이 아무리 重하다 할지라도 王者의 道로서는 孝道를 優先하여야 하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사람의 가슴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朴女의 마음이 제영과 같은지 아닌지를 君들이 어떻게 알겠으며, 法官과 道臣이 또 어떻게 이를 다 알겠는가, 그 마음을 알고저 한다는 것은 이는 査心한다는 政治이니 人君이 된 處地에서 어찌 참아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슬프도다 아무리 黃腸木 百株를 倫斫당하고 法을 解弛하게 하는 恨이 있더라도 어찌 참아 孝子·孝婦의 마음을 傷하게 하겠는가, 안핵사가 된 자로서는 所懷가 있으면 陳達할 수 있는 일이거늘 이를 어떻게 問責하겠으며, 圭璧이 그 妻에게 遺言한 與否는 지금 그 魂魄에게 어떻게 査問하겠는가, 白首暮年에 孝婦의 마음에 感動하지 아니 한다면 이 어찌 30年 臨御한 뜻이라 하겠는가, 金世亨은 特히 減律하여 島配할지어다. 〔補〕 今上 元年 永興人 金宗大가 朱永起를 구척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本道道臣 趙重晦의 稟啓에 의하여 判書 張志恒이 回啓하기를, 實因이 明白하고 詞證이 俱備하여 實로 傳生할 道理가 없으나 屍親 金召史의 招辭에 말하기를 永起와 宗大는 親愛한 사이이며, 宗大가 永起의 腰部를 한번 찬 것은 實로 戱弄한 程度에 不過하고 臨終時의 遺言에도 告官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媤父가 他道에 別居하든바 他日에 와서 叱責하기에 또한 辨明하기도 어려우므로 그 夫의 遺言을 違反하면서 告官하기에 이르렀다 하고 參證人의 招辭에 말하기를 宗大가 한번 足척한 것은 戱弄에 不過하고. 처음부터 肄氣가 있었든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永起의 父도 또한 말하기를 戱弄에 不過한 事實로서 成獄하기 까지에 이르게 된 것은 後悔하여 마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그 父와 그 妻가 다같이 報復할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고 戱弄으로 인하여 足척한 事實이 灼然 無疑하므로 그 情狀을 參酌하면 容恕할 수 있으나 그 法을 考察하면 戱殺도 또한 償命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러한 獄體를 愼重히 다루는 道理에 있어서 敢히 擅斷할 수 없으므로 上裁를 바란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戱殺에 비록 償命하는 法이 있다 할지라도 金宗大의 獄案에는 容恕할 端緖가 있고, 여러 參證들도 모두 稱寃하고 있으니 經典을 施行함이 妥當한지라 減死하여 受配하라 하였다. 〔補〕 同年 京人 李이永이 肩婢 仲連을 刺殺하고, 承服하므로 照律하게 되었다. 三覆時의 判付에 이르기를, 그 所犯을 듣건대 常性人의 所爲와는 다르고 또 仲連은 他人과 焉間이 있는 터이며, 失性에서 發生된 事實로서 仰役하는 사람에게 論及하는 경우도 또한 常性人이 不干한 사람을 殺害한 것과는 分別되어야 하니 減死하여 嚴刑을 3次하고 絶島로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同年 成三特이 金福老味를 발길로 차서 第4日에 致死하게 하고 致死한 實因으로서는 被척으로 되었다. 道啓에 의한 刑曺의 回啓에 이르기를, 三特이 咨意로 족척한 후에도 또 그 上典의 勢力을 憑藉하여 이를 曝陽中에 結縛하여 두고, 매를 처서 坐死할 즈음에 昏窒하는 狀態를 立視하고도 거만하게 動念하지 아니한 事實은 常理로서는, 責할수 없드라도 그 上典이 酌配된 후에 있어서 招辭를 變更하여 上典에게 推위하는 情狀이 凶狡하므로 이를 特別히 同推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啓에 依하라. 甲辰年 刑曹에서 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남의 부엌에 들어 온다는 事由로 인하여 저의 近洞사람을 殺害하였으니 그 手勢의 慘毒함과 屍帳의 傷損은 자못 餘地가 없고, 酒店에 火爐를 設置하는 것은 顧客을 맞아 들리는 資料인즉 福老味가 담배불을 붙첬다는 것이 그 무슨 죽을 罪이기에 公公然하게 주먹과 발길을 交加하여 臍脇의 傷害로서 第4日에 致死하게 하는가, 제아무리 百端으로 粧說하고자 할지라도 어떻게 償命의 律을 免하겠는가, 元犯인 上典 朴義揆는 豪奴를 놓아 屬民을 毆打하고 結縛하고도 不足하여 推撻에 이르게 하고 成獄하는 날에 있어서는 敢히 집을 비우고 逃亡하였으니, 비록 造謀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原謀임을 免하기 어려운 일이나 이미 6次의 嚴刑을 받고 또 1000里에 遠配되었으니 이는 그만 勿論하고라도, 三特이 義揆를 指告하는 것은 推誘하는 底意가 顯著하니 이는 實로 風化에 關係되는 일인지라, 이 한 일만 하드라도 罪上添罪라 할 수 있는 것이니 三特은 아직 依前 同推하라 하였다. 庚戍年 別諭內에 이르기를, 술병 속에 술이 없었으니 이미 賣買한 것도 아니며, 부엌에서 담배불을 붓치었다는 것도 元來 罪되는 것이 아니였으나 남의 집을 함부로 들어 왔다 하여 먼저 爭端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三特의 作俑이니 생각컨대 廊奴란 것은 조그만한 일로 인하여 忽然한 그 上典에게 醜辱이 加하게 되면 그 犬馬의 精誠에 있어서는 宜當 응전지축(매가 새를 쫓는 것)을 본 받는 것이나 그래도 憤을 참고, 처음 下手하지 아니 하다가, 朴哥를 잡아 들이라는 分付가 있음에 비쳐서 金漢이 卽時 結縛하지 아니한 후에 비로소 揮척하였으니 그의 휘척이 비록 上典의 威勢를 憑藉한 所行이라 할지라도 또한 私毆에만 돌릴 수 없고 또 應伊金에게도 同時에 족척을 加하였다는 것은 死者의 입에서 나온 말과 屍親들이 納招한 말이나 지금 引證할 階梯가 끊어지고, 疑晦에 屬하는 일이므로 畢竟 朴哥를 牢囚하여 맹태하는 것도 또한 이러한 事由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金漢의 致死가 이 3囚에 緣由한 것이나 3囚中에서 만약 그 首臣을 區別하고자 한다면 不得不 三特에게 돌려야 할 터이나 大體로 이를 論한다면 그 區別이란 것은 懸殊한 差가 없으니 또한 放送하라고 하였다. 2年 陽城 洪召史는 그 男便을 死別하고 寡婦로서 守節하던차 隣人 朴世永이 洪女를 潛奸하여 孕胎하였다는 말을 到處에 傳播하였다. 洪女夫의 兄인 金炯洙가 世永을 詰問할 즈음 洪女가 몽둥이로 毆打하여 致死하기에 이르렀다. 洪女는 自己가 杖打하여 죽었다고 自服하였으나 屍親들은 炯洙가 結縛하여 頭部를 僕打하였기 때문에 致命한 것이라 하므로 炯洙는 3次 同推에서 杖斃하였다. 이에 洪女가 變招하여 말하기를 집에 80老姑가 있고, 男丁으로서는 炯洙 한사람 뿐이며 이몸은 靑年寡婦인 여자인지라 살아도 또한 有益할 것이 없으므로 納招에서 自服한 것은 炯洙를 살리려하는 計劃이었으나 炯洙도 지금은 이미 死亡하온지라 이 몸은 한 女人으로서 어찌 男子를 打殺할수 있겠는가 하였다. 道臣 鄭尙淳의 結辭에, 世永은 壯健한 男子이니 어찌 앉아서 兒女의 犯打를 받을리 있겠는가, 이는 炯洙가 當然히 元犯이나 지금 이미 致斃되었으므로 死者의 寃情은 伸雪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한사람의 致死에 2人을 償命함은 欽恤하는 道理가 아닐 것이므로 愚見을 陳附하여 睿覽에 供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洪女가 老姑를 念慮하여 元犯으로 自當한 것은 오히려 倫理에 떳떳한 心情을 볼 수 있으니 次律로서 酌處하라 하였다. 〔補〕 同年 振威人 柳光義가 柳敏和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鄭尙淳의 査啓로 인한 本曺判書 鄭光漢의 回啓에, 이 獄事는 當初의 爭端을 이르킨 것은 喪葬을 禁斷함에서 나온 것이나 傷處인 腦後와 腎 은 비록 要害에 屬한다 할지라도 腦後에는 皮脫에 不過하고 腎 에는 처음부터 浮氣가 없었으니 이로서 致命의 原因으로 돌리기는 不可한 일이거늘 하물며 敏和는 서로 싸운 후에 當日 30里나 되는 官門에 까지 걸어 갔고 山地를 摘奸할 때에 또 徒步로서 따라 다녔다 하니 그 傷處란 것이 처음부터 大段하지 아니하였음은 이에 의하여서도 可히 알 수 있는 일이며, 本村에 여역(傳染病)이 大流行하여 死亡이 繼續되는 狀態라 함은 各人의 招辭에도 말 한바 있고, 그의 子도 또한 말하기를, 그 父가 病으로 누었을 때 別로 庠痛處는 없었으나 다만 頭痛과 吐血이 있었을 뿐이라 하였으니 이는 여역의 通常症狀이요, 또 그를 殮屍한 柳光陳도 傳染되어 죽었다 하니 光義가 말하는 敏和의 致死는 染疾이라는 것은 可據가 없는 것이 아니며, 傷處가 이미 致死할 수 있는 緊痕이 아니고 또 病症이 여기의 流行이니 이는 實로 獄情에 疑心스러운 일이며 道臣이 이르는바 償命하기로 斷定한다는 것은 마침내 너무나 差違된 일이라 함은 진실로 意見이 있는 말이므로 輕典을 施行하는 것이 妥當할 줄로 생각하오나 殺獄은 사체가 所重하므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大凡 殺獄이란 것은 마땅히 審愼을 加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지경에서도 살릴 方途를 求하는 것인데 이 獄事의 要點이 마침내 差違된다 하니 當初의 起疑한 것도 이때문이며, 道臣과 該曺의 啓奏와 果然 意見이 있는 일이니 이에 의하여 減死하고 律에 비추어 定配하라 하였다. 〔重補〕 3年 平壤 高萬謙과 高斗雲이 啓錄에 들어 있다. 이는 英宗辛已年에 書齋訓長인 金守漢의 妻 宋召史가 守漢이 入城하든 날 밤에 사람에게 打刺되어 書齋앞 들보위에서 죽어 있고, 또 그가 갖던 돈 60兩을 잃었으며 守漢과 宋召史는 일찍 萬謙과 斗雲에게 怨恨이 있는 터이라, 드디어 이 두 사람이 共同 殺害한 것으로 告官되어, 被囚된 후에도 守漢의 偵告로 인하여 萬謙의 피묻은 바지를 그 妻가 이웃집 우물에서 洗濯하므로서 萬謙의 證案으로 하였으나 萬謙으로서는 그 妻가 解産할 때 묻은 피라하고 또 宋召史가 殺死하든 날 밤에 斗雲의 집에는 마침 來客이 있었으나 斗雲이 同宿하지 아니하고, 밤이 깊어서 出門하여 그 翌日에 돌아 오므로서 斗雲의 證案으로 하였으나 斗雲으로서는 妾의 집에 往宿하였다고 하였으며 癸未年에 高萬謙의 妻 崔召史와 斗雲의 妻 李召史의 上言으로 인하여 行査하였다. 監司 鄭弘淳의 査啓에, 平日 嫌怨이 있는 사이에 萬謙의 피묻은 바지(袴)가 나온후는 비록 그 妻의 解産時에 묻은 것이라 할지라도 殺人으로 指目된 집에서 이러한 近似한 증物을 잡았으며, 斗雲은 마침 그날 밤에 집에 있지 아니하고, 忽然히 守漢의 집에서 殺變이 있었으니 事理로서 論하면 萬萬 疑心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두 召史가 男便을 위하여 訟寃하는 것은 일의 虛實을 莫論하고, 그 理致만은 當然하도다, 슬프다 이 世間에 이러한 夫婦가 없지 아니하니 만약 그 願을 따른다면 殺人한 者는 장차 償命하지 못하리로다. 대제 이 事件은 守漢의 妻에 있어서 無人獨宿하는 밤에 그러한 證參이 없으니 기둥(柱)에 묻겠는가, 들보(양)에 묻겠는가, 정말 殊常한 일이로다. 盜賊이라고 하려하여도 이미 戮殺되고 偸監한 物品을 보지 못하였으니 盜賊이 아님을 可히 알 수 있고 守漢의 招辭는 비록 이와같다 할지라도 萬謙과 斗雲도 또한 사람이니 어찌 若干의 돈으로서 數十箇의 笞刑을 받고 참아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미 盜賊이 아니라 하드라도 또 이 두사람의 所行이 아니라고 한다면 장차 鬼神들의 所爲로 돌리겠는가, 또 守漢의 妻는 이미 늙었으니 결코 밤을 타서 劫奸으로 인한 被殺된 경우도 아닐 터이니 文案을 보고 本事를 硏究하건대 學童들을 驅逐하였다는 것이 疑端의 하나이요 같이 入城하지 아니하고 그날 밤 뒤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疑端의 둘째이고 그 바지를 뒤집어 입었다는 것이 疑端의 셋째이며 그 바지를 藏匿하도록 付託하였다는 것이 疑端의 넷째이며, 그 바지를 우물에서 洗濯하였다는 것이 疑端의 다섯째이로다. 殺人할 때에 아무리 看證이 없다 할지라도 이 다섯가지 學童들의 招辭와 時永·益大의 招辭와 萬謙의 妻와 妻弟의 招辭가 모두 隱建하지 아니하고, 血點으로서 보드라도 敢히 속일 수 있는 일인대 그 妻의 解産時에 묻은 피라고 稱託함은 더욱 無狀한 일이며, 檢官의 結辭가 그 事理를 俱體化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무엇을 또 調査한다는 것인가, 臧物을 갖인 萬謙은 依前同推하여 嚴重히 訊問하고 혹은 所犯이 있다 할지라도 加功에 不過할 터이나 1人의 被殺로서 2人을 刑推한다는 것은 審愼하는 道理가 아니며 萬謙이 이미 承款하였다면 스스로 그의 次弟가 있는 것이니 斗雲은 仍囚하여 結末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庚寅年 審理時의 監司 趙엄의 査啓에 宋女를 戮殺한 變이 半夜獨宿할 때에 나온 것이며 看證이 없으므로 正犯을 찾기 어렵고, 金守漢이 指告한 바도 疑似에 不過한 일이므로 特別히 見捉할 事實이 없으며 斗雲은 뒤에 떨어져 가지도 아니하고, 妾의 집에서 留宿하였다는 것은 비록 疑心스러운 일이기도 하나 이미 入城하기를 約束하고, 또 人客을 留宿시키었으니 반드시 이날 밤에 殺人하는 擧事를 낼리도 없을 것 같고, 萬謙의 피묻은 바지가 비록 이 獄事의 臧物이 된다고 할지라도 夜間에 行凶한 일이니 血漬가 있었다면 이들 燒火하거나 埋沒할 수 있는 일이며, 宋女가 被殺될 때에도 또한 失錢한 事實이 있었다고 하나 다만 60兩만 잃어 버리고, 그 나머지의 돈과 衣食은 모두 偸去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賊徒의 所爲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며 만약 萬謙과 斗雲이 怨恨을 품고 行凶한 것이라면 어느 餘暇에 錢兩을 竊偸하겠는가, 이 獄事는 처음부터 疑似한 發告로 인하여 마침내 廉探으로서 成獄하고 10年을 滯囚하여도 決折이 無期하니 實로 參恕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刑曹의 回啓에 피묻은 바지 하나만으로도 참다운 臧物로 볼수 있는 것이므로 依然同推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依允한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監司 金鍾秀가 錄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高斗雲은 이미 참다운 臧物도 없고, 또 疑端도 없었으나 滯囚한지 于今 19年이 되었으니 비록 結末의 判付를 기다리게 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또 結末을 기다리게 한다면 結末을 지울 期限이 없으니 特히 放送하라. 甲辰年 本曺에서 議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高斗雲의 一宵違約과 高萬謙의 血袴追現을 갑자기 본다면 果然 疑似한 일이나 詳細하게 硏究하면 한갖 애매한 일이며, 이를 重案으로 勒成한 것은 처음부터 看證이 없었으니 獄情의 事體로써 揆察할 때 이미 格式에 違背된 일이며, 生을 좋아하고 死를 싫어함은 사람의 常情인지라 兩人이 就囚되었으나 首犯과 從犯을 適分하지 못하고, 首犯은 죽게되고 從犯은 살게된다는 것은 그들도 아는 바이므로 서로 추위하여 死地를 圖脫하고자 함은 怪異한 일도 아닌 것이나 拷訊을 겪으면서도 一言을 相加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로서도 本來에 情實이 없었음을 可히 알 수 있으며, 深夜 空房에 적적하게 다른 사람도 없고, 弱한 女子와 壯한 男子가 서로 抗拒할 形勢도 못되는 것이니, 진실로 憾情을 풀고 財物을 奪取하고자 하였다면 刀刺와 追擊을 莫論하고 卽地에 行凶한 다음 從容히 거협하여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나 60銅만 가져가고, 남어지의 돈과 다른 옷가지는 돌보지도 아니 하였다는 것은 이미 極히 疑心스러운 일이거늘 하물며 書齋가 있는 곳은 앞에 村路를 臨하고 있으니 如干 大膽한 사람은 敢히 주온을 끌어내어 모든 사람이 往來하는 개천다리에서 作變하겠는가, 宋女의 致命이 방에서 된 것이 아니고, 개천다리에서 된 것이라고 하니 이 一款만으로서도 그 慢臟悔盜(곳간의 문단속을 잘하지 아니한 것은 도둑에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침과 다름이 없는 것)임을 可히 알 수 있고, 他人이 入室하므로 倉卒히 돈꿰미를 끄을즈음에 우연히 宋女의 警覺을 입어 쫓고 쫓끼어 高喊소리를 내게되고, 일이 急迫하게 되자 蒼黃하여 戮殺하게 됨은 必然의 形勢인지라 高斗雲의 放送한 후에 高萬謙을 지금까지 同推하는 것은 다만 血袴때문인 것이나 이미 洗濯되어 憙微하게 보인다고 하는 推官의 結辭는 이미 그 端的이 缺如하고, 1·2次 道啓에서 前後로 起疑한 것은 대개 廉問에 의하여 成案함은 獄體를 愼重히 하는 道理가 아니라고 한바 있으니 이 審理하는 날을 당하여 惟輕에 處하는 것이 欽恤의 典에 合當할 터이니 萬謙은 減死하여 定配하라. 同年 坡州人 曹允烋·允烈·允熟의 3兄弟가 그들의 10寸親인 曹允文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允烋의 招辭에는 이몸이 年長하므로 마땅히 元犯이 되어야 하고 兩弟를 돌려 보내 父母를 奉養하도록 하여주는 것이 實로 至願이라 하고, 允烈의 招辭에는 저의 兄은 이미 宗孫이며, 弟는 아직 未成長한 處地이니 이 몸을 元犯으로 定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고, 允熟의 招辭에는 누가 먼저 下手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이몸이 元犯에 自當하겠다고 하였다. 監司 鄭時仁의 結辭에 傷處가 狼藉하므로 더 疑心할 것이 없으나 死者1人에 三命을 報償한다는 것은 實로 過當한 일이며, 元犯을 밝히기 위하여 1日 同推한다면 畢竟 3兄弟가 杖下에 같이 죽고 말터이니 이는 聖朝 欽恤하는 德意가 아닐 것이므로 該曺로 하여금 稟處하기를 請한다고 하였다. 本曺判書 蔡濟恭의 回啓에, 한사람이 致死하였는데 3人이 元犯으로 自當하고 있으니 臣曺의 執法하는 處地로서는 矜惻한 일이기는 하나, 이로서 經典에 傳한다면 後弊에 關係되므로 다시 道臣으로 하여금 嚴重히 實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그 本情에 있어서도 可히 容恕할 만한 일이 있으니 特히 減死하고 本曺에서 議處하게 하라. 判付 蔡濟恭의 回啓에, 律文中 家人共犯條에 只坐尊長이라는 4字가 正히 이 獄事의 準備語이므로 이로서 允烋등 3兄弟를 輕重에 따라 酌處한다 하였던바 依允한다고 하였다. 同年 靑陽 處女 金召史 나이는 16歲, 그의 父 李灝를 위하여 북을 치고, 寃情을 呼訴하였다. 本道에 行査하도록 하였더니, 忠淸監司 李命植의 査啓에, 李春永의 죽음은 傷處가 狼藉하고 證左가 俱備하니 以灝가 毆打하여 致死한 것은 斷然 疑心할 수 없는 일이나 삼가 續大典을 살펴보건대 [其父被人毆打傷重 而其子毆 打致死者 減死定配]한다는 文句가 있으니 그렇다면 以灝의 傷命과 貸死는 오직 그의 父 尙德의 傷重與否에 있는 것이나, 尙德은 비록 피를 흘리고, 衣服이 破裂되었다 할지라도 別로 傷處가 없으니 傷重으로써 論할 수 없으므로 以灝를 死刑에 處하여야 함도 또한 斷然 無疑한 일이나, 但 金召史는 弱齡의 閨女로서 血書를 두 번이나 本縣에 呈訴하고, 세 번이나 臣營에 呈訴하였으며, 그 辭意가 至極히 悽切하고, 그 情狀이 至極히 可憐하여 人心을 感切하게 하므로 昨年 審理時에 諸官들도 또한 爲父에 屬하는 일이니 參恕하는 것이 妥當하다고 하였으나, 臣의 뜻으로는 情狀을 參酌하여 恕罪하는 것은 自上의 特恩에 屬하는 일이며 在下人으로서 敢히 仰請할 바 아니라 하여 傳生의 科에 處하지 아니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니 該曺로 하여금 稟處하기를 請한다고 하였다. 本曺의 回啓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直視 判付하여 이르기를, 向日 靑陽 童蒙女 金召史의 擊鼓하는 供辭를 듣건대 그 辭語가 至極히 悽切하고 情狀이 甚히 矜惻하므로, 그 前後의 詞案을 考閱하니 金召史의 呼寃은 진실로 人情에 當然한 事實이요, 律文內에 [其父被打重傷 而其子毆打其人致死者 感死定]라고 하였으니 以灝의 父는 나이가 80에 까까우면서 남에게 毆打되어 衣服에 피가 묻고, 子息이 急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傷重이 아니라 하겠는가 子息된 者로서 憤心이 充滿하여 猛打한 것은 異事가 아닌 일이니 비록 續大典에 減律하는 글이 없다 할지라도 이러한 獄事는 마땅히 參酌하여야 하고, 金女가 그 父가 非命에 죽게됨을 痛恨하여 손 가락을 끊어 血書한 것도 또한 5·6次에 이르렀다 하니 더욱 感動의 一端이 되는지라 金以灝는 減死하여 定配할 지어다. 〔補〕同年 載寧人 崔己特이 金召史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고 成獄되었다. 己特의 妻 金召史의 擊錚으로 인하여 本道에 行査하게 하였다. 道臣 徐有寧의 査啓에 이 獄情은 法으로서 被打로 돌릴 수 있는 것이 네가지, 情으로서 疑心되는 것이 한가지, 法으로서 未備한 것이 두가지인 바, 이 獄事의 음노과 飮糞이란 것은 이미 모두 落空된 事實이나 흉당의 傷處가 이렇게 分明하니 自手로 죽는다는 것은 반드시 이러할 리 없을 것이므로 이 情을 被打로 돌리는 것이 첫째이며, 看證 趙介山과 金光呂가 말하기를 己特이 돌로서 自打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傷處를 입힌 후에 나온 것이 아니고, 行檢할 때 처음으로 發說된 것이라 하니, 追後에 장선한 事實임을 可히 推測할 수 있으므로, 이 情을 被打로 돌리는 것이 둘째이며, 서로 爭詰한 후에 己特의 夫妻가 藥物로서 來勸하였다는 것은 공겁한 狀況을 掩避할 수 없음이 昭詳한 事實이므로 이 情을 被打로 돌리는 것이 셋째이며, 看證의 두 사람이 그 머리를 움켜쥐고 가슴을 차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말하므로 이 情을 被打로 돌리는 것이 넷째이며, 解産한지 10餘日밖에 안되는 女人이 憤김에 一馬場이 되는 地域을 往來하고 때마침 劇炎을 當하였으니 더위를 먹고 促命한 것도 또한 異事가 아닐 터이나 傷處가 이와같이 狼藉하니 被打된 것 외에는 달리 말할 道理가 없으되 旦 잠깐동안 갔다 와서는 卽地에서 致死하였다고 하니 1分의 疑端이 없지 아니하므로 이로써 그 情이 可히 疑心스럽다는 것이 하나이며, 屍體을 檢按함에 있어서 물에 적시어도 그 方向을 찾지 못하므로 檢案이 詳細하지 아니하니 이는 法의 未備한 것의 첫째이며, 看證들이 쫓아 갔었는데 다만 머리를 움켜쥐고 가슴을 쳤다는 말을 들었어도, 머리를 꺼두르면서 가슴을 치는 擧措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는 法의 未備한 것의 둘째인지라, 그 欽恤하는 道理에 있어서 遽然히 償命하는 科에 處함은 不可할 것 같으므로 該曺로 하여금 稟處한다 하였다.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이 獄事는 疑晦가 多端하여 한번 行査, 두번 行査 3次·4次에 이르렀으되 傷處로서 말한다면 屍執 金贊先의 前招에서는 己特이 흉당을 발로 밟았다고 하나 無寃錄에 (頭額 拳手脚足之撞打傷損者 척흔방원]이라고 하였는데 屍帳의 傷痕이 方圓하지 아니하고, 길이가 7寸이 넘는다 하니 이는 無寃錄과도 이미 符合되지 아니하고, 滴水하는 方法도 또한 法대로 하지 못하였다 하니 初·複檢의 實因이 果然 得當한 지 알 수 없으며 看證으로서 말한다면 李召史의 前招에서는 다만 金女가 發惡하는 것은 보았어도 己特이 犯手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今番 行査할 때의 招辭에서는 金女가 제대로 부딛치고 제대로 打僕한 것이라 하고, 介山과 光呂등도 또한 被打한 事實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看證의 招辭들도 또한 可據할 수 없도다. 대저 金女는 分娩한 뒤에 澣濯에 觸冷되고, 투공한 肄氣로서 더움을 무릅쓰고 往返하면서 胸腹의 煩悶을 이르켜 서늘한 糞汁을 妄腹하였으니 그 致命한 所由가 어찌 이러한 病禁에 있지 아니한 줄 알겠는가, 情으로서 疑心스럽다는 것과 法으로서 未備하다는 것은 진실로 按獄하는 道理를 會得함이니 이를 一向 加刑한다면 審克하는 政事가 아닌 것이나 獄體 至當하므로 敢히 專斷하지 못하고 이에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覆啓의 所論이 甚히 明的하니 次律로서 酌處할지어다. 〔補〕同年 豊川人 李中阿只가 胸德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徐有寧의 錄啓로 인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實因에 목이 뿌러졌다는 것은 자못 明白한 事實이 못되나 卽日에 致死하였다는 것은 實로 疑晦되는 일이며, 下手에는 비록 先後가 있다 할지라도 用力에는 마땅히 緊歇을 區分하여야 하는바 後徵은 加功으로서 徑配되고 李女를 正犯이라하여 拷訊하고 있음은 實로 알 수 없는 일이며, 再檢에서 承款하였다고 하나 그 夫에 歸罪하고자 아니한 것은 一般의 떳떳한 論理가 未泯함을 볼 수 있으나 獄體가 至當하므로 敢히 專斷하지 못하고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中阿只는 그 夫와 同時에 用手하였으니 正犯을 핵득함에 있어서 진실로 疑晦되는 일이나 首臣의 判別을 詳愼하지 아니하고, 該曺에서 핵啓하도록 하였으니 當初에 完結한 道臣은 그 率爾한 責任을 免하기 어려운 일이니 該道臣은 罷職할지어다. 〔補〕同年 文化人 孔德貴는 李道水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고, 海州人 車福伊는 金彭壽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徐有寧의 稟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孔德貴는 全亦好가 이르는바 이 사람들의 招辭와 같다 함은 全然 明確한 일이 아니므로 疑晦가 많으며, 屍親의 招辭 가운데 道水가 臨死힐 때에 明白하게 孔哥를 指的하였는데 어찌하여 初檢때에는 發告하지 아니하고 覆檢할 때에 와서 追告하는가, 道臣의 結辭中 德貴의 積怨을 村人들이 甘心하기 때문이란 것은 진실로 所據가 있는 일이니 이 審理하는 날을 當하여 欽恤의 典을 施行함이 合當할 것이며, 車福伊는 분조하는 場所는 萬人이 다 보는 터이나 被打할 때는 한 사람의 立證도 없다함은 이미 疑心스러운 일이나 혹은 葬禮에도 參會하고 혹은 祭禮에도 參席함이 7·8日의 行動일뿐 아니라, 色態가 紫암하고 微紫하다는 것도 또한 初·覆檢이 서로 틀림을 알 수 있고 道臣의 起疑와 論列은 진실로 按獄하는 道理를 會得한 것이나 獄體가 至重하므로 專斷하지 못하고 上裁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證據가 모두 不備하고 情狀을 보아 容恕할 수 있는 일이니 모두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同年 咸興人 金守天이 朴春成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趙 瑗의 錄啓로 인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實因으로서 論한다면 前後 4檢을 施行한바 2檢에서는 모두 因病으로 懸錄되고, 4檢에서만 홀로 피척으로 懸錄되었으니 3檢까지 없었던 傷處가 4檢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두복의 堅硬이 1尺5分에 이른다 하니 그 傷處가 果然 이와같이 狼藉하다면 初·3檢의 檢狀中에 決코 擧論하지 아니할리 없을 것이며, 春成의 致死는 2月初4日에 있었으며 4檢은 同月 9日에 있었다고 하니 9日間에 屍體가 變動되었을 터이나 檢官이 억지로 그 傷處를 찾아 成獄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正犯 守天의 供述한 바를 보드라도, 傷處는 비록 10年後라 할지라도 쇠로써 찔러도 처음에는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인데 이를 손가락(手指)으로 만저보고 처음 堅硬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때의 同推官이 즉 4檢官이었으나 또한 問目을 發하여 取招한 事實도 없었으니 傷處가 처음부터 明的하지 아니함은 可히 알 수 있으며, 詞證으로서 論한다면 모두 毆打한 事實은 보지 못하였다고 같은 말로서 納招하고 千昌國의 3檢時 招辭에는 守天이 집으로 돌아온후 春成이 담배도 피우고, 冠도 쓰고, 擧止가 泰然하였다고 하였으며, 朴元根의 4檢時 招辭에는 大便은 血食한 糞物과 같고, 小便은 血和한 色相과 같았다고 하였으니 初·覆·3檢때에 어찌 發告하지 아니하고, 4檢때에 비로소 追告하였는가, 그 모든 事端의 열조임을 可히 알 수 있으며, 本事件은 至極히 微妙하고, 疑端은 하나가 아니었으나 5年을 滯囚하여 131次로 受刑하게 하였으니 이 審理日을 當하여 輕典을 施行함이 合當할 터이나 옥체가 至重하여 敢히 專斷할 수 없으므로 이에 上裁를 바란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獄情으로써 論하고, 屍帳을 參酌하면 可恕할 端緖가 없지 아니하며 參핵官과 道臣의 審理結辭 그리고 本曺의 議啓가 다같이 明白하니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 同年 南原人 金禮孫은 文厚孫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고 長興人 李夢龍은 劉召史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鄭元始의 稟啓로 인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金禮孫에 있어서는 初檢의 實因은 被打로 懸錄되고, 覆檢의 實因은 피척내상으로 懸錄되었으니 만약 被打라고 한다면 이런 程度의 傷處로서는 決코 致命할리 없고 만약 被척內傷이라고 한다면 이미 피척된 痕跡이 없는데 어찌 內傷할리 있겠는가, 兩檢官이 懸錄한 實因은 모두 的當한 것이 아니며, 初檢官 南原前府使 宋載德과 覆檢官 雲峰前縣監 李 서의 報告한 바에 혹은 染病후 完快하지 못한 것이라 하고, 혹은 覆檢時에 實因을 誤錄한 것이라 하고, 道臣의 結辭에는 無寃錄의 內傷條를 考據하니 진실로 詳備된 일이므로 參酌함이 適合한 일이라 하였고, 李夢龍에 있어서는 順奉과 毛乃金은 다같이 劉女의 子息들이며, 母讐를 報復하기 위한 心情은 兄弟가 다를리 없는 것이나 順奉을 告官하든 날에 毛乃金이 檢屍處에서 自活하였다 함은 반드시 所以가 있는 것이며, 그의 妹 升業이 이미 順奉을 指名하기로 서로 傳하였다고 하니, 順奉이 어찌 이미 이름을 듣고 憤情이 쌓인 夢龍을 버리고, 도리어 그 이름도 듣지 못하고 寃情이 없는 東柱와 東尙을 告하였겠는가 또 劉女가 升業에게 말한 것은 다만 싸웠다 하고, 毆打를 當하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으면 被打되는 一款은 이에서 落空되는 일이며, 毛乃金의 招辭에 그 母가 原來 술을 좋아하여 매번 市場으로 가서 혹은 路邊에 醉臥하기도 하고, 혹은 淆渠에 醉倒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屍帳中의 許多한 傷處는 決코 劉女가 醉後에 顚 한 所致일 것이나 道臣의 結辭中 醉飽死에는 看證이 없다는 말과, 그 傷處를 調査할 때에 尺量이 不實하였다는 것은 깊이 獄情을 會得한 것이므로 經典을 施行함이 適合할 터이나 獄體가 至重하여 敢히 專斷할 수 없으므로 아울러 上裁를 바란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金禮孫은 情과 法으로서 參酌하면 마땅히 經典에 傳하여야 하니 次律로써 酌處하고 覆檢官 雲峰南縣監 이 서는 檢狀의 實因을 처음부터 이미 格式을 違反하여 重疊으로 記錄하였다가 遞職할 時期에 臨하여 이를 分類함은,[款巧反拙]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殺獄의 體段이 얼마나 至重한 일인데 저 敢히 數年동안 제 마음대로 傳生傳死하였음은 至極히 慌亂한 일인지라 拿問하여 定罪하고 李夢龍은 이 文案을 보건대 오직 輕典에 傳하기를 論함은 이미 所據가 있으니, 또한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同年 泗川人 金成重이 朴聖文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在簡의 稟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屍帳의 傷處는 비록 한 두군데가 아니라고 하나 實因의 致命處가 마침내 的確하지 못하고 腎囊의 色相이 붉다는 곳이 果然 要害에 屬하기는 하나 이미 浮高한 痕跡이 없으니 이로서 被척으로 돌리기도 不可한 일이며, 이것이 果然 피척된 것이라면 마땅히 15日이나 延拖할리도 없을 것이며 臍 의 초궤처가 1尺5分이나 길다고 하니 이것이 가장 深重한 傷痕에 屬하는 일이나, 屍親 李召史의 招辭에 平日에도 腹痛이 있어서 6次나 소금으로 찜질한바 있었다고 하니 이도 또한 被척致死로 直歸할 수 없는 일이며, 本事件은 戱劇에서 일어 났고 傷處도 또한 分明하지 못하므로 道臣의 參酌論이 진실로 意見이 있는 일이나, 獄體가 至重하여 敢히 專斷할 수 없으므로 이에 上裁한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道啓와 本曺의 의언이 모두 得當하니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同年 禮山人 元大哲이 張旬丁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李明植의 錄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屍帳의 傷處로서는 卽地致命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 같으며 前後에 顚沛하였다는 狀況은 屍親들의 招辭가 丁寧할뿐 아니라, 旬丁이 비록 老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大哲이 손으로 떠밀고, 발로 차지 아니하였드라면 14日 官家에 가서 告發하고 16日에 無端히 殞命할리는 決코 없을 터이니 이는 傷處가 深重하지 아니하다는 事由로서 傳生으로 輕議할 수 없는 일이므로 依然 同推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本曺의 回啓는 비록 守徑하는 뜻에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 獄案을 閱覽하니 償命하는 科에 直歸함은 자못 審克하는 道理가 아니니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同年 抱川人 崔孝大가 凡金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李鎭衡의 稟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推官으로서는 咽喉는 緊急에 屬하는 것인데 어떻게 4·5日을 끄을 수 있겠는가 하여 이를 疑端으로 하고, 道臣으로서는 初·覆·3檢의 實因이 模糊하다는 것으로서 起疑하고 있으니 咽喉는 비록 緊急에 屬한다 할지라도 5日만에 致命한 것은 許久하게 延拖되었다고는 할 수 없고, 初檢의 實因은 先病後打한 것으로 懸錄되고, 覆檢 不得已하여 被打된 것으로 懸錄되고, 3檢에서는 被傷으로 懸錄된 것은 모두 모호함을 免할 수 없으나 이러한 失責은 檢官에 있는 것이며, 以上의 兩條로서는 모두 이 獄事를 傳生하게 하는 端緖로서는 不足한 일이며, 孝大는 이미 一打하였다고 自服하고, 또 私和하였다고도 自服하였으며, 閔揷沙里의 所供中에는 無病한 者가 重한 毆打를 當하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5日만에 卽死할리 있겠는가 한 것은 진실로 이 事件의 的證이라 할 수 있으나 獄體가 至重하여 이로서 低仰할 수 없으므로 依然 同推하기를 請한다고 하였다. 判付內에 이르기를, 秋官이 의언하는 뜻은 비록 守法에 있다 할지라도 그 本情을 參酌하면 參重할 道理가 있는 것이니 次律로써 酌處할지어다. 〔補〕 同年 平海人 黃師憲이 黃召史를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李亨逵의 稟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好仁의 回啓에 師憲이 行凶한 情節은 더 疑心할 것도 없고, 그 母 李召史가 설혹 犯行한 바 있을지라도 師憲으로서는 마땅히 어버이를 위하여 隱諱하여야 할 터이나 그 母가 自縊한 후에 있어서 3·4차 打시하였다는 말을 引用하여 저의 自脫을 꾀하고자 하는 것을 本罪外에도 원래 人理가 없는 것이고, 또 그 子가 말하지 아니한 말을 引用한 것은 節節이 巧惡한 일이니 道臣은 비록 母子幷命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情法을 參酌하면 輕典으로 傳生하기는 不可한 일이므로 依然 同推하기를 請한다고 하였다. 判付內에 이르기를, 法意로서 論한다면 비록 可恕할 道理가 없다 할지라도 母子를 幷命하게 된다는 事實에 있어서는 혹 後輕할 수 있는 一端이 되는 것이니 次律로써 酌虛할 지어다. 〔補〕同年 鎭川人 林卜得이 鄭一卜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李命植의 査啓에 이 獄事의 實因이 보록 被打로서 懸錄되었다 할지라도 傷處가 그렇게 緊重하지 아니하며, 一卜이 卜得이와 싸운후에 如常하게 步行하여 官家에 들어가서 發告까지 하였다고 하니 처음 被打할 때에 甚하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疑心되는 바로서는 再鬪與否에 있고 지금 更査하라는 判付에 의하여 一卜 妻 金召史와 罪人 卜得을 臣營으로 捉致하고 問目을 發하여 取招하였더니 一卜의 妻는 果然 再鬪한 事實은 있었으나 居處가 隔離하고 房舍가 幽深하므르 被打의 有無는 詳細히 알 수 없다 하고, 卜得은 原來 再鬪한 事實도 없고, 또 毆打한 事實도 없다라고 如前히 納招하므로 疑心되는 端緖를 拈出하여 反覆監問하여도 兩人의 陳述이 한결같이 如前하니, 卜得의 招辭는 비록 準信할 수 없다 할지라도 果然 一卜의 妻의 陳述과 같이 참으로 再聞한 事實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같은 乘憤亂鬪로서 大段한 毆打가 있었을 터인데 그의 妻가 이미 隔離한 집에 있으면서 듯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리 없을 것이며, 혹 重打를 當하여 聲音을 通할 수 없었다면 卽刻 致命할 사람이 步行으로 그집에 까지 돌아올 수도 없었을 터이며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再鬪란 事實도 또한 그 屍親의 말만을 믿을 수 없으나 再鬪 與否를 莫論하고 이미 被打된 的證과 傷處의 緊重이 없음에도 一卜이 忽地에 殞命한 것은 實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다만 初次에 一時의 相鬪로서 償命하는 科에 直驅함은 愼獄하는 道理가 아니므로 昨年 겨울 審理할 때에 論啓한 바도 있었으며, 지금 更査하는 날에 있어서 多角度로 究詰하여도 再鬪 被打된 사실이 이미 分的하지 아니하고 致命한 根因도 또한 指的하기 어려운 일인즉 一卜의 致死를 卜得의 毆打에 돌린다는 것은 마침내 獄事를 詳審하는 道理가 아닌 것이며 前日 陳附한 外에 別般 究竟할 端緖가 없으므로 該曺로 하여금 稟處한다 하였다. 本曺의 回啓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곧 判付하여 이르기를, 대저 이 獄事는 本來 疑晦한 일이로다. 正犯으로서는 元來 毆打한 事實이 없었다 하고 屍親으로서는 再次 毆打를 當하고 殞命하게 되었다 하여 서로 稱寃하므로 正犯이 이때까지 傳生의 典을 蒙施하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로다, 向日 審理時에 刑曺의 覆啓에서 更査하도록 命하기를 請한 것은 비록 愼獄하는 뜻에서 나온 일이기는 하나 道臣의 論啓가 또 이같이 丁寧하고, 그가 혹 重打를 당하여 聲音을 通할 수 없었다면 구각에 致死할 사람이 決코 그의 집까지 行步하여 돌아갈 수 가 없었을 것이고, 또 再鬪로 被打되었다는 事實도 分明하지 못하고 致死한 根因도 또한 指的하기 어려우므로 一卜의 致命을 卜得의 毆打에 돌림은 獄事를 詳審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 獄情을 審克하는 道理에 있어서 酌量하는 것이 참으로 [罪疑惟輕]인 것이니 特히 減死하여 次律로서 決配할지어다. 〔補〕同年 文化 朴世奉이 趙 奎를 칼로 찔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徐有寧의 稟啓에 지금 이 正犯 金德甫의 이르는 바 朴世奉·閔龍一·저가 同行하여 혹은 趙 奎를 刺殺하고, 혹은 손을 잡았다고 하며, 參見한 者의 말하는 것도 모두 公證이 아니고 또 屍親들의 發言이 없는데 다만 德甫가 死中에 求生하는 말 만을 憑信하고, 이를 同犯殺人이라고 하는 것은 獄體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臣이 직접 訊問하여 본즉 閔思亨은 처음 그의 子 龍一과 世奉은 元來 趙 奎·德甫와 同行한 事實을 參見한바 없다고 말하고 德甫는 저로서는 손을 잡았고, 世奉은 刺殺하고, 龍一은 參見하였다고 發告하였으나 事實上 看證이 없으므로 父子가 같이 杖刑을 받게 됨에 출겁함을 이기지 못하므로 龍一을 圖脫시킬 計劃에서, 果然 龍一을 指揮하여 參見으로써 納招하게 하고, 世奉을 광유하여 손을 잡았다는 것으로써 供述하게 하였으나, 實은 世奉과 龍一은 처음부터 同行한 事實이 없었다고 하니 대개 世奉이 脫空하는 證은 여섯가지 疑心스러운 端緖는 두가지가 있으며, 思亨이 子息의 圖脫을 위하여 반드시 世奉을 誣陷하고자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世奉의 曖昧함을 極稱하고 있으니 이것이 脫空되는 明證의 첫째이며, 世奉과 龍一이 이 獄事에 于犯하였다면 世奉의父 萬奎와 龍一의 父 思亨이 반드시 이 獄事를 摘發할리 없을 것이요, 피 묻은 刀子를 그 屍體 옆에 露置할리도 없었을 터이니 이것이 脫空되는 明證의 둘째이며, 世奉과 龍一이 이미 德甫와 讐怨間이라면 德甫가 이들을 干犯으로 指摘하여 報復하고자 發告할 뜻은 明若觀火한 일이니 이것이 脫空되는 明證의 셋째이며, 所奪한 物貨는 全部 德甫에게 돌려 보내고 世奉에게 있지 아니한 것도 또한 脫空되는 明證의 넷째이며, 비록 世奉이 思亨을 仇嫉하는 心情으로써 오히려 龍一을 曖昧하다고 할지라도 龍一이 가지 아니하였으면 世奉도 가지 아니한 狀況도 또한 그中에 있을 것이요, 果然 龍一과 同行하여 참으로 世奉이 戮殺하는 擧事를 보았다면 반듯이 實狀대로 直告하여 刑을 免하고 脫出하였을 것이나 屢次로 刑訊을 받으면서도 始終 忍杖하고 있으니 이것이 脫空되는 明證의 다섯째이며 비록 德甫의 發明하는 招辭를 보드라도 저는 손을 잡았고, 世奉이 刺殺하였다 하는 것은 그 뜻이 손을 잡았다는 律은 隨從에 不過한 것으로 알고 發狀한 子와 父를 援引하여 逞憾할 資料를 만들기로 한 것이 十分 無疑하니 이것이 脫空되는 明證의 여섰째이며, 所謂 疑心스럽다는 2條에 있어서 손을 잡았는 말은 비록 世奉의 自招에서 發說되였다고 할지라도, 思亨이 이미 世奉은 曖昧하다고 誣招하였음을 自服하였으니 所謂 손을 잡았다는 말은 스스로 落空되는 것이며, 德甫가 誣陷한 情狀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나 但 頭面을 亂刺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두 사람의 犯行인데 世奉을 脫空한다면 한 사람의 歸屬시킬 사람이 없고, 德甫도 이미 斃死되였으므로 또한 憑問할 곳도 없으니 이미 世奉은 犯行한바 없음을 안다면 어찌 한갖 獄事의 究竟을 위하여 虛實을 分別하지 아니하고 이 無辜한 殘民을 償命하는 罪科에 끌어 넣겠는가, 대저 世奉이 손을 잡았다는 事實을 自招한 後에 前後의 推官들이 쉽사리 議處하지 못하고 있으며, 6條의 證處도 마츰내 解釋하기 어려운 疑端이 있으므로 이를 돌려가면서 閔思亨을 핵문한바 있고, 思亨이 誘人自誣한 事實과 世奉이 被誣抵罪한 事實은 酌處할 道理가 있으므로 稟處하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本曺判書 鄭仁好의 回啓에, 世奉과 龍一등이 처음에는 德甫와 同行한 事實이 없었다고 納招하고, 3次 同推에 이르서는 世奉은 손을 잡은 것으로 供述하고, 龍一도 또한 參見한 것으로 말하였다가 지금에 와서는 또 思亨에게 誘引되어 中間에 거짓으로 供述하였으나 實은 德甫와 같이 간 事實이 없었다 하여 세 번이나 그 招辭를 變更하고, 反覆되는 말을 하고, 道臣의 6條論列에는 意見이 없는 것이 아니나 5年을 同推하여 이미 錄啓를 지낸 후이니 지금 一時의 變招로서 문득 酌處하기를 論議할 수 없으므로 依然 엄핵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道臣의 論啓가 이미 意見이 있는지라 진실로 可生할 道理가 있다면 어찌 刑推만을 거듭하고 곧 釋放하기를 參酌하지 아니하는가 그 民命을 重하게 하는 道理에 있어서 傳生의 典을 施行하여야 하니 特히 減死하고 律에 비추어 定配할지어다. 〔補〕同年 廣州人 李於仁老味가 黃時奉을 毆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 鄭昌聖의 査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尙淳의 回啓에 當初 時奉이 怒氣를 띄고 떡을 차버리므로 李斗尙이 말로서 그를 責하면서 코를 때렸고, 於仁老味가 삽죽으로써 一打한 것은 그들이 終爭을 解決하기 위함에 不過한 것이니 이는 힘을 다하여 毆打한 것과는 差間이 있고 一打한 傷害가 만약 致命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면 被打된 翌日에 市場과 洞契에 그 어찌 徒步로 行할 수 있었으며, 또 傷處로 말한다면 覆檢의 傷處로서는 비록 初檢과 略干 重의 別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柔軟하고 微硬하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서는 致命할 수 있는 傷處로 볼 수 없으나 道臣의 所論中 屍親들이 이미 辜限內의 殺害임을 緊援하므로써 檢官들이 意見을 自立하지 못하고 억지로 實因을 記錄한 것이라 함은 意見이 있는 말이며 獄情을 참구하면 原怒할 端緖가 없지 아니하고 그 傷處를 보면 또 必死할 程度가 아니므로 그 獄情을 審愼하는 道理에 있어써 輕典에 傳함이 妥當할 터이나 獄體가 至重하여 敢히 專斷할 수 없으므로 이에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그 獄情을 究理하면 傳生하는 길이 있으니 道臣으로 하여금 곧 減死하여 定配할지어다. 〔補〕同年 仁同人 金聖涵이 金萬金을 杖打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在簡이 監司로 있을 때의 査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尙淳의 回啓에 萬金은 이미 負債가 있으면서도 이를 갑지아니하고, 債金條로 奪去한 곡식도 官에 告하여 도로 찾어 갖으니 聖涵은 土豪의 勢力으로서 發憤한 나머지 杖打하는 것은 必然의 形勢일 것이며 萬金이 杖打를 當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23度의 杖打를 받았다는 뜻을 分明히 그 妻에게 言及하고 屍帳에는 左右의 臀部에 傷處가 狼藉하니 설혹 聖涵의 供述과 같이 鄕廳과 官家에서 비록 먼저 杖刑을 받은 事實이 있었다 할지라도 別監 張必亨의 招辭中에 元來 萬金을 推捉한 일이 없었다 하고, 屍親들의 招辭中에는 두번이나 官家에서 合計 8度의 杖刑을 받았다고 하니 비록 供述한 바와 같다 할지라도 死後의 傷處가 이같이 大段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萬金이 生前에 말한바 있는 聖涵에게 23度의 被杖說이 거짓 아님을 可히 알 수 있고 聖涵의 杖打로 인하여 致命되었음은 明白無疑한 事實이며, 그때 執杖하던 奴 成乭이 逃亡한 것도 또한 杖打의 一贓이나 지금에 와서 査問한다는 것은 以奴證主의 嫌義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저의 主人을 위하는 道理에 있어서도 또 어찌 吐實할리 있겠는가, 成乭이 供述하는 바의 虛實은 論할 것도 없거니와 昨年 겨울 審理할 때와 오늘의 査啓中에서 道臣은 비록 傅生할 뜻으로서 論列한바 있으나 看證과 鄕任의 招辭가 이같이 丁寧하고 初·覆檢의 被杖痕跡이 또 이같이 緊重하니 殺人에 대한 償命은 三尺이 至嚴하여 輕議에 傅할 수 없으므로 依前 同推하기를 請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向日 審理할 때에 이미 傅生하고자 하였으나 좀 더 두기로 한 것은 償命을 重히하고, 獄情을 審愼하는 뜻이며, 또 道臣의 査啓를 보니 그 論列한 바 意見이 있고 惟輕할 뜻으로서 論하니 減死의 典을 施行함이 合當하므로 이를 減死하여 定配하게 할지어다. 〔補〕 同年 慶山人 裵太順이 李興春을 潛殺하였다. 樂彬이 監司로 있을 때의 査啓에 의한 本曺判書 鄭尙淳의 回啓에, 대저 이 獄事는 깊은 밤에 사람이 보지 못한 때에 일어난 일이므로 다른 可據할 만한 形迹이 없으니 반드시 屍親의 訴狀과 詞證을 參酌하여 그 罪를 論斷하게 되는 것이나, 屍親 李光春의 招辭에는 그 兄 興春이 命亨에게 失言을 하였던바 命亨이 반드시 逞憤하고자 萬世등을 募得하여 그 兄의 종적을 찾았음은 一村이 다 아는 事實이며 翌日 밤에 문득 殺死의 變을 當하였으니 그 兄을 殺害한 者는 命亨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裵太順은 連姻의 誼가 있고 平素에 서로 失手한 일도 없었는데 어찌 戮害할리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權璉의 招辭에는 그날 밤 夜深한 후에 술을 사기 위하여 金召史의 집으로 가서 불으니 金女가 裵太順의 집 墻邊으로부터 돌아와서 술을 주기에 隣家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말소리를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李興春이 裵太順의 집에 來到하였다고 하며, 金女는 일즉 命亨과 通한바 있으므로 그를 指證하기 위하여 興春이 일즉 太順의 妻를 奸通하다가 喪服과 喪笠을 빼앗겼다는 말을 假出하였으나 初·覆檢때는 陳告하지 아니하고, 三檢할 때에 그 말이 처음으로 나왔으며, 砒霜봉지가 獄中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太順이 自處하려는 證據를 만들기로 한 것이나 太順은 疥瘡에 使用하던 殘餘品이 衣裏中에 混入된 것을 獄中으로 就囚할 때에 미처 救出하지 못한 것이며, 元來 사람을 시켜 買得한 事實이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太順의 目的하는 一端이 되는 것이나, 한번 金女가 裵太順을 援引하여 誣하였든 까닭에 太順은 元犯으로 되고, 命亨은 釋放하게 되어 仍하여 金女를 率畜하였다고 하니 金女가 이르는바 昨年 10月에 처음으로 命亨의 妾이 되었다는 것도 取信하기 어려우므로 이 獄事의 首犯은 當然히 都命亨이 되어야 할 터이나 命亨은 이미 物故하였으니 지금 可論할 것도 없으며, 金召史는 殺獄의 事體가 至重함을 알지 못하고, 敢히 掩護할 奸計를 내어 元犯을 變換하고 獄情을 眩亂하게 한 罪는 道臣의 訴請에 의하여 嚴刑 照律하고, 裵太順은 道臣의 所論中 物情을 採探한즉 一邑이 모두 裵太順은 至極히 寃抑하다 하고 또 疑心스러운 端緖가 없다하니 마땅히 參酌하여 決處할 길이 있으므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獄事는 原來 疑晦하여 사얼할 만한 體段이 못되는 것이나 累次 行査하여도 지금에 와서는 더욱 경핵할 端緖가 없고 御史의 書啓에도 또 이와 같고 本曹의 兩次 回啓도 丁寧하니 可謂 詢國論이라 하리로다. 裵太順은 參恕할 길이 있고 一獄에는 本來 두 元犯이 없는 것이니 命亨은 이미 被告人인지라 物故與否는 莫論하고 太順은 어찌 이르는바 皮不存의 毛가 아니겠는가, 綜核하는 政事로서 揆察할 때에 次律로서 酌放할 수 없는 일이니, 造謀에 加功한 者와도 같음이 있으나 곧 分揀하여 放送할지어다. 〔重補〕 同年 長湍 金龍孫이 崔元世를 발길로 차서 當日에 致死하게 하였다. 致死한 實因은 피척으로 되어 있다. 辛丑年 道啓에 正犯 金龍孫과 干犯 高之方은 崔元世를 척살하고 自己 스스로 結項하여 死亡한 것 같이 假作하고 서로 추위하므로 이들을 嚴刑하여 그 實情을 把握하기로 한다고 하였다. 癸卯年 2月 有旨에 이르기를, 대저 獄體는 至極히 嚴한고 人命은 至極히 重한 것이니, 먼저 情理를 보고, 다음 手勢를 論하여야 하며, 또 만약 여러 사람이 合謀하여 疑亂을 彷彿하게 한 경우에는 반드시 首犯과 從犯을 區分한 然後에 비로소 成獄하게 한 것은 欽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지금 이 獄案은 疑端이 甚히 많도다, 그중에 가장 顯著하게 보기 쉬운 것만 골라서 말하더라도 當初에 寡女를 奪取하고자 그를 태래하기로 謀議한 者는 곧 之方이니 之方이 이 事件의 首犯인 것이요, 龍孫은 隨從에 不過할 터이니 이것이 첫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그 寡女를 안아 내여서는 元世에게 부치였으나 洞內사람의 追跡으로 인하여 負來하지 못하게 되니 之方의 憤한 마음은 반드시 龍孫보다 倍나 될 터이며, 移怒하는 行動도 마땅히 元世에게 먼저 할 터이니 이것이 둘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峴上에 돌아온 후 네가 積極 協力하지 아니 하였기 때문에 成事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之方이 元世를 向하여 極口 誹謗하다가 仍하여 쟁항을 일으켰으니 죽은 元世와 더불어 머리를 맛대어 싸움한 것은 之方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이것이 셋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龍孫이 술에 醉하여 緊척하므로 元世가 그 즉지에서 주저 앉었다고 말한 것은 太位와 點乭들의 招辭에서 나온 것이나 太位는 之方과 同姓이요 點乭은 之方의 切姻이니 之方을 右袒하고 저함은 사람의 常情이니 어찌 明證이라 하겠는가 이것이 넷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비록 太位등이 之方을 右袒한다 할지라도 龍孫은 내려오고 之方은 홀로 머물러 있었다는 말은 敢히 隱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다섯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元世의 致命이 之方의 홀로 머물러 있을 때에 있었다하니 이것이 여섯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之方이 만일 犯行한 바가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逃避하였으며 龍孫이 만약 原犯이라면 어찌 敢히 訃告를 하였겠는가, 이것이 일곱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며, 暫時동안 逃避하였다면 오히려 愚迷한 所致로 황겁하여 한 일이라고 하겠으나, 어찌 4年동안 종적을 감추고, 名字까지 改易하였다가 被捉되어서는 軍役을 避하고자 한 일이라고 하는 말은 더욱 窘遁함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여덟째로 疑心스러운 일이로다. 대저 元世의 縊痕 은 自縊이 아님도 明白한 일이며, 龍孫은 이미 太位등과 같이 먼저 내려오고 之方이 뒤에 떨어져 있었으니 龍孫이 그를 묶으지 아니한 것도 또한 明白한 일이로다, 그렇다면 元世의 목을 묶었다는 一節은 之方이 홀로 한 事實이 아니겠는가, 만약 之方이 처음 元世를 척타 하지 아니하고 龍孫이 홀로 犯手하였다면 之方이란 者는 오직 太位등으로 더불어 傍觀作證하였다가 그 罪를 龍孫에게 돌리기도 바쁘거늘 어찌 홀로 落後하였다가 이러한 慘毒한 行爲를 犯하였겠는가, 이를 미루어 보드라도 그 처음 척타할 즈음에도 또한 之方이 首犯이요, 龍孫이 從犯임을 斷然 알 수 있는 일이며, 설령 元世가 이미 죽은 後에 自縊을 假作한 情狀도 之方은 一律을 免하기 어렵거니와 之方이 落後한지 얼마 안되어 太位가 올라가서 보니 이미 묶었던 새끼(索)는 없어지고, 함해사이에 오히려 약간의 痕迹만 있었다고 하니 之方이 억지로 그 목을 묶은 것은 一縷의 生命이 끊어지기 전에 있었든 것 같고, 將次 죽게된 숨결에는 약간의 手勢만 犯하여도 혀(舌)를 吐하지 못하고 이(齒)를 물고 있음은 無寃錄에 合致된다는 것은 怪異한 일이 아니니 그 흉녕한 事實은 참아 말할 수 없으므로 之方이 이 事件의 正犯임은 決코 疑心할 것이 없도다. 오직 그 情理의 深重함이 이같으므로 저의 前後招辭를 보건대, 龍孫의 供述은 자뭇 條理가 있으나 之方의 招辭는 專혀 粧撰을 일삼았으며, 初·覆檢官이 之方의 찻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문득 龍孫을 正犯으로 한 것은 輕率한 失策이 있는 것이나 지금 之方이 이미 就囚되었으며 首臣이 아직 倒置되어 있으니 무슨 所據로서 그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로다. 만약 지금 審 하여 바르게 하지 아니 한다면 死者의 命을 報償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獄體를 重하게 하는 뜻이 아니니 卿은 剛明한 査官을 各別히 選定하여 主推官으로 더불어 立會 同推하여 嚴刑으로 究問하여 기어히 實情을 얻도록 할지어다. 本道査啓에 지금 推 한 결과, 여러 사람의 招辭에서 비로소 峴上의 기뇨時에 之方이 數次로 족척하는 狀況을 果然 目擊하였다고 하니 元世를 勒縊하고 족척한 것은 之方의 所爲임이 明白한 事實이며 元世의 致命도 之方이 峴上에서 獨留할 때에 있었다고 하니 元世를 殺死하게 한 者는 之方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高之方은 正犯으로 龍孫은 干犯으로써 懸錄한다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正犯은 이미 之方에게로 돌아갔으니, 道臣의 所請에 의하여 龍孫은 參酌하여 定配함이 如何하올가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前年 겨울 赦典에 殺獄으로서 減死한 類는 擧皆가 疏放되었으니 이를 刑推하여 放送하여도 失刑에는 이르지 아니 할터이니 이에 의하여 擧行하게 할지어다. 甲辰年에 罪人을 錄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일즉 本道의 錄啓에 의하여 8條의 疑端을 拈出하므로써 元犯을 換定하는 擧事가 있게 되어 龍孫은 刑放하고 之方은 仍推하고 있으나 朝家의 뜻으로서는 疑晦가 多端하여 일즉 自信하지 못하여 한번 더 硏究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 文案을 閱覽하건대 果然 한두가지 다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없지 아니하도다. 이 獄事의 元犯은 之方과 龍孫의 兩漢外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나 之方은 主人이요, 龍孫은 從人이라 謀事가 잘못되면 移怒하는 行動에 있어서 之方의 憤恨이 마땅히 龍孫보다 倍나 될것이요, 이웃싸움에 칼을 뽑는다는 것은 이들의 常習이며, 敵反荷杖이라는 것도 또한 古諺이 있거늘 하물며 겨우 誨責을 加하여 문득 흐터진 氣分을 收拾하였으면 밤중에 虛行한 일은 진실로 누구에게나 탓할 마음이 있을 터이므로, 片言의 起鬧에도 어찌 相關할리 없겠는가, 主客이라는 區別만으로서 그 罪責全部를 之方에게 歸屬시키는 것도 不可한 일이며 龍孫이 긴척하므로 元世가 주저 앉었다는 말은 처음 之方의 切姻의 招辭에서 나왔다 하므로 비록 准信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龍孫의 前後 招中에 척타한 一款은 마츰내 明確한 말로 辨明하지 아니하니 之方이 손을 犯하지 아니한 것은 推測할 수 있고, 元世가 落留한 것은 문득 업고 간 僧人과 같았다 하니 之方이 이미 왔다가 다시 간 것은 怪異한 일도 아니나, 그가 죽은 뒤에 同行하는 諸人들이 蒼黃警訝하여 마땅히 모두 往見하게 되는바 點乭과 太位등이 먼저 龍孫을 보낸 것은 또 무엇 때문일가, 이는 반드시 元世의 죽음이 龍孫의 긴척에 綠由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起鬧한 사람을 보내어 저로 하여금 모든 罪責을 自當하게 한 것이므로 龍孫이 最初로 疑心을 받게 된 것을 볼 수 있고 또 만일 之方이 中路에 逃亡하여 多年間 潛跡한 것으로써 저의 斷案으로 한다면, 또 한 말로서 變證할 만한 것은 之方의 逃避는 오히려 스스로 그 罪를 알고 先機 逃避라고 할 수 있으나 奉伊가 손을 잡고 같이 돌아왔다 하니 또한 이로써 元犯으로 擬議하겠는가, 龍孫이 만일 이 獄事의 元犯이라면 決코 訃告를 傅할리 없다고 말하는 것은 果然 이러한 事理가 없는 것도 아니며 前後 殺獄의 正犯들이 그 形點을 掩避하기 위한자 또 얼마나 많었는가, 殺獄의 變이란 尋常한 凶音이 아닌 것이며, 3人이 屍體를 지키면서 一夜를 苦待하였으니 事理上 當然히 通傅하기에 汲汲하였을 터이요, 之方이 오고 아니온 것은 다음이 問題일 것이며, 서서히 그 妻의 飯訖을 기다려 거짓말로써 저의 夫가 氣窒되었다고 한 것은 그 擁容한 表情이 어찌 이러하였을가, 村民들이 몽둥이를 갖었다는 것을 醉中에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은 顯著하게 推誘하는 形跡이 있는 것이나, 이를 對質하는 招辭에서도 또한 分明하지 못하고 다만 窘遁한 態度만 보이니 더욱 疑眩한 끝이 나타나고 또 點乭과 太位는 之方에 대하여 비록 同姓 혹은 異姓의 親戚이라 할지라도 龍孫과 같이 囚禁되고 之方은 逃避하여 있었으니 獄中의 顔面은 이미 익어지고 之方을 逮捕할 期約은 없었으니 道義의 交分과 骨肉으 至親이 아니면 어찌 之方에게 一辭推誘하지 아니 하겠으며, 前後 9年동안 龍孫 한사람으로써 立證하겠는가, 獄事가 事案되여 出場할 날이 없음을 보고, 이에 萬死의 計議를 내어, 一團의 말을 發言함은 必然的인 일이리라. 대저 元世를 척타한 者는 龍孫이요, 勒縊한 者는 之方이니 當初의 事端은 비록 造謀한 사람에게 있다 할지라도 結果의 殺死는 저혼자 아는 事實이 아니나 之方이란 者가 同伴數人을 來率하고 屍體運搬을 相議하였다 하니, 이와같이 堅硬한 傷處를 보고 龍孫을 元犯으로 定하는데에 누가 異議하겠는가, 이미 同情의 律을 犯하고, 또 故犯의 形跡이 顯著하였으니 처음부터 공겁하여 홀로 彌縫하려 하다가 就捕를 當한 후로는 말마다 粧撰하고, 一一히 隱諱하면서 落留한 一節까지도 龍孫에게 직위하니 저의 斷案을 저 스스로 判斷함인지라, 三尺의 律이 어떻게 이를 容惜하겠는가, 死地에서 生道를 求하는 것은 獄事를 愼重하는 뜻에서 나오는 것이요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따르는 것은 마음을 平하게 함에 있는 것임으로 情으로서나 跡으로서나 만약 十分 明的하지 못한 事實을 한 두가지 疑端을 잡고, 누구는 首犯, 누구는 從犯이라 强定하여 寃柱와 橫罹하는 恨歎을 갖이게 한다면 朝家의 뜻으로서 어찌 참아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지금 이 數箇項의 疑端이 之方을 살리고 龍孫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前日의 말은 그르고, 오늘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아니로다, 獄事를 鄭重히 생각하고 모든 事實을 確定할 수 없으므로 訝惑이 더욱 많아지고 또 論理로 判下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道伯이 赴任한 후로 이에 귀를 기우리고 있었으나 이 獄事의 顚末에 대한 意見의 如何를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該道에 分付하여 剛明한 査官을 特別 選定하고 이밖의 違端을 敷演하여 應問할 各人에게 이를 反覆究語하여 仍하여 意見을 갖추어 狀聞하게 할지어다. 道에서 다시 調査하여 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獄事에 두 犯人은 다같이 8箇條의 疑端이 있고, 한 獄事에 두 犯人이 出場할 期約이 없으니 該道에 嚴飭하여 逐條로 盤詰하고 劃一的인 論理로서 狀聞하게 할지어다. 다시 道의 査啓에 의한 判付에 이르기를, 準式에 의하여 嚴刑하여 期於히 實情을 알도록 할지어다. 傳敎에 이르기를, 이 獄事는 蔽一言하고 疑案이라 하리로다, 勒縊한 事實이 生前이냐 死後이냐 하는 確證을 갖인 然後라야 可히 이 獄事의 元犯을 斷定하리로다. 대개 之方의 勒縊과 龍孫의 척타한 事實이 어두운 밤중에 있었고 獄事에 明白한 證據가 없으므로 두 犯人이 서로 미루어 屢年동안 未決로 있고 비록 再次 按査하도록 하였으되 結論을 내릴 수 없으니 지금 大赦하는 이 날에 있어서 어느 것을 酌決하지 못하리요, 모두 放送하도록 該曺와 該道로 하여금 다알게 할지어다. 〔重補〕 同年 洪川 具時奉과 朴善生이 錄啓에 들어 있다. 前日 時奉과 善生이 朴以同을 발로 차서 卽地에 致死하게 하였다. 致死한 實因은 折項으로 되어 있다. 道啓에 의한 刑曺의 回啓에, 일즉 善生을 元犯으로 하여 이미 陳達을 經하고 同推에서 輸情하였다고 한다. 判付에 이르기를, 秋官의 말이 진실로 意見이 있는 일이니 이로서 分付하여 時奉에게 그만 停刑하고 그대로 囚禁할지어다. 甲辰年 道啓에 初檢時에는 이미 口頭로 報告함에 따라 善生을 元犯으로 하였다가 三·覆檢에서 元犯을 時奉에게 換易한 것도 또한 듣고 본 바가 있어 그러함이며, 以同이 折項한 것은 善生에 있는 것이 아니라 時奉에게 있었음이 十分 明確한 일이라고 하였다. 傳敎에, 추핵한지 이미 10年을 經過하였으되 아직 判決하지 못하였으니 일즉 道伯을 歷任한 在京人은 本曺에 來會하여 三堂으로 더부러 意見을 갖추어 論理回啓하게 할지어다. 前道臣 구익·金尙集·金 憙와 判書 趙時俊·參判 李亨達·參議 李獻慶이 各自의 意見을 陳達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여러 議論이 同一하지 못하나, 각각 所據는 있으니 道伯으로 하여금 直接 심핵하여 事由를 갖추어 狀聞하게 할지어다. 本道의 査啓에, 時奉은 마땅히 元犯으로 하여야 하고 善生은 參怒할 수 있다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한 獄事의 두 犯人에게 判決하는 方法이 세가지 있는바 하나는 首從이요, 또 하나는 主客이요, 또 하나는 强弱이다. 먼저 일어나서 타시한 者는 時奉이요, 뒤에 와서 집고한 자는 善生이니 時奉은 首犯이요, 善生은 從犯이며, 辱을 憤하여 爭端을 이르킨 者는 時奉이요, 이를 挽留하고, 紛爭을 和解한 者는 善生이니 時奉은 主가 되고 善生은 客이 되는 것이며, 屍親 五男은 오히려 時奉을 護하고, 동반한 德潤도 善生을 全然 돌보지 아니 하였다하니 이도 또한 時奉은 强者요, 善生은 弱者인지라, 京班의 家奴로 四顧無親한 處地에서 10年 동안 會推하는 刑을 받았으나 一段의 良心만은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時奉이 그의 上典에게 侵擧한 事實을 조금도 추위할 뜻이 없고 受扶하는 情이 顯著하게 曖昧한 上典에게 너 무엇을 들어 말하겠는가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殺人할 惡種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善生은 加刑하여 放送하고, 時奉은 좀 더 刑訊을 加하여 期於히 取服할지어다. 乙巳年 道啓에 의한 判付에 이르기를, 한 獄事를 10年동안에 元犯을 屢換하여 하나는 仍하여 囚禁하고, 하나는 放送한 것은 特히 法文外에서 事端을 模索하기 때문이며 朝家에서 이 文索에 일즉 十分 疑惑이 없지 아니하니 다시 道臣으로 하여금 嚴重히 핵실하여 狀聞할지어다. 本道의 査啓에 詩奉을 元犯으로 한 것은 査案에 載錄되었으므로 依然 訊推한다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머리를 잡고 먼저 犯行한 것은 비록 時奉에 屬한다 할지라도 耳後를 차고 밟은 것은 마침내 善生에게 있었으므로 一分의 疑端이 된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아직 依然 同推하게 할지어다. 己酉年의 道啓에 時奉을 지금 査問한 結果, 忽然히 허황한 供述을 發하여 敢히 掉脫을 꾀한다고 하였다. 傳敎에 이르기를, 16年을 滯囚하여 3百次의 刑을 받았으니 눈은 멀어지고 귀는 문허지고, 나이는 70餘이며, 同時의 被告였던 朴善生은 살아서 獄門을 나갔으되 저는 아직까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獄中에 있으니 저에 있어서는 진실로 寃痛하다 할지로다. 그러나 그 獄理로서는 殺越이 分明하므로 저를 宥釋할 만한 길이 없으며, 다만 생각하건데 大明律에 「十歲以上 十歲以下 死罪奏聞 取自上裁」라고 한 文句가 있으니 이것이 足히 傍照할 수 있는 一端이 되거든 하물며 成獄할 當初에 오히려 區別하여야 할 일이며, 오래동안 囚禁되어 있었으니 더욱 審恤함이 合當한지라 具時奉은 大明律에 의하여 勘放하도록 分付함이 올을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