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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관지(3)
  • 구분특집(저자 : 편집실)
  • 등록일 2009-01-01
  • 조회수 4,572
  • 담당 부서 대변인실
秋 官 志 (3) 故殺子弟律 肅宗 22년에, 刑曹判書 李世華가 아뢰기를, "故意로 子弟를 殺害한 자는 律(大明律)에는 當然히 死刑하여야 되는 죄로 規定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甲子年의 受敎에 死刑으로 論斷하였고, 丙寅年의 受敎에는 法으로 規定된 條文대로 施行하되 情狀과 경과가 몹시 惡한 것은 隨時로 稟旨하여 決定하라고, 裁決하셨읍니다. 그런 까닭에 가끔 一罪(死刑)로 論斷합니다. 이 뒤로는 이러한 罪人을 死刑으로 처단하는 일은 稟議決定한 뒤에 啓覆의 節次를 履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다. 英組 22年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모든 殺人事件에 있어서, 격식을 갖추어 啓聞한 뒤에는 寬恕하기 어려운 것이다. 續典에 稟旨하여 決定하라고 한 것은 監司가 아직 親問하기 전의 일을 말한 것이다. 이 뒤로는 아비가 아들을 殺害한 것, 兄이 아우를 살해한 것 같은 비록 法에 의하여 처치하여야 할 자라도 한 번 啓聞하고 刑曹가 覆奏하여 回答이 내려가기를 기다린 뒤에 監司가 親問하여 가지고 格式을 갖추어 啓聞하도록 中央과 地方에 분부하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전번 三覆 때에 이미 下敎하였거니와 明律의 본 規定과 전년의 受敎는 모두 倫理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受敎中에 (倫理上)"切害"라고 하는 두글자는 先王의 뜻이 깊은 것이다. 그런데 刑官들이 이 受敎로 인하여, 아비가 아들을 殺害한 것, 兄이 아우를 殺害한 것은 普通 모두 死刑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 옳지 못한 일이다. "切害"라는 두 글자를 만약 세밀하게 연구하여 보지 않고 그를 문득 전과 같이 泛然하고 소홀하게 한다면, 그 切害란 말은 마음 가짐이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다는 것이다. 아, 패려한 아들과 악한 아우로서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 자를 그의 아비된 자, 그의 兄된 자가 비록 매를 치다가 그로 인하여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切害하기가 음흉하고 참혹한 그런 犯罪行爲에 비길 수야 있겠는가, 하물며 誤殺이나 過失殺로서, 다른 음흉 참독한 것을 먹은 마음이 없는 過誤가 이 律에 비길 수 있겠는가. 대체로 殺人한 자는 목숨으로 죄를 갚는다는 것은 그 殺害 當한 자의 寃痛함을 위로하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다. 西銘에서도 또한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도망함이 없이 삶아 죽이기를 기다리니 申生은 공손하다. 申生의 孝心으로 前生에 定하여진 그의 아버지에게 寃痛한 마음을 품었겠는가 하였다. 이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切害하고 陰慘함에 가깝지 않은 行爲에 대하여 그것을 償命의 律로 처치 한다면 어떻게 孝子와 順弟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밤중에 이 일을 생각한다면 不知不覺에 상연스럽게 된다. 다시 不敎하니 이 뜻을 中央과 地方에 분부하라"고 하였다. 倫紀罪人 啓聞發配 지금임금 3年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착한 임금의 政治는 먼저 가르친 뒤에 刑罰하는 것이다. 가르치지않고 刑罰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罔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저 가르치는 일은 五敎보다 더 큰 것이 없다. 五敎가 펴지지 않으면 그 허물을 누가 질 것인가(그것은 爲政者가 져야 한다). 그런 까닭에 번번이 法曺가 綱常에 관계된 죄를 判決한 것을 들을 때마다 일찍이 출연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五品(五典)이 順遜하지 아니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부모에게 不孝하다던가 兄에게 공손하지 않은 죄를 지은자가 있다면 敎化가 펴지지 않았다고 하여 刑罰을 施行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刑律대로 처벌하기를 決裁하여 주며, 赦典이 있을 경우에도 綱常의 罪人만은 釋放하지 않는다. 近日의 獄囚에 대한 일을 記錄해 올린 것을 보드라도 무릇, 綱常에 관계된 罪가 다만 달마다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날마다 啓聞이 올라 온다. 이것을 나는 더욱 부끄럽고 면목없게 생각하는 바이다. 어찌 當該官司가 깊이 생각하여야 할 一端이 아니겠는가, 司憲府는 곧 風敎와 憲章을 맡은 곳인지라. 만약 風憲을 손상하는 백성이 있으면 마땅히 그 犯行의 크고 작은 것과 罪의 무겁고 가벼운 것을 자세히 조사하여서 充分히 愼重하게 審理하여 보아 明白하고 의심되는 것이 없은 뒤에 法曺에 옮겨서 罪를 決定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風說이나 뜬 소문을 가지고 다만 자기 혼자만의 私見으로 경솔하게 앞질러 처단한다면, 그 罪名을 비록 徒刑이나 流刑에 들드라도 生前에는 용서되어 돌아 올 길이 없는 것이니, 그것이 無罪한 자라면 그의 원통한 부르짖음은 나라안의 和氣를 損傷하는데 관계가 될 것이오, 또한 敎化를 좇지 않는 무리들에게 있어서도 징계하고 계칙하는 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當該曺는 이렇게 알고 罪가 綱常에 관계되는 것은 비록 死罪가 아닌 그 以下의 罪에 該當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자세히 조사 審理하여 그 情狀과 事實을 明白하게 알아내어 조금도 의심되는 점이 없은 뒤에 草記를 올려 啓聞하고 配所로 送致하게 하여 나의 먼저 가르친 뒤에 형벌하려는 뜻에 副應하게 하라. 綱常에 관계된 罪名을 가진 事件은 三法司中에서 오직 司憲府만이 연속하여 체포 囚禁하니 그 어찌 刑曺와 漢城府는 그러한 犯罪있음을 알지 못하고 유독 저 司憲府만이 자세히 알아서 그렇게 한단 말인가. 이 또한 매우 괴이하고 의심스럽도다. 이번에 囚禁된 사람에 대하여는 그 사실을 詳細히 조사하여 啓聞하라"하였다(堂上官의 大廳위에 현판을 만들어 달았다.). 4年에, 善復이 刑曺判書가 되었을 때에 아뢰기를, "倫常에 관계된 罪人을 草記하여 啓聞한 뒤에 配所로 送致하라는 것은 曺에는 下敎가 있었으나 地方에서는 이러한 罪人을 그 道에서 바로 配所에 送致한 뒤에 配所 所在地의 監司가 비로소 狀啓를 올리게 됩니다. 이 뒤로는 罪가 倫常에 관계된 자는 事實과 情狀을 嚴重하게 조사하고 罪目을 자세히 기록하여서 먼저 狀啓한 뒤에 配所로 送致하도록 하라는 뜻을 各道에 指令하는 것이 어떠하겠읍니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堂上官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였다. 吏曹判書 金鍾秀가 말하기를, "먼저 狀啓한 뒤에 配所로 送致하게 하는 것이 비록 監司의 權限을 牽制하는 것 같은 염려가 있으나 만약 죄가 綱常에 관계된 事件에 한하여 이러한 例를 특별히 창설하게 된다면 그 밖의 다른 가벼운 죄를 監司가 바로 처단하여 配所로 送致하는 일은 처음부터 아무런 제한을 加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中央官司에서 管掌하여 임금께 아뢰고 잘못된 것을 修正할 道理를 생각한다면 죄인이 생긴 그 道에서 먼저 狀啓를 올린 뒤에 配所로 送致하는 것이 配所所在地의 道에서 비로소 到配啓本에 罪目을 갖추어서 狀啓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尙 喆이 그 때 領議政을 하고 있었다. 아뢰기를, "먼저 장계하고 뒤에 配所에 送致하는 것이 비록 임금께 아뢰는 일이 번다하고 지나치게 자세한 것 같은 염려가 있으나 만약 그 중에서 죄가 倫常에 관계되어 犯行이 매우 重한 것만을 罪目을 자세히 記錄하여 狀啓하게 하고 當該曺에 내려 주시어서 稟旨處理한 뒤에 비로소 配所로 送致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면 各道에서 귀양 보내기를 決定할 때 반드시 두려워하고 신중히 심리하는 效果가 있을 것이니 이것으로써 一定한 例規를 定하여 施行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읍니다" 하였다. 左議政 徐命善이 말하기를, "罪가 倫紀에 관계되는 것은 이것은 항상 있는 일이 아닙니다. 비록 먼저 장계한 뒤에 配所로 送致하더라도 견제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地方官衙에서 罪人을 愼重히 심리하는 데는 반드시 큰 效果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罪目을 列擧 論述하여 啓聞하고 該曹에서 覆奏한 뒤를 기다려 配所로 送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領相. 左相과 吏曹判書의 말이 진실로 생각과 견해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은 配所로 보낼 때와 配所에 도착한 때에 각각 狀啓를 올려 그 일을 愼重히 하고 그 事例를 均衡하게 하도록 하려는 것에 不過한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例規를 定하고 當該曺로 하여금 各道에 指令하는 것이 좋겠도다" 하였다. 〔重補〕 6年에 南部의 李召史가 上言하기를, "저의 나이가 82세입니다. 다만 외아들 充金이가 있었습니다. 술이 취하여 거리에서 禮節을 바로 지키지 못하였더니 늙은 어미에게 공경하지 않는다는 罪目으로 남의 告訴를 당하여 富寧으로 定配되었습니다. 釋放하여 주시는 恩典 입기를 비나이다"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대한 判付에 이르기를, "이러한 罪名의 事件은 事實과 어그러진 처리를 하기 쉽다. 전번에 受敎로 例規를 定한 것이 있어서 반드시 啓聞한 뒤에 配所로 送致하게 하였는데, 이 罪囚는 果然 그 命令이 내리기 전에 送致한 것인지 文書를 調査하여 草記를 올리라" 하였다. 刑曺의 草記에 아뢰기를, "充金을 配所로 보낸 것은 果然 命令이 있기 전이었읍니다"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法令이 오래되면 解弛하여지는 것이다. 이 뒤로는 이러한 종류의 罪名을 만약 즉시 啓聞하지 아니하거던 當該堂上官은 削職傳旨를 直捧할 것을 承政院의 故事와 刑曺의 受敎에 載錄하라"라고 하였다. 殺子· 婦 肅宗元年에, 江界 사람 志望이 故意로 제 아들을 죽이고 他人을 犯人이라고 誣告하여 殺人罪를 構成시키고자 하였다. 그 道의 監司가 올린 狀啓로 인하여 許 積이 領議政을 할 당시에 아뢰기를, "罪人 志望을 梟示(효시)할 것인가 아닌가를 大臣에게 논의할 것을 傳敎하시었으나 先朝에서 이미 明律에 의하여 罪를 決定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변경하여 고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先朝에서 이미 決定한 律을 가볍게 고칠 수는 없다. 志望은 前대로 定配하고, 이 뒤로는 計劃的인 故殺者는 死刑으로 論斷하라"라고 하였다. 7年에 , 明川의 寺奴女 莫今이 아들을 낳아서 죽이고자 하다가 이웃 사람의 救濟로 中止되었다. 그 道의 監司가 처리 방법을 稟議하여 왔다. 刑曺의 啓目에 아뢰기를, 大明律의 條文內에 祖父母·父母가 故意로 子·孫을 殺害한 자는 杖60· 徒1年의 刑에 처하고, 尊長이 卑幼를 殺害할 謀計를 이미 행하였으나 아직 사람을 殺傷하지 아니한 자는 故意로 殺害한 罪여서 2등을 輕減하여 杖90의 刑에 처하라고 하였으며, 殺害하지 아니한 자를 殺人한 자와 같은 刑罰을 한다는 것은 法文의 本意에 어그러지는 것 같으니 明律의 條文에 의하여 施行하라는 뜻으로 回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父母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로 하늘에서 타고 난 떳떳한 心情인 것이다. 咸鏡道는 우리 착한 始祖의 發祥地인 땅이다. 人心이 淳厚하다고 일러 왔는데 近年에 떳떳한 倫紀가 풀어지고 끊어져서 어미가 아들을 殺害할 意思를 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이 寒心하기가 이보다 더 甚한 것은 없다. 비록 가까운 이웃으로 인하여 兇行의 計策은 未遂에 그쳤으나 그의 마음먹음을 살펴보면 殺害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결코 死罪로 처단하여 風俗과 敎化를 바로잡고 國境地方의 民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大臣에게 의논하여 가지고 稟旨 處理하라" 하였다. 領議政 金壽恒이 논의하기를, "어미로서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人倫의 큰 變故입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깊이 미워하고 切痛하게 여기시어 死罪로 처단코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母子間의 慈愛하는 情을 생각하여 보면 새나 짐승도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서 貴한 사람이나 賤한 사람이 다른 것이 없습니다. 北道의 風俗이 비록 지극히 완악하고 어리석다고 한들 제 손으로 그의 赤子를 죽이기에 이른 것이 어찌 그의 本性이 홀로 남과 다르기 때문이겠습니까, 대체로 生活하여 갈 道理가 어려운 것과 夫役의 무거움이 다른 道에 比較하여 특히 過重하여서 甚한 것은 父子가 서로 保護하지 못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從前에도 이러한 變故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하게 된 까닭을 생각하여 보면 진실로 가엾어 할 것이요 미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날 宋나라의 岳州(악주)와 鄂州(악주)地方에는 시골의 常民들은 慣例대로 2男1女를 기르되 이것을 超過하면 곧 물 단지 속에 담거서 죽였습니다. 蘇軾이 鄂州의 守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大明律의 條文에 故意로 子孫을 죽인 자는 徒2年의 刑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願컨대 貴下는 部下의 吏員들에게 분명히 일러주어서 地方民에게 널리 타일러 그 習慣을 變改하게 하시요"라고 하였습니다. 蘇軾의 이 말은 切實하고 至當한 論입니다. "오늘 北道의 이러한 일에 對處하는 길은 마땅히 먼저 그 弊端을 막을 근본을 찾아야 할 것이고 다만 罪를 嚴하게 처단하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父母가 子女를 故殺한 자를 死罪로 論斷하는 것은 비록 受敎가 있으나 아직 殺害하지 아니한 자를 旣遂한 자와 더불어 그 마음 먹은 것이 같다고 하여 法의 適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아마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死刑 아닌 다음의 刑罰을 適用하는 것이 酌量하여 처리하는 道理에 合當할 것 같습니다. 上裁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左議政 閔鼎重은 논의하기를, "北關의 民俗이 자식을 낳아서 죽여 버리는 자가 가끔 있읍니다. 대체로 그 뜻이 오로지 生活할 道理가 지극히 어려운 데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의 근원을 찾아 보면 또한 매우 불쌍합니다. 더군다나 죽이고자 하던 아들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아직은 잠간동안 法의 精神을 그대로 參酌하여 施罪하고 곧 그 道로 하여금 啓稟하여서 制度를 마련하고 使隷와 백성들에게 타일러 永久히 遵行하게 하여 기어코 나쁜 風習을 變革시키는 것이 진실로 敎化하는 本意에 合當할 것 같습니다. 上裁를 기다립니다" 라고 하였다. 右議政 李尙鎭이 논의하기를, "虎. 狼처럼 惡獸도 오히려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압니다.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읍니다. 하물며 죽이고자 한 일이겠읍니까. 이것은 진실로 큰 變故입니다. 그러나 죽인 것과 죽이기를 꾀한 것이 그 殺意는 비록 다른 것이 없으나 旣遂와 未遂는 法律에 죄가 같지 않습니다. 殺獄을 처단하는 法은 한번의 動撓도 容許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저 한 몸의 살아 갈 길이 이미 어려운데 또 한 食口를 添加하게 되면 살아 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스스로 人倫을 敗絶하게 되는 行爲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朝廷에서 마땅히 스스로 反省하여 恩德의 뜻을 宣布하고 고칠 수 없는 痼疾이 되어버린 폐단을 改革하여서 오래된 백성의 風俗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신이 聖明한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이 事件을 법과 같이 처리하는데 있을뿐만은 아닌 것으로 上裁를 기다립니다" 라고 하였다. 判中樞府事 金壽興· 鄭知和는 논의하기를, "父母가 子女를 慈愛하는 天性은 사람마다 다 같이 타고난 것이니 어찌 北道의 백성만이 홀로 하늘이 주는 本性이 없어서 스스로 倫常을 悖亂한 罪에 빠지는 것을 마음에 달게 여기겠읍니까. 그가 이 어린 아들을 죽이려고 꾀하는 마음을 일으킨 까닭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朝廷에서 이 사건에 대처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된 理由를 究明하여서 먼저 그 폐단의 근본을 막을 方途를 講究함으로써 風俗을 바로잡는 素地를 삼는 것이 실로 착한 임금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政治에 합당한 것입니다. 착하신 상감의, 백성을 赤子를 보호하듯 하는 큰 은덕으로써 미루어 먼 地方까지 미치게하여 그들 生을 즐기는 마음을 喪失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 그 하늘이 준 떳떳한 本性을 회복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옛 사람이 말한 바 죽이기를 권장하드라도 또한 좇지 않을 것이라는 境地를 거의 장차 지금의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上裁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논의대로 施行하고, 監司로 하여금 弊端을 없애고 風俗을 고칠 方途를 생각하여 啓聞하고 稟旨 處理하여 遵行하도록 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英組 15年에, 刑曹判書 金聖應이 아뢰기를, "이제 全羅監司의 啓本을 보니 錦山 사람 金厚文이 그의 아들이 行惡하여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하였으므로 분하고 성남을 이기지 못하여 食刀로 함부로 찌르고 왼쪽과 오른쪽의 발꿈치를 베어 버리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同推의 節次를 履行하여야 될 것 같으나 律文에 아들을 毆打하여 殺害한 자는 杖1백의 刑에 처하고 故意로 아들을 殺害한 자는 杖60·徒1年의 刑에 처한다 라고 하였으나 丙子年의 受敎에는 罪가 杖·徒에 이르고, 乙卯年의 受敎에는 만약 情狀과 犯行經過가 몹시 惡한 자는 따로 처단하지 않을 수 없으니 擔當者인 신하는 臨時로 啓稟하라는 下敎가 있으므로 狀啓를 올려 處理 方途를 稟請하라고 하였읍니다. 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右議政 宋寅明이 아뢰기를, "律文으로 보면 杖· 徒의 輕罪에 不過하나 受敎로 보면 臨時하여 啓稟 하라고 命令하기에 이르고 있읍니다. 死刑으로 처단하는 것은 처음부터 논의할 것이 아니나 오직 그 함부로 찌르고 다리를 벤 것은 그 手法이 凶惡하고 패려합니다. 上裁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정상을 참작하여 섬에 定配하라고 하였다. 35年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들으니 이지육의 妻가 며느리를 구타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 함을 들었는데 이는 風俗과 敎化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嚴重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丁召史가 원한을 품고 물에 投身한 것은 「孔雀東南飛」라는 옛詩에 나오는 漢나라 末期 建安때 焦仲卿의 아내의 슬픈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듣기에 매우 悲慘하고 측은하다. 그 시어미는 御史를 보내어 엄중하게 治刑하여 귀양보내야 마땅할 것이나 또 들으니 그의 아들 5人 中에 禁旅의 軍官이 있다고 하니, 아 남의 임금된 자 孝道를 基本으로 하여 政治를 하는 것인데 이 事件으로써 남의 아들의 마음을 傷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한 이 事件으로 인하여 쓸만한 武士에게 累를 끼치는 것도 옳지 않다. 또 이미 殺人한 事件이 아니니 며느리 때문에 시어미를 治刑하는 것도 또한 王政의 마땅히 할 바는 아니다. 특히 事情을 참작하여 바닷가의 지방으로 멀리 定配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지금 임금 6年에 中和의 金處元이 칼로 李共元을 찔러서 卽日로 죽게 하였다. 死因은 칼에 찔린 것이었다. 그의 아들 大秦이 擊錚하고 호소하기를, "저의 父 處元이 술을 팔아서 生計를 꾸려가더니 李甘丁이 그의 아들 共元과 더불어 함께 와서 술을 마실 즈음에 甘丁이 칼을 빼서 共元의 배를 찌르며 말하기를 내가 悖倫한 아들을 죽이니 무슨 죄에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읍니다. 共元이 죽은 뒤에 甘丁이 官에 저의 아비가 찔러 죽였다고 陳告하였읍니다. 本道로 하여금 嚴重히 調査하게 하십시오"하였다. 道의 狀啓에 아뢰기를, "處元이 元犯인 것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嚴重히 訊問하여 罪情을 알아냈읍니다"라고 하였다. 甲辰年에 다시 調査한 뒤에 刑曺에서 아뢰기를, "共元이 刺殺될 때 한 房에 같이 앉아 있은 자는 處元과 甘丁입니다. 그 元犯을 찾는다면 과연 누구이겠읍니까"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白晝에 칼로 犯行의 흔적이 낭자하다고 하였으나 事件의 急所를 생각하여 본다면, 그 말은 眞實을 把握하지 못한 것에 不過하다. 모든 일은 常理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아비를 대하여 그 아들을 찔렀는데 그 아비된 자가 방금 죽어가는 아들을 버려 두고 급히 제 집으로 돌아 가고 돌보려 하지 않았다니 이것은 진실로 理解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슨 隱密한 事情이 없다면 반드시 別다른 간사한 情狀이 있는 것이다. 朝廷이 여기에서 그 의심나는 단서를 다 말하고자 하지 않고 그 道에 맡겨 특별히 按問査察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道의 監司도 그 暗示하는 뜻을 알아차린 것 같더니 그의 査啓를 보니 그의 말은 근거가 없는 虛空에 뜬 이야기요. 그 事件은 갈수록 더욱더 그 正體가 흐려져 가니 감사의 處事는 진실로 매우 疎忽하다. 전번에 封緘한 書信을 보내어 자세히 問責하고자 하였으나 우선 잠간 그대로 두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各道의 獄案을 몸소 閱覽하느라고 무릇 數十日이 되었다. 이미 充分한 疑心나는 점과 분명치 못한 데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전과 같이 내버려 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刑獄事件을 자세히 살피는 本意이겠는가. 이와 같은 의심나는 殺獄事件은 반드시 꼭 특별한 조처로 자세히 조사하고 파고 들어가야 實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殺人事件을 한번 文案을 作成한 뒤면 監司는 그 文案을 蒐錄처럼 보고 推官은 그것을 鐵券처럼 認定하여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斷定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번복되어야 할 案임을 明白히 알면서도 혹은 顔面이나 私情에 구애되고 혹은 다시 閱覽하기를 싫어하여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人命을 貴重히 여기고 治獄의 道理를 愼重히 하는 뜻이겠는가. 즉시 그 道의 監司로 하여금 자세히 다시 조사하여 狀啓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本道가 調査하여 올린 狀啓에 아뢰기를, "甘丁이 자세히 캐어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여러해 동안 숨겨온 일을 하루 아침에 바른대로 陳述하였습니다. 진실로 처음에는 생각이 미치니 못하였던 일이므로 거듭 거듭 따지어 물어 보았으나 처음이나 끝이나 말이 같읍니다. 오직 빨리 죽기를 願한다고 하면서, 원래 處元에게 急激한 怒氣를 일으켜서 그 憤怒를 자기의 아들에게 옮긴 것이며 꼭 죽이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한 짓은 아니고 경계를 주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그 實狀을 推測할 수 있습니다. 處元이 잘못 죄에 걸려 든 일은 저절로 억울한 혐의를 벗게 되었으며 甘丁이 自服한 것은 하늘의 이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甘丁을 死罪로 정합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事件에 관계한 文書를 처음에는 情狀을 참작하고 法을 硏究하려고 보다가 또 事件의 經過에서 의심을 일으켜 意見을 붙여 判下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査啓 속에 나오는 供招를 보니 크게 倫常에 관계가 있다. 이른바 불쌍히 여기고 事件의 眞相을 알아냈다고 기뻐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이 事件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말과 같다. 三堂上이 함께 모여 앉아서 자세히 閱覽하고 稟旨處理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대한 判付에 이르기를, "이 殺人事件에 있어서 處元을 元犯으로 斷定한 것이 무릇 몇해나 되었는가. 天下의 일은 어느 것이나 常理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남의 아비된 자가 제 눈으로 자기의 아들이 남에게 찔려 죽는 것을 보고 현장에서 갚음을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급히 제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은 常識으로 생각하여도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事情은 처음부터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檢驗官의 意思는, 곧 甘丁은 그의 아비이니 아비가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할 도리는 없으며 處元은 남이니 혹은 일을 저지렀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치우치게 先入見을 가지고 반드시 死刑하여야 한다는 獄案을 굳이 결정하였고 이 獄案을 올린 뒤에는 事件이 倫常에 관계된 것이라고 하여 마땅히 의심하지 않아야할 곳에 의심을 일으키는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다시 調査하기를 命令한 것은 약간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調査官의 見解도 또 檢驗官의 見解와 꼭 같아서 그가 質問하여 供招를 받은 것이 매우 깊이 파고 들었거나 隱密한 點을 指滴하는 일이 없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이미 의문을 일으켜 判下한 點도 그 實狀을 알아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擔當 官員을 設置한 精神이 어찌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이제는 事件은 確定되고 情狀도 알려졌다. 處元의 원통한 것이 비로소 드러나고 甘丁의 罪惡이 비로소 나타났다. 이 事件으로 미루어 본다면 八道의 重罪에 관한 事件中에 이 事件의 경우와 비슷한 것이 장차 그 얼마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어찌 측은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刑曺로부터 이 判下를 가지고 各道에 通牒을 내려 모든 檢官과 査官으로 하여금 각각 자세히 주의하는 마음으로 몸소 硏究하여서 先入先出의 죄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라. 甘丁은 그 兇行의 경과를 조사하여 보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續典에 規定한 死刑은 이 罪囚를 위하여 準備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實地의 情狀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오직 治刑이 잘못될까 두렵더니 實情을 알고나니 도리어 그의 倫常을 손상한 행위가 측은하다. 슬퍼하고 가엾게 여기며 기뻐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이 事件을 가리킨 것이다. 더구나 그의 供述 속에 경계하는 뜻을 보이려고 한 것이요, 처음부터 殺意가 있은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은 또한 혹시 그럴 것 같기도 하다. 특히 死刑을 輕減하고 嚴重히 두 차례 매를 쳐서 絶島에 定配하라. 處元은 共元을 권유하여 甘丁에게 得罪하게 만든 자는 바로 處元이요, 甘丁이 激怒하여 共元에게 함부로 憤풀이를 하게 만든 자도 또한 處元이다. 計策이 甘丁의 밭을 뺏으려는 데서 나왔다고 하니 그 죄는 處元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뒷날을 징계하는 道理로 處元이 4年동안 囚禁되어 있었다고 하여서 갑자기 無罪釋放할 수는 없다. 그 道의 監司로 하여금 情狀을 酌量하여 處罰한 뒤에 放免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11年에 平山 趙匡善의 妻 朴召史가 목매고 칼에 찔려 致死하였다. 그의 父 朴長赫의 告發에 그의 시어미 되는 崔召史가 억지로 목을 매고 칼로 찔렀다고 하였다. 初檢. 覆檢의 檢驗狀에는 死因은 제손으로 찔렀다고 되어 있었다. 長赫의 아들 龍海의 擊錚原情에 인하여 調査를 施行하였는데 監司가 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만약 스스로 찔렀다고 한다면 이미 그 목을 매고 한번 찌르고 두 번 찌르고 세 번 네 번에 이르렀으니 弱한 女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남에게 찌름을 當하였다고 한다면 집안에는 다만 그의 남편 匡善과 匡善의 繼母인 崔女人이 있었을 뿐입니다. 朴女人이 新行온지 두어 달에 지나지 않읍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 서로 미워한 일이 없고 시어미와 며느리 사이에 아직 틀어진 흔적이 없읍니다.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거나 시어미가 며느리를 죽였다는 것은 모두 事理에 맞지 않읍니다. 그런데 그의 종 四丹은, 일가도 친척도 아닌 李次望이 그 집에를 드나들었으며 崔女人이 아이를 낳았다고 明白하게 供招하였읍니다. 匡善의 六寸 匡辰은 피묻은 衣服을 찾아 보라는 말로 분명히 對質을 하였읍니다. 崔女人이 함부로 淫行을 하다가 그 며느리에게 發見되어, 반드시 殺害하겠다는 마음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다가 틈을 노려 刺殺하고 거짓 며느리가 제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처럼 꾸민 것이 단연코 疑心이 없읍니다. 崔女人과 李次望을 나무칼을 씌워 囚禁하고 處分이 있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특히 御史 李崑秀르 派遣하여 자세하게 조사시켰더니 御史의 書啓에 아뢰기를, "趙匡辰은 崔女人의 가까운 親族으로서 덮어 숨기려고 생각지 아니하고 곧 도리어 暴露시키고 있으니 이 事件의 關鍵은 匡辰에게 달려 있는 것 같읍니다. 四丹의 供招 속에 '崔女人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머리에 喪笠을 씌고 있으나 어두운 밤이어서 그 낯을 알 수 없었는데 匡辰이 次望을 告發하라는 뜻으로 부탁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次望을 告發하였으나 지금에 생각하니 喪笠을 쓴 자는 반드시 匡辰일 것입니다. 그 집은 傳染病患者가 있는 집인지라 온 마을 사람이 往來하지 아니하고 匡辰이만이 홀로 드나들었읍니다'고 하였읍니다. 그런 까닭에 條目을 들어 하나하나를 匡辰에게 따지어 訊問하였더니 拷問이 일곱 차례에 이르러서 홀연 바른대로 供招하였습니다. 元犯으로 斷定하여도 아마 의심할 만한 데가 없을 것 같읍니다"하였다. 刑曺에서 아뢰기를, "臣이 가서 대신에게 보여 意見을 말하게 하고 여러 堂上官도 각각 所見을 陳述하게 하라는 御命을 받들고 領議政 金致仁에게 가서 보였더니 말하기를, '匡辰이 죄를 自服하여 죄상은 남김 없이 들어났읍니다. 이 事件은 倫理의 紀綱에 관계되는 큰 事故로서 主犯과 從犯을 區分할 수 없읍니다. 한 事件으로 두 사람을 死刑하는 것을 의심하는 바 아니나 崔女人이 아직도 服罪하지 않았으니 恨歎스럽읍니다. 嚴重하게 刑訊하여 自服을 받도록 하십시오' 하였읍니다. 監司에게 분부하시어 嚴重히 刑訊하여 服罪를 받게 하는 것이 어떨가하여 아뢰나이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平山郡의 殺獄事件은 크게 의문이 있는 事件이다. 이제 3年이나 끌어 왔는데도 아직도 完全한 解決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가 시어미와 며느리 사이면서 殺戮(살육)이 일어나고 양반의 族屬이면서 姦淫하고 속이니 그 謀計는 지극히 끔찍하고 일은 지극히 더럽다. 倫紀를 損傷하고 風俗을 破壤함이 이 事件보다 더 甚할 것은 아직 없었다. 朝廷이 이 事件에 대하여 거듭 愼重한 처리를 더하여 같이 査實하고 또 査實하면서 번거롭고 重複됨을 싫어하지 않고 道의 調査와 曺의 언의를 거침이 이미 여러 차례였다. 그러나 거의 신 신고 발바닥 긁는 것 같은 느낌을 免치 못하더니 御史가 調査한 文書를 보고서야 비로소 속이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인 것을 증험(證驗)할 수 있었다. 崔女人은 시어미요 朴女人은 며느리다. 崔女人이 淫行하는 버릇에 빠져서 朴女人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죽여서 그 입을 없애야겠다는 한결같은 생각을 이미 朴女人의 신행 온 처음부터 품고 있다가 마침내는 칼과 새끼를 함께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所謂 奸夫라는 것은 하마터면 李次望으로, 잘못 斷定할 뻔하다가 마침내 趙匡辰에게로 歸結된 것이다. 이 事件의 顚末은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대체로 목매고 칼로 찔렀다는 一件으로 말하면 마땅히 남이 한 일이냐 자신이 한 일이냐를 區別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목을 먼저 매고 칼로 찔렀거나 칼로 먼저 찌르고 뒤에 목을 매었거나를 不問하고 그러한 일은 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可能한 일이 아니며 可能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이미 저절로 판단되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목매고 스스로 칼로 찔렀다고 한 것은 檢驗官의 檢狀이 잘못된 것이다. 남이 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때는 대낮이다. 남편이 뜰에 있었으니 시어미가 비록 그 惡行을 저지르고자 하더라도 며느리가 어찌 그 악독한 짓을 즐겨 받겠는가 그 칼로 찌르고 새끼로 목맬 때 입에 만약 울부짖는 소리가 없었다면 손에 반드시 막다가 끊긴 傷處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모두 明白한 證跡을 볼 수가 없다. 찔린 흔적이 깊고 얕은 것을 합하여 네 곳이나 되었으니 그러고도 한칼에 목숨이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목맨 흔적이 딴딴하고 紫色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이미 初檢에 나타났으니 또 죽은 뒤에 목맨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목매고 칼로 찔린 根本原因을 알려면 먼저 淫奸하였다는 말의 虛僞인가 眞實인가를 가려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次望의 이름 字는 檢驗때의 招辭에 조금 나오더니 監司의 장계에 元犯으로 斷定되었다. 門안서 서로 보고 밤중에 몰래 나갔다고 云云하여 四丹 母女가 같은 말로 供招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次望을 奸夫로 斷定한 文案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아이를 배었느니 落胎하였느니 한 말은 끌어내기만 하고 깊이 조사하여 밝히지는 아니하여 활의 시위를 당기기만 하고 살을 내 쏘지는 않는 것처럼 문득 그것의 귀취를 沒却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監司의 狀啓가 잘못인 것이다. 이러한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은 事件을 어둠속에서 손더듬으로 물건을 찾듯이 어림짐작으로 斷定을 내려 가지고 곧 바로 死刑으로 推定한 것은 刑獄을 愼重하게 자세히 살펴야 할 政治의 道理에 크게 어그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가까이 데리고 있는 신하에게 命하여 가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직접 얼굴을 살피고 말을 듣고 널리 與論을 探擇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야 前日의 獄案을 一大 번복하고 罪人은 바로 찾아내었다. 전번까지의 許多한 情狀과 虛僞는 모두 빗물(雨水)이 깊은 데로 흐르듯 결국 도달하여야 할 결론으로 歸結되었다. 崔女人의 淫行의 證跡은 저절로 綻露되고 次望의 죄없이 法網에 걸려든 원통함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奸夫는 匡辰이라는 結論이내리었다. 匡辰의 招辭에 말하기를 묶어놓고 목을 매고 또 칼로 찔렀다고 하니 朴女人이 손을 움직일 수 없었으니 찌르는 칼을 막으려고 할 수 없었음을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그의 남편은 말안장을 빌리려고 나가고 그의 계집종은 나물 캐러 보냈다고 하니 집에는 사람이 없고 이웃에는 證人이 없었으니 부르짖은들 누가 들었겠는가. 처음 次望이 誣告를 當한 것은 오로지 匡辰이 禍를 남에게 轉嫁하려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다가 여러사람의 耳目을 眩惑하게 만든 計略에 말미암은 것이다. 次望이 衰服을 입고 있어서 衣冠의 겉모양이 匡辰과 같았던 것이다. 次望이 한 洞里에 살았으니 참외밭에서 신들맨 사람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匡辰이 次望에게 덮어 씌우려고 한 번 四丹에게 부탁하고 두 번째는 鳳元을 使嗾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제 마음대로 만들어 내어놓고는 가만히 제혼자 懷心의 微笑를 지었으나 하늘의 理致가 밝고 밝아서 神이 먼저 목숨이 죽고 삶을 定하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 집안의 喪人을 잘못 認定시키려고 하였다는 말은 次望과의 對質때의 招辭에서 자복하였다. 拷問하지 않고 審問하였는데 匡辰이 服罪하고, 對質하니 崔女人이 말이 막히고 말았다. 이것이 所謂하루 아침에 환하게 깨닫는다는 것으로서 眞情이 아닌자는 그 말을 빈틈없이 다 꾸며 댈 수는 없다는 것이다. 刑曺의 回啓中에 두 가지로 의심을 일으키고 있으나 그것이 진실로 그러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겠다. 어찌 그러하겠는가. 목을 매는 것과 칼로 찌르는 것을 비록 同時에 下手하였더라도 목맨 것은 죽는 시간이 늦고 칼로 찌르는 것은 빠른 것이다. 淫女와 奸夫가 兇行을 犯할 때의 마음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일이다. 안장을 빌리러 간 자는 곧 돌아올 것이요, 나물 캐러 간 자도 곧 돌아올 것이다. 두렵기도 하고 초조 不安하기도 하여 結末이 빨리 나기만 바랐을 것이니 이미 목을 졸라매고 또 칼로 찔렸을 것이다. 짐짓 뽕 써는 칼을 찾은 것은 행적을 감추기 위함이요, 다시 농안에 있던 옷을 입힌 것은 그 흔적을 숨기려는 것이다. 목매는 것을 더욱 힘쓰지 않고 칼로 亂刺를하였다고 하여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아이를 배었느니 落胎를 시켰느니 하는 이야기는 次望에게 대한 경우에는 진실로 자세히 事實을 조사하여야 할 것이지만 匡辰에게 있어서는 의심할 것이 없다. 요망스런 계집종과 교활한 捕校들의 前後의 僞證은 匡辰의 威脅과 請囑 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이를 배고 안 밴 것과 落胎하고 안 한 것이 匡辰의 罪를 輕하게 하거나 重하게 할만한 것은 못된다. 아이를 배었느니 落胎를 시켰느니 하는 문제가 落着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여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御史의 날카로운 調査訊問의 復命을 받고 곧 움직일 수 없는 獄案을 이미 作成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首犯과 從犯을 區分하여 그에 該當한 律로 처단할 뿐이다. 崔女人에게는 申速히 自服을 받고 李次望은 釋放하라"라고 하였다. 乙酉年에 刑曺가 回啓하기를, "匡辰은 昨年에 이미 死亡하였읍니다. 崔阿只는 法典의 規定에 의하여 詳覆의 節次를 施行함이 어떠하겠읍니까"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대체로 말하면 이 殺獄事件의 情壯은 千가닥 만가닥으로 얽혀 있으나 그 結論을 要約한다면 姦淫事件과 殺人事件을 兼한 것이다. 그런데 姦淫事件이 殺人事件의 근본이 되었으니 먼저 姦淫事件을 決定 짓고 다음에 殺人事件을 처리하는 것이 順序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姦淫事件으로 말한다면 李次望이 奸夫라는 말이 初檢때의 招辭에 若干 나오더니 前任 監査 嚴思勉의 査啓에 아주 確定되었다가 御使의 調査 結果로 문득 趙匡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崔女人과 匡辰은 媤五寸間인 親族이다. 그들은 본래 언제던지 서로 往來할 수 있는 것이다. 崔女人이 과부된지 10餘年인데 나이가 한창 젊을 때인 匡善의 어린 時節에는 일찌기 失行하는 일이 없다가 이제 나이 꽤 많아지고 匡善이도 成長한 뒤에 비로소 이렇게 어지럽게 淫行하는 일이 있을까, 이것이 첫째로 疑心할만 한 일이다. 비록 淫行의 現場을 朴女人에 發見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힘을 같이하여 죽였다고 말하나 匡善은 나이가 젊으니 永久히 홀아비로 둘 수는 없는 것인즉 또 장차 後娶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 며느리가 가고 나면 또 한 며느리가 생기는 것인데 어찌 며느리를 데려 오는대로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둘째로 의심할만한 일이다. 李次望이 드나들었다고 云云한 說은 한 가닥의 소문으로 퍼지더니 四丹의 母女가 二更무렵에 次望이 大門에서 나왔다고, 證言함에 이르러 次望의 嫌疑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었다. 그러던 것이 御史의 訊問에 이르러서는 四丹은 誣告하였다고 말하여 곧 次望의 억울한 罪名은 벗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四丹의 最終의 招辭에 匡辰이 崔女人의 房에 누워 있엇다고 한 말도 또 뒷날 다시 調査할 때 거짓말이었다고 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이 셋째로 의심할 만한 일이다. 四丹의 이랬다 저랬다하는 招辭는 道의 調査에서 바른대로 陳述한다고 말한 것은 오로지 中營의 周牢(주뢰)가 두려워서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匡辰을 아끼고 무엇 때문에 次望을 미워하여 다만 次望만을 말하고 匡辰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가 御史가 조사할 때에는 도리어 次望은 빼고 대신 匡辰을 넣었으니 이것은 바로 나어린 천한 계집아이가 도무지 아무런 主見도 없이 次望이냐고 물으면 次望입니다라고 하고 匡辰이냐고 물으면 匡辰입니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하면 살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알 뿐이다. 앞에서 한 供招와 뒤에서 한 供招가 반드시 그렇게 한 것 같이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네째로 의심할만한 일이다. 疑心스러운 事件에 있어서 廉探(염탐)하여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비록 常例라고 하나, 전번에 監司가 調査할 때 廉探한 것은 바로 李次望이 姦夫라는 것이요, 그 뒤에 御史가 調査할 때 염탐한 것은 바로 趙匡辰이가 姦夫라는 것이다. 次望에게로 끌어 모으면 그것이 條理가 있는 것 같고 匡辰에게로 끌어 모으면 또한 그것에 條理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의 輿論을 구성하는 여러 사람은 바로 前日의 輿論을 構成한 같은 여려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輿論을 염탐한 것이 前의 것과 뒤의 것이 判然히 對立되는 두가지 형태를 만들었다. 그러니 次望의 眞·假와 匡辰의 是·非를 누가 능히 가려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섯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崔女人이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한 가지 일은 곧 姦淫事件의 急所이다. 죽여서 묻거나 아니면 버리는 것은 또한 淫亂한 女子들이 形跡을 덮어 숨기는데 取하는 普通 있는 手法인 것이다. 事件에 있어서는 四丹은 다만 이불을 두르고 있었다고 말하였고 각 證人들의 供招는 다만 風聞에 들었다고만 일컫고 있다. 낳은 아이를 묻었는지 버렸는지는 結末을 짓지 못하여 거의 證憑할 근거가 없다. 이것이 여섯째로 의심할 만한 일이다. 屍親 朴長赫은 자기의 딸을 위하여 원수 갚으려는 맘으로 崔女人의 奸夫가 누구라는 것을 반드시 더할 수 없을 만큼 힘을 다하여 알아 보았을 것인데 初檢 때의 招辭에는 별로 다른 말이 없었고 覆檢때으 招辭에 비로소 崔女人은 繼母로서 몸가짐이 不美하다는 말을 자기 딸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道에서 調査할 때에는 처음부터 이 이야기에 대하여 李次望을 말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招辭를 憑據하여 자기 아들의 擊錚呼訴하느 原情文에 썼으니, 이렇게 要緊하고 重大한 일을 처음에 이렇게 泛然히 次望에게 言及하였으니 뒤에도 또한 남의 말을 끌어다가 匡辰을 지적하는 일이 없겠는가, 이것이 일곱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두 곳에 失火하였다는 이야기로 처음에는 朴女人의 惡行을 의심하더니 증거로 내세우는 論議는 마침내 崔女人의 淫行으로 혐의를 돌렸으니 이것이 여덟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手記를 바칠 때에 崔女人의 며느리를 虐待하는 일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다고 云云하여 여러 趙氏들은 崔女人이 慈愛하지 않은 일에 非難을 돌렸는데 屍親은 崔女人의 몸가짐이 不美한데서 생긴 일이라고 斷定하여 兩說이 서로 矛盾되니 이것이 아홉째의 의심되는 일이다. 朴女人이 趙氏네 집에 新行온 것이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동안은 崔女人과 匡善이 交代로 傳染病을 앓았기 때문에 그들의 無故한 날을 計算하여 보면 30餘日에 지나지 않는다. 崔女人이 비록 淫行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하필 며느리가 새로 온 때이고 染病을 앓고 막 일어난 뒤에 다시 匡辰을 맞아 들여 함부로 淫行을 하였겠는가. 또 더군다나 30餘日 사이에 무엇이 그리 바쁘고 급하여서 한편으로 동여 매고 한편으로 殺戮하였겠는가, 이것이 열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匡辰의 自服한 招辭에 崔女人과 더불어 姦通한 것이 癸卯年부터라고 하였는데 癸卯年에서 乙巳年까지는 3年이란 오랜 동안이다. 匡善은 前室所生의 長成한 아들로서 義理를 따지어 官에 告訴하고 義絶하는 일은 비록 辦斷하지 못하더라도 事理를 설명하여 말리는 것이 무엇이 옳지 않은 바 있어서 崔女人의 날뛰는대로 내맡겨 두고 집안의 더러운 恥辱을 돌아보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열한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崔女人은 匡善에게는 母이기에 義를 끊기 전에는 그의 醜行을 禁止시키지 못한 것이 혹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낱 匡辰에 대하여서는 말 핑계를 만들어 쫓아보내고 다시 자기집네 발걸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워서 한번 두 번 마침내 자기의 아내를 除去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체 하였겠는가, 이것이 열 둘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五寸 叔姪의 사이에 이러한 倫紀上의 變故가 있었다면 匡善은 비록 자기의 체모를 위하여 숨겼다고 하더라도 한 마을의 여러 趙氏들이 어찌 그것을 禁止시켜서 양반이라는 이름을 保全하고 門戶를 維持할 計策을 생각하지 않고 一黨이 漏泄을 두려워 하는 것을 普通일 보아 넘기듯 하였겠는가, 이것이 열 세째로 의심되는 일이다. 次望의 이름이 奸夫로 일컬어진 것은 四丹의 입에서 나왔는데 四丹의 이 말은 어떤 이는 趙鳳元이 慫慂하였다고 하고 어떤 이는 趙匡辰이 威脅하여 시켰다고 하니 鳳元과 匡辰은 바로 次望에게는 피맺친 怨恨의 대상이요, 뼈에 사무치는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次望이 釋放된 뒤에 匡辰에게 往復한 書面에는 官에 告訴하여 鳳元을 推治하게 하고 宗侄에게 말을 보내어 四丹을 笞로서 治罪하게 한다는 것 뿐이니 次望이 匡辰에게는 처음부터 죄잡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열 네째의 의심나는 일이다. 御史가 깊이 조사하여 摘發한 뒤에 宗傑이, 匡辰은 趙氏의 집안에서 絶緣한 族屬이요, 崔女人은 趙氏의 家門에서 내쫓은 여자라고 하면서 돌아보거나 주저하는 것이 없었으나 淫行한 情狀이나 形跡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立證한 일이 없고 다만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며 결국 의심할 만한 端緖라고 하여 指摘한 것은 특히 事件의 端緖가 드러난 뒤에 匡辰이가 匡善으로 하여금 辨明하는 文書를 提出시키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는 등 한 두 가지 그냥 지껄이는 말 뿐이다. 이것이 열 다섯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殺人事件으로 말한다면, 첫 번의 檢驗과 두 번째의 檢驗이 비록 事實과 틀리고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四肢에 꼭 죄어 묶은 흔적이 없고 두 손에 칼을 막느라고 끊긴 자국이 없다고 한 것은 또 스스로 목매고 스스로 칼로 찌른 證據라고 하기에 足한 것이니 全然 根據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첫째로 의심할만한 일이다. 監司가 調査하여 올린 啓奏에는 無寃錄의 누은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條의 論述을 引用하여 初檢· 覆檢에서 바로 自刎하였다고 斷定한 것이 잘못임을 辨證하고 또 無寃錄의 急所를 한 칼에 곧 致命한다는 條의 記述을 引用하여 初檢·覆檢의 檢驗狀에서 손으로 칼을 막느라고 끊긴 자국이 없다고 한 文案을, 그럴 것이라고 說明하고 또 죽은 사람을 붙들어 일으켜서 꿇어 앉혀가지고 거짓 스스로 목맨 것처럼 만들었다는 등의 말을 하여 崔女人의 計略 쓰는 것이 陰凶하고 참혹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칼에 刺傷될 때 그가 앉았는지 누웠는지 그것을 누가 가려낼 수 있으며, 칼의 흔적이 네 곳이나 있으니 한 칼에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食道의 목구멍이 먼저 끊어진 것을 누가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四肢와 몸둥이가 곧게 쭉 뻗는 것인데 붙들어 일으켜서 앉힌다는 것은 누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둘째의 의심할만한 것이다. 피 묻은 옷을 갈아 입었다는 한 가지 일이 가장 혐의를 잡는 말의 端緖가 되고 있으나 이것은 다만 崔女人이 極口 辨明할 뿐 아니라 設令 정말 피 묻은 옷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 시어미된 자가 갑자기 그의 며느리가 칼로 刺傷을 입고 목숨을 끊게 되어 피 줄기가 그치지 않으면 깜짝 놀라 그 앞에 가서 구제하려고 요행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常情이니 이렇게 하는 사이에 피가 옷 자락에 뿌려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으로 사람을 찔러 죽인 證據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일인지 알지 못하겠도다. 이것이 세째의 의심나는 일이다. 匡辰이 비록 말(斗)만큼 膽이 크다고 하더라도 아침에 崔女人과 謀議하여 朴女人을 殺害하고 저녁때에 말소리나 얼굴 빛을 動搖하지 아니하고 手標를 써 주는 자리에 참여하여 母字 위에 繼字를 더 써 넣으라고 불러 준다는 것은 決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네 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崔女人이 匡辰과 더불어 깊이 마음을 같이하여 朴女人을 꼭 除去하려고 한다면 어두운 곳에서 兇行을 犯하여 말하는 입을 없애고 形跡을 덮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서 白晝의 大村 안에서 이 10分의 8, 9分을 發覺되기 쉬운 犯行을 하였겠는가. 이것이 다섯째로 의심할 만한 점이다. 종이 나물 캐러 간 것은 時間이 꾀 걸리겠지만 아들이 안장 빌리러 나간 것은 더디 돌아올지 빨리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匡辰을 몰래 딴 곳에 숨겨 두었다가 함께 朴女人을 잠간 사이에 죽인다는 것이 이미 위태한 방법임을 면치 못하거니와 모시 묶는 이웃 老婆나 쌀 빌러 오는 마을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들어오는 일이 없을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이 여섯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匡辰이 만약 崔女人과 더불어 실컷 通姦하고 서로 뜻을 같이하여 殺人罪를 저질러 놓고는 갑자기 背信하여 홀로 제 몸은 빠져나가 奸夫는 次望에게 돌리고 殺人事件은 피 묻은 옷으로 證據를 잡는다면 저 崔女人이라는 자가 곧 머리를 숙여가지고 순순히 받아 들이고 네가 나와 더불어 일찌기 이러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도리어 나를 죽는 곳에 밀어 넣고 살길은 너 혼자서 차지하느냐 하면서 그 간사함을 暴露하고 憤함을 表示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前後의 崔女人의 供招에 일찌기 이러한 말이 없었으니 이것이 일곱째의 의심나는 일이다. 비록 普通의 殺人事件에 있어서도 죄를 自服하기까지에는 여러 해가 걸리며 혹은 拷問이 여러 백번에 이르는 것이 있다. 이 두 件의 獄事는 倫紀에 관계되는 큰 犯罪이다. 그런데 匡辰이 일곱 번의 刑訊을 받고 服罪하였다는 것은 도리어 의아를 일으킨다. 생각컨대 匡辰이 許多한 事情이 모두 저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여러 사람의 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도리어 자기 한 몸을 헛되게 던져 버리고자하여 그렇게 한 것일까. 이것이 여덟째의 의심나는 일이다. 무릇 殺人事件에 있어서는 傷處가 重要하고 證言이 다음으로 重要한 것인데, 傷處는 스스로 목을 매었느니 남에게 매임을 당하였느니 스스로 칼로 찔렀느니 하여 각각 한 件의 文案이 作成되었고 所謂 證言이라는 것은 하나도 憑考하여 물을만한 사람이 없다. 前後의 文書는 大部分 虛空에 뜬 것이요 어둠 속의 어름 짐작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아홉째의 의심나는 일이다. 趙匡辰이 罪를 自服한 뒤에 崔女人은 마땅히 辨明할 餘地가 없는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抵抗하여 속이다가 結局 同推者에게 服罪하였으니 혹은 무슨 별다른 숨은 事情이 있어서 그리하였던가 이것이 열째의 의심할 만한 점이다. 監司의 査啓에는 먼저 칼로 찌른 뒤에 목매었다고 斷定하여 목맨 것이 痕跡이 없으니 死後에 거짓 목맨 것 처럼 꾸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匡辰과 崔女人의 招辭에는 수건으로 먼저 목을 졸라 매고 이어 칼로 찔렀다고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生前에 목맨 것도 또한 그 痕跡이 없는 것인가. 이것이 열한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匡辰과 崔女人의 招辭에 이미 朴女人의 두 손을 묶었다고 말한 것이 없고 또 밀어뜨려 눕혔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손에 칼을 막느라고 베인 자국이 없는 것과 누워서 칼을 받은 것이라는 등의 말은 또한 結局 無意味한 것이 되었다. 이것이 열 두째의 의심나는 점이다. 여자의 知覺은 비록 얕고 짧은 것이라고 하나 이러한 兇計를 꾸미려면 반드시 꾸미는 方法이 교묘할 것인데 그날 집에 있은 자는 다만 崔女人과 匡善뿐이고 匡善도 또한 잠간 外出하였으니 事件이 드러난 뒤에 장차 누구에게 밀고 핑계하려고 하고 무찔러 죽이는데 어렵게 여김이 없었겠는가. 이것이 열 세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교활한 捕校와 요망한 계집 종이 비록 匡辰의 誘引과 위협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같이 罪囚가 되어 같이 官庭에 들어 갔으니 許多한 돈과 財貨도 처음부터 去來된 형적이 없으며 5兩의 賂物은 이미 딴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兩班族屬의 氣勢도 또한 부려 볼 길이 없었는데 두어마디 주고 받고는 문득 事件의 構成의 가장 重要한 部門을 빼버렸으니 四丹이 李次望을 指摘하여 말한 것이 鳳元의 염탐한 일을 뒷받침하고자 한 계획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알겠는다. 이것이 열 네째의 의심할 만한 일이다. 實情과 虛僞를 헤아리기 어렵고 事件의 變化는 限定이 없다. 어떤 者가 崔女人에게나 혹은 朴女人에게 쌓인 怨恨이나 깊은 憤怒를 품고 있는 자가 뒷문으로 들어가고 또 뒷문으로 나가는 비밀한 행동을 하면서 별안간에 兇行을 犯하여 한편으로는 禍를 轉嫁하는 計策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憤怒를 함부로 부렸으나 崔女人과 匡善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나 아닐까. 비록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그러할 수 있는 事理가 全無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이 열 다섯째의 疑心할 만한 일이다. 이 殺人事件이 疑心나는 것은 온 나라가 아는 바인데 御史의 調査를 거친 뒤로부터는 문득 움직일 수 없는 獄案이 作成되어 匡辰은 服罪하고 지레 쓰러져 죽어 버렸고 崔女人은 罪情을 自服하고 詳覆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다시는 들춰내 논의할 것이 없다. 그러나 獄案을 펴보니 마디마디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 姦淫事件을 살펴보니 疑問되는 것이 15곳이 있고 殺人事件을 상고하여 보니 疑問되는 것이 15個所나 되어 통털어 말한다면 30個所나 된다. 의심나는 점이 이미 30個條項의 많음에 이르는 것을 完結되었다고 말하면서 因循 遲延하여 時機를 逸失하는 것은 또한 治獄을 愼重히 하는 道理에 어긋나는 것이다. 大臣과 刑曺의 여러 堂上官은 각각 意見과 條目을 들어 論述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刑曺의 奏啓에 의하여 大臣에게 收議하였더니 '右議政 蔡濟恭은 平山의 殺獄事件은 그 情狀이 매우 복잡한 것인데 判下를 받들어 읽어보오니 마디마디가 다 適中합니다. 그러니 그냥 死罪囚로서 詳覆의 節次를 施行하는 것은 決코 온당하지 못한 것을 알겠읍니다'하였고, 判中樞府事 李在協은 '平山의 殺獄事件은 의심나고 분명치 못한 것이 많더니 엎드려 判付를 읽고 나니 임금님의 이 말씀 한마디로 事態를 判斷할 수 있을 것 같읍니다. 詳覆의 節次를 施行하는 것을 가볍게 논의할 수 없읍니다'하였고, 判書 심이지는 '다시 조사하여 實情을 알아내는 것이 좋겠읍니다'하였고, 參判 柳戇(유당)은 '법대로 처단하는 것이 아마 안할 수 없을 것 같읍니다'하였고, 參議 朴天衡은 '다시 조사하여 實情을 알아내는 것이 옳겠읍니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姦淫에 관계된 事件은 姦夫가 없으면 成立될 수 없고 殺人事件은 正犯이 없으면 成立되지 않는 것이며, 의심나는 事件은 確證이 없으면 成立될 수 없는 것이다. 이 事件은 姦淫事件이요 殺人事件이요 의심 있는 事件이다. 세가지를 兼해 가졌으며 갖추어져 있다. 한 가지 事件만이라도 오히려 憤怒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세 가지 事件의 獄案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確定 되었으니 혹 罪를 輕減하여 살려 주자는 論議가 어찌 容許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姦夫는 匡辰이라고 하는데 그만 감옥에서 지쳐서 죽어 버렸으며 殺人事件의 正犯도 匡辰이라고 하는데 그만 감옥에서 지쳐서 죽어 버렸다. 의심나는 部分에 대한 要緊한 證人도 匡辰이라고 하는데 그만 이미 감옥에서 지쳐서 죽어 버렸다. 匡辰은 묻는대로 예 그렀읍니다 하고 곧 服罪한 것은 常理 밖이요, 朴女人이 寃痛하게 죽었으니 죽인 자가 대신 죽는 것은 法의 常道이다. 그러나 匡辰은 없으면 제가 無罪하다고 벗어나는 일도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 주는 것도 그 方途가 없다. 이 淫獄, 殺獄, 疑獄에 대한 세가지 獄案은 장차 제자리에 나갈 날이 없을 것이다. 이 까닭에 大臣과 獄官에게 두루 물어 보아 結末을 짓고자 하는 것이다. 奸夫가 없고 正犯이 없고 確證이 없는데 다만 한 낱 崔女人을 死刑하고 이여자가 세가지 事件의 主謀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그 죄로써 그 律을 適用하는 일이 못된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의심나는 證跡을 가지고 死刑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輕率하게 지레 처단하지 않으려고 하여 失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말하는 이가 혹은 崔女人이 服罪한 것을 가지고 어렵게 여기는 端緖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치 않은 自白이었으며 무분별한 착고였음은 이미 匡辰도 또한 그러하였던 것이다. 法律이라는 것이 얼마나 重하고 公正한 것인데 거두어 死刑하기에 急하게 굴어서 苟且한 것도 생각지 않는다면 그 弊害는 도리어 事件을 顚倒에 가깝게 判決한 것보다도 오히려 더 甚한 것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事件은 지극히 淫亂하고 猥褻(외설)한 것이나 本罪는 시어미가 며느리를 죽인 것이다. 살아 있는 者나 죽어 버린자를 勿論하고 實地의 犯行이 있는 眞犯으로 勒斷하는 것은 또한 風俗을 敦厚하게 하고 倫紀를 尊重하는 政治에 어그러지는 것이다. 앞 뒤의 經緯를 살펴 볼 때 한 마디로 말해서 事件이 成立되지 않는다. 마땅히 崔女人을 情狀을 참작하여 釋放할 것을 분부하되 適用하여야 될 合當한 律을 卿等이 널리 法文을 상고하고 事理를 論議하여 처리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아뢰기를, "만약 士族의 婦女가 風敎를 더럽히고 혼란하게 하였다는 罪(士族婦女 瀆亂風敎)로 다스린다면 死刑에 해당하게 되고 만약 父母가 子女를 죽이되 마음 먹음이 흉악하고 참혹한 죄(父母殺子女 用意凶慘)로 다스린다고 하여도 또한 당연히 死刑에 해당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條文을 버리고는 다시 適用할만한 條文이 없읍니다. 大明律의 鬪毆條에 祖父母·父母가 道理를 違背하고 故意로 子孫의 아내를 殺害한 자는 杖1백. 流2千里의 刑에 처한다는 條文이 있습니다. 오직 이 條文이면 通用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이번 이 처분은 天地造化의 精妙한 理致에서 나온 것이니 臣等의 淺見으로 律名의 輕重을 논의하는 것은 실로 방자한 行動이 되는 것이므로 上裁를 기다립니다"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回啓한대로 施行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13年에 振威의 崔水同이 호미로 며느리 者斤德이를 찍어 25日만에 致死하였다. 死因은 被傷이었다. 그의 아들 昌大가 上言하여 아뢰기를 "저의 아비가 밥을 가져오라고 하니 저의 妻가 밥상을 들고 나오다가 솔나무 뿌리를 차고 넘어져서 장딴지에 가죽이 벗어졌는데 그것에 피가 뭉쳐서 부스럼이 된 것을 아내가 가위를 가지고 제 손으로 째버렸읍니다. 그리고는 그 父母가 왜 傷處가 났느냐고 물으니 아내가 망녕되게 시아버지가 毆打하였다고 대답하였읍니다. 傷處에 쇳毒이 점점 심하게 되어 죽기에 이르렀읍니다. 처남 申時金이 虛構로 誣告하여 殺人事件으로 만들었읍니다"라고 하였다. 그 道에서 調査하여 올린 啓本에 이르기를, "시아비가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心情은 다 같은 것인데 17歲인 어리고 病이 많은 며느리를 가위로 무릎을 찌르고 호미의 끝으로 발을 찍은 것은 사람으로서의 情理를 끊고 倫紀를 敗喪한 行爲입니다. 結案을 기다릴 것도 없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읍니다. 大明律에 道理에 어그러지는 行動으로 子婦나 孫婦를 毆打하여 죽게 한 자는 普通사람 사이에 일어난 毆打致死보다 죄를 減等한다는 條文이 있으나 이것은 實情을 自服한 뒤에 罪의 輕重에 따라 法에 비춰 論議할 것이지만 그렇게 殘忍하고 포악한 행위를 한 자가 萬에 하나도 살아 날 길은 없을 것이니 拷問하여 實情을 알아내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대한 判付에 이르기를, "朝廷에서 이 殺人事件에 대하여 두 번 세 번 관계 書類를 閱覽하니 비참한 생각이 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래도록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20錢의 작은 물건으로 新婚한 어린 며느리를 逼迫하여 주먹과 몽둥이와 칼과 호미로 갖추어 참혹하고 악독한 행위를 더 할 수 없이 하고 협박하고 구타하고 逐出하여 죽게하고야 말았으니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다음 가는 일이다. 시아비는 며느리를 죽이고 母는 그의 아들을 告發하고, 더 심한 일은 아비는 그 아들을 핑계하고 아들은 제 아비의 죄를 立證하기에 이르렀으니 情狀과 證跡의 眞僞는 勿論하고라도 倫理가 아주 絶滅하여 餘地가 없다. 종이에 가득한 供招에 다시 서로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었다. 水同의 情狀은 진실로 미워할만 하다. 그냥 殺害한 것과 殺意를 가지고 故意로 殺害하되 마음 쓰는 것이 참혹한 것과는 오히려 情狀에 있어서 差等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罪를 減等한다는 律文도 있으니 반드시 한결 같이 訊問하여 人倫을 멸시하고 風俗을 敗頹시키는 供述을 받아서 다시 登聞할 까닭은 없다. 바로 律을 상고하여 처단하라. 昌大는 처음에는 어째서 아비의 죄를 證言하고 이제 와서는 무슨 원억을 호소한단 말이냐,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할만하다. 昌大도 또한 엄하게 매를 쳐서 먼곳에 流配하라"라고 분부하였다. 殺 弟 肅宗 21年에 京畿監司의 狀本에 인한 刑曺의 啓目에 아뢰기를, "權 增이 자기의 아들 斗白과 사위 朴莫立等과 合力하여 그의 아우 權 培의 夫妻와 그 子女 3人을 殺戮하였읍니다. 大明律에는 兄이나 맏누이가 아우나 누이를 故意로 殺害한 자는 杖1백. 流3千里의 刑에 처하고, 從弟나 從妹를 故意로 殺害한 자는 絞刑에 처한다고 하였으며, 癸亥年의 受敎에는 아비가 아들을 죽인 자와 兄이 아우를 죽인 자는 罪가 杖·徒에 그친다고 하였고, 先朝의 受敎에는 死刑으로 定하였으며, 丙寅年의 受敎에는 父母가 子女를 殺害하되 마음 쓰는 것이 흉악하고 참혹한 자는 비록 死刑으로 처단하더라도 그 情狀과 犯行의 手法에 따라 當該曺에서 臨時로 稟啓하라고 하였으므로 臣의 曹에서 敢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受敎의 規定에 의거하여 稟旨하오니 上裁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ㄷ. 判付에 모두 때를 기다리지 말고 斬刑에 처하라고 하였다. 23年에, 黃海道에 사는 奴 夢日이 그의 아우 夢立을 打殺하였다. 監司 李德成의 狀啓에 인하여 刑曺가 올린 啓目에 아뢰기를, "大明律에 兄·姉가 故意로 弟·妹를 殺害한 자는 杖1백. 流3千里의 刑에 처한다고 하였고, 乙卯年의 受敎에는 故意로 아우를 죽인 자는 死刑으로 論斷한다고 하였으며, 甲午年의 受敎에 大臣들이 논의하여 올린 啓目에 대한 判付에는 지금부터 뒤로는 一切 大明律의 條文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만약 情狀과 犯行顚末이 몹시 兇惡한 것은 主管하는 臣下가 臨時로 稟旨하여 처리하라고 判下하였읍니다. 大明律의 條文과 受敎가 이러하오니 上裁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判付에, "死刑으로 論斷하여 때를 기다리지 말고 絞刑에 처하라"고 하였다. 英組 10年에, 黃海監司 兪拓基의 啓本에 아뢰기를, "金貴益이 兄弟의 屍體를 불태웠으니 主務官司로 하여금 稟旨하여 依率 처단하게 하십시요"하였다. 大臣들에게 問議하였다. 右議政 金興慶은 아뢰기를, "大明律의 規定에 他人의 屍體를 損毁하거나 버린 자는 杖1백. 流3千里의 刑에 처하고 朞服親인 항열이 낮고 나이 어린자의 屍體를 損毁하거나 遺棄한 자는 杖70. 徒1年半이라고 하였는데 이 律은 너무 가볍고 死刑에 처한다면 너무 지나치는 것 같읍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佛家의 法을 좇을 것인가" 하였다. 右議政이 대답하기를, "세상에서는 말하기를 廢疾은 한 門中에 傳染하여 다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시골의 愚昧한 백성이 그 傳染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진실로 매우 미워할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吏曺參判 宋眞明은 아뢰기를, "그 情狀을 살펴보면 비록 無識한 데서 나온 일이기는하나 이것은 실로 前에 없던 變故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크거나 작거나를 가릴 것 없이 그 事態가 뒷날 폐해를 끼칠 만한 것이면 미리 堤防을 쌓아서 막아야 되는 것이니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禮義를 존중히 여기는 나라로서 平素에 小中華라고 일컫는데 제가 禮義의 나라에 나서 감히 至親의 倫理를 毁滅하는 일을 하였으니 더욱 슬프고 놀랄만하다. 吏曺判書의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여 미리 防止하라는 말이 옳도다. 死刑은 지나치니 세 차례 엄중하게 매를 친 뒤에 絶島에 定配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22年에 全羅監司 洪昌漢의 啓本에 아뢰기를, "金堤 사람 禹大惡只의 아우 益成은 性行이 悖惡하여 父母에게 不順하게 굴어서 기명을 破損하였다. 그의 兄이 여러 차례 毆打하니 益成이 제 兄의 집에 불을 질으려다가 이웃 사람에게 發覺되어 未遂에 그치었다. 땔나무를 베다가 또 제 兄을 찌르려고 하니 그 兄이 먼저 낫(鎌)으로 도로 益成을 찔러 바로 죽게하였다. 官으로부터 推問을 받고 죄를 自服하였다. 詳覆 때의 判付에 이르기를, "슬프다 五倫은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다. 지금 推問한 文書를 보니 정말 몹쓸 兄이요 패려한 아우라고 할 수 있다. 敎化가 宣揚되지 아니함이 이에 이르렀는가. 그러나 그의 犯行은 바로 受敎의 規定에 合致하는 것으로 여러 사람의 意見이 꼭 같으니 어찌 다른 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律文에 의거하여 처단하라"라고 하였다. 지금 임금 5年에 刑曺의 啓目에 아뢰기를, "長連 사람 高廷萬이 그의 아우 廷云을 殺害하였읍니다. 대체로 廷云이가 崔漢武를 刺殺한 것은 비록 지극히 兇惡하고 獰猛한 行爲이나 廷云은 이미 미친 사람입니다. 法典中에 도 미쳐서 사람을 죽인 자는 死刑을 輕減하여 定配하는 데 그치게 하였읍니다. 그런데 廷萬은 法律이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묶어 놓고 함부로 구타하고, 한 가닥의 生命이 끊어지지 아니하니 또 막대기로 구타하였읍니다. 사람의 兇惡하고 毒함이 어지 이렇게 極限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大明律의 條文을 상고하여 보니 兄·姉가 弟·妹를 故意로 殺害한 자는 杖1백·流3千里에 처한다고 規定하고 있읍니다. 廷萬이 그의 아우를 구타 致死한 것은 실로 故意殺害에 屬합니다. 道의 監司가 이 事件에 대하여 回答이 내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杖·徒의 刑에 처하기로 酌量하여 決定한 것은 너무 너그럽게 처리하는 잘못을 犯하였으며 또 格式의 規例에 違反되는 것이니 그 監司는 推考하고, 廷萬은 아우를 故殺한 本律로 施行하게 하시기를 請합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高廷萬은 제 자신이 죄에 걸리게 된 것과 그 아우가 犯行을 저지른 것은 정말 不幸한 中에도 또 不幸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人倫의 變故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 行爲이다. 그의 아우는 본래 正常한 사람이 아니니 法律에서도 마땅히 그에게 死刑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로하여금 일찌기 死刑囚로서 事件이 成立되지 않으며 또 屍體의 檢驗을 하지 않는다는 자세한 사정을 알았으면 제가 비록 우매하더라도 반드시 이러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杖·流의 刑이거나 杖·徒의 刑이거나를 莫論하고 結論은 死刑을 용서하는 것은 同一하다. 監司는 推問하지 말 것이며, 廷萬은 監司의 啓本에 의하여 律에 미쳐 酌量하여 放免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8年의 郭山의 金寶起가 그의 아우 珍光을 구타하여 卽日로 致死하였다. 珍光의 妻 金召史의 供招에 "어머니의 葬費를 兄弟가 나누어 負擔하기로 하는데 寶起가 쌀 2斗를 負擔 못하겠다고 말하므로 저의 남편이 대답하기를, 父母의 葬事에 드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애석합니까 하였더니 갑자기 저의 남편의 머리털을 꺼두르고 끌어내어 喪杖으로 머리를 구타하여 流血이 낭자하였읍니다"하였고, 寶起의 供招에는 "저의 母를 장차 아버지의 무덤 아랫 쪽에 장사하려하니 珍光의 아들 於仁老味가 저의 母의 무덤이 그 아래에 있다고 하여 여러 가지로 방해하므로 제가 꾸짖고 한번 구타하였더니 珍光이 제 아들을 꾸짖으려고 房에서 나가다가 엎드러져서 頭部가 負傷하였읍니다"라고 하였다. 監司의 題辭에 "喪杖에 피가 묻었으니 곧 寶起의 犯行임을 斷定한다"고 하였다. 乙巳年에 監司가 狀啓에서 아뢰기를, "삼가 大明律을 상고하여 보니 兄이 아우를 죽인 자는 죄가 杖·流에 그치게 되어 있고, 續大典에는 用意가 兇惡하고 참혹한 자는 싸우다가 구타 致死한 죄로 論한다고 하였읍니다. 이 殺獄事件은 用意가 흉악하고 참혹한 것과는 다르나 殺獄事件의 事理로써 論한다면 죄를 경감하여 살려주려는 논의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律名을 참작할 때에 바로 死刑으로 처단하기는 어려운 데가 있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殺人의 變故는 兄弟 사이에서 일어나고 立證은 叔姪이라는 至親 사이에 이루어졌으니 그 人倫을 손상하고 風俗을 破壤함이 세상에 殺人事件이 있은 以後로 아직 듣지 못한 일이로다. 도대체가 손자로서 祖母의 埋葬을 禁하는 일과 아우로서 兄弟間에 싸움을 한다는 일은 그의 叔父된 자 또는 兄된 자가 事理를 들어 峻嚴하게 꾸짖을 수 있는 일이며, 매를 때려 경계하고 계칙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다만 喪杖에 피로 물들인 것은 진실로 常漢들의 無識함에 말미암은 까닭일 뿐이다. 진실로 그의 本情을 생각하여 본다면 어찌 두 말의 좁쌀이라는 작은 物品 때문에 갑자기 아우를 殺害할 道理가 있겠는가. 監司의 啓本 跋辭에 "他人이라면 死刑에 처하고도 남음이 있겠으나 兄弟의 사이이므로 그 狀態를 살펴 볼 여지가 있읍니다"고 한 것은 진실로 正確한 論이라고 하겠다. 寶起를 情狀을 참작하여 定配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14年에 서울의 罪囚 李慶泰가 강제로 제 아우 起得을 목을 졸라매어 당장에 죽게하였다. 死因은 억지로 목매임을 당한 것이었다. 慶泰의 招辭에 "起得이 祖上 神主의 독보를 훔쳐다 팔고, 또 도둑의 무리에 가담하였다가 捕盜廳에서 刑罰을 받았으며, 어머니가 죽었는 데도 奔喪하지 아니하므로 從祖父인 德培에게 의논하고 목을 졸라 매어 죽였읍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의 完結 文案에 말하기를, "慶泰가 자기 아우를 목 졸라 죽인 전말을 낱낱이 服罪하였읍니다. 法典에 아비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 兄이 아우를 죽인 것은 죄가 杖·流의 刑에 처하는 데 그치되 만약 情狀과 手法이 몹시 惡한 자는 主務官司의 臣下가 隨時로 稟旨처리하라고 하였읍니다. 이러한 人倫을 損傷하는 殺人事件은 杖·流의 刑으로 論罪할 수는 없는 것이며 실로 마음쓰는 것이 凶慘하다는 條文에 해당한 것이니 마땅히 바로 結案을 請하는 것이 옳은 것이오나 이미 隨時로 稟旨 處理하라는 條文이 있으므로 上裁를 기다립니다. 李德培는 항렬(行列)이 높고 나이가 많은 자로서 잘 가르쳐 통솔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倫常의 變故가 일어나게 하였으니 參酌하여 懲治하여야 되겠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情狀은 진실로 慘毒하나 일은 제 홀로 판단한 것이거나 까닭없이 犯行한 것은 아니라 마땅히 本律을 適用하여 처단하되 저의 從祖 德培가 指示하였으니 이런 것을 참작하여 刑曺에서 律에 비쳐 처리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草記를 올려 아뢰기를, "大明律에 規定하기를 兄이 故意로 아우를 죽인 것과 伯叔父나 姑母가 姪을 故意로 殺害한 것은 각각 杖1백·流2千里의 刑에 처한다고 하였고, 同律文에 또 規定하기를 남의 使嗾를 들은 자는 죄1等을 輕減한다고 하였읍니다. 李德培를 이미 使嗾의 罪로 처벌한다면 慶泰는 마땅히 남의 使嗾를 들은 規定을 참작하여야 되겠읍니다. 만약 이 規定에 의하여 처리한다면 도리어 輕과 重을 거꾸로 하는 옳지 못한 결과가 생길 것이므로, 情狀을 酌量하여 처벌하라는 命令에 의하여 慶泰와 德培는 律文에 의하면 모두 杖1백·徒3年의 刑에 해당합니다"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이 事件을 文書에 남겨두는 것은 한갖 風化에만 관계될 뿐이며 또 지금 流配罪人들을 용서하고 있는 때에 配所로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慶泰·德培等을 낮추어 充軍하는 律로 다시 參酌하여 定罪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草記를 올려 아뢰기를, "法典을 參考하여 보니 낮추어 充軍하는 律에는 이미 꼭 들어 맞는 條文이 없으며 地方의 고을에 充軍시키는 것과 流配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이 없읍니다. 그러나 流配는 容恕하는 恩德의 本意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모두 작은 官司의 奴案에 充定함이 옳을가 합니다" 하였던바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允許한다고 하였다. 殺姉妹女·外孫女 顯宗 元年에, 刑曺에서 올린 啓目에 아뢰기를, "罪人 莫立의 供招에 '金成立의 아들 奉淑은 소 도둑이였읍니다. 그래서 告發하여 官에서 잡아다가 매를 치다가 죽여 버렸읍니다. 金成立이 그의 義子 海奉 兄弟와 더불어 그 맏누이를 죽이고자 하여 저에게 이야기 하였읍니다. 저는 다른 嫌怨이 없었으나 겨울 추운 날에 굶주린채 그의 맏누이를 가 보았더니 마침내 밥을 먹으라고 하지 않았읍니다. 이 때문에 비로소 殺害할 마음을 먹고 海奉과 더불어 그 맏누이의 집에 가서 잤읍니다. 金成立이 밤에 왔기에 함께 모여서 같이 房에 들어가 나무 방망이로 그의 맏누이 夫婦와 아들·딸을 打殺한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읍니다. 大明律의 殺期親尊長條에는 무릇 弟나 妹가 兄이나 姉를 毆打하여 致死한 자는 斬刑에 처하되 故意로 殺害한 자는 陵遲處死한다고 하였고, 同律의 殺一家三人條에는, 무릇 한 집의 死罪 犯人이 아닌 3人을 殺害한 자는 陵遲處死하고 犯人의 財産은 沒收하여 被害者의 집에 주고, 犯人의 妻子는 流2千里의 刑에 처한다고 하였으며 死囚覆奏待報條에는 10惡의 罪를 犯하여 當然히 死刑하여야 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刑을 決行한다고 하였읍니다. 請컨데 律文의 規定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라고 允許하였다. 〔重補〕 지금 임금 6年에, 信川의 金夢得이 칼로 그의 누이 大隱阿只를 찔러 現場에서 致死하였다. 死因은 칼에 찔린 것이었다. 夢得의 아들 觀一이 上言하기를, "저의 아비 夢得은 同氣간으로는 다만 3男妹뿐이었읍니다. 그 때 아직 婚姻의 논의가 없었는데 한 마을의 金福同이가 와서 '내 아들 先伊가 이미 너의 누이와 通姦하였다'고 말하였읍니다. 저의 姑母는 나이가 17세였읍니다. 이 말을 듣고 몰래 소금물을 마시고 칼로 제 목을 찔러 죽었읍니다. 官에서 곧 先伊를 잡아 가두고, 저의 아비의 同生 夢弼과 四寸 可麻貴는 나이 겨우 8, 9세인 어린 아이인데 그들을 證人으로 하여 先伊는 定配하고 저의 아비는 嚴重한 囚禁을 當하고 있읍니다. 특히 놓아 주시도록 하십시요" 하였다. 그 道로 하여금 調査하게 하였다. 監司의 調査報告에 아뢰기를, "加麻貴와 夢弼의 證言이 분명합니다. 同氣之間에 下手한 것이 凶惡하고 참혹하니 前에 同推한 그대로입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대한 判付에 이르기를, "대체로 이 殺人事件은 이미 倫理에 관계되고 또 여러 해가 지났다. 當初에 秋官이 意見을 내어 通牒을 낸 것에도 의거할 바가 없지 않았으나 이제 監司의 査啓와 刑曺의 覆奏를 보니 의심의 端緖를 完全히 풀어버리지는 못하였으나 奸詐한 情狀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風俗을 敦厚하게 하고 惡行을 징계하는 見地에서 刑訊을 기다려 恪別히 嚴重 訊問하여 기어히 實情을 알아내게 하라고 監司에게 분부하라"라고 하였다. 甲辰年에 刑曺에서 논의하여 아뢸 때, 參議 李獻慶은 "제 손으로 同氣에게 칼질하기를 소나 양을 잡듯하는 일은 결코 어리석은 겁쟁이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夢得이 그 때의 나이가 20세에 不過하였으니 어리고 弱한 자임을 면치 못할 것인데 혹은 타고 난 性質이 사납고 亂暴한 것이 나이의 많고 적은 데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전부터 洞里에서 반드시 悍惡한 자라는 이름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이것은 詳細하게 염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夢弼과 可麻貴는 하나는 親 아우이고 하나는 從弟인데 그나마 모두 幼年입니다. 아우로써 兄의 行爲를 立證하게 하여 殺獄을 成立시키게 하였읍니다. 10歲의 어린 아이가 갑자기 위태롭고 겁나고 驚愕할만한 變故를 보았다면 반드시 울며 놀라 달아났을 것입니다. 어찌 곁에 서서 자세히 살폈다가 的確하게 가리키고 明白하게 말할 수 있겠읍니까. 다시 嚴重히 사핵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良家의 시집가지 않은 女子로서 별안간에 暴力에 의한 强姦을 당하거나 혹은 무실한 醜聞을 듣게 되어 家門을 더럽혀 욕되게 한다면 부끄럽고 슬프고 분하여 父母가 逼迫하여 죽이는 자도 있을 것이요, 處女가 自殺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毒藥을 먹거나 목을 매지 않고 몇 자 몇 치의 칼을 제 손으로 잡고 한번 찌르고 두 번 찔러 반드시 죽고야 말았으니 金女人과 같은 매운 자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 事件에 대한 의심나는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要約해 말한다면 반드시 自殺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또 억지로 被殺이라고 結論할 수도 없다. 食道 목구멍의 傷處가 깊고 넓기가 五寸남짓하고 일으킨 손과 거두운 손으로 보아 이미 베고 또 벤 흔적이 나타나 있으니 결코 약한 女子의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반드시 제 손으로 찔렀다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金女人과 한 房에서 居處한 사람은 그의 父母 兄弟에 不過하다. 딸이 몰래 이웃사람과 姦通하였다는 것이 비록 부모의 깊이 부끄러워하는 바이겠으나 하늘에서 타고 나는 至親間의 親處함이 白晝에 칼로 찌른다는 것도 또한 人情으로서는 반드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억지로 他殺이라고 結論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 金夢得을 元犯으로 斷定한 것은 특히 夢弼과 可麻貴의 한 마디에 인한 것인데 그 말이란 것이 가장 명확하지 못하다. 그들이 말한 바,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한 손으로 낫을 잡아 먼저 왼 쪽을 베고 또 오른 쪽을 베었다고 한 것 같은 類는 8, 9歲의 어린이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設令 그 말이 다 眞實이고 條理가 있어서 證據로 할 만 하더라도 하나는 夢得의 친 아우요 하나는 夢得의 從弟이다. 親弟와 從弟로써 親兄과 從兄의 죄를 立證한다는 것은 제게 있어서는 人倫을 損傷하는 일이요. 法에 있어서는 規定에 違反되는 것이다. 殺人한 자를 死刑에 처하는 法은 다만 刑罰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刑罰할 일이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니 風敎를 扶植하는 뜻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마땅히 取招할 수 없는 어린이에게 招辭를 받아 가지고 當然히 立證할 수 없는 獄案을 立證하게 한다면 獄을 다스리는 道理를 損傷하고 뒷 날의 폐해에 관계되게 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前後의 그 道에서 査啓한 것과 당해 曺에서 覆奏한 것으로 숨은 情狀과 어긋나는 端緖를 털 끝만한 것도 일일이 들추어 내어 빠짐이 없다. 그러나 의심해야 할 것은 微細한 까닭이요 아껴야 할 것은 治獄하는 커다란 道理인 것이다. 가령 夢得에게 진정 의심 할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의희하고 방불할 뿐이다. 더구나 두 어린이의 招辭를 없애 버린다면 元來 一毫의 의심도 없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審理할 날을 당하였으니 朝廷의 處理는 마땅히 治獄하는 道理의 大體를 살펴야 할 것이다. 罪人이 요행으로 죄를 벗어나게 되더라도 그 過失은 微細하고, 法典의 規定을 違反하고 지나치는 것은 그 過失은 큰 것이다. 夢得을 釋放하여 朝廷이 治獄의 道理를 존중하고 敎化를 敦厚하게 하는 뜻을 보이라. 仍하여 刑曺로부터 각 道에 通牒하여 모든 檢驗이나 同推 때에 있어서 法外의 取招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같이 거듭 밝히고 엄중하게 계칙할지어다"라고 하였다. 肅宗 46年, 楊州 사람 卓天立이 딸을 죽여 江에 던졌다. 監司 權 珪가 狀啓를 올려 稟旨處決을 청하였다. 刑曺의 啓目에 아뢰기를, "天立은 본래 士族이 아닌 촌 백성입니다. 그러니 설령 만약 그의 딸이 남에게 姦通을 당하였더라도 혹은 먼 딴곳으로 시집을 보내던지 혹은 그냥 姦通한 자와 結婚시키더라도 나쁠 것이 없는데 다만 부끄럽고 분한 마음만으로 天倫의 情理를 돌아보지 않고 죽여서 江 속에 던졌으니 그 情狀이 매우 놀랄만합니다. 大明律의 條文 中에 '子孫이 父母의 가르침과 명령을 어긴 것을 父母가 非道하게 구타 殺害한 자는 杖1백의 刑에 처하고 故意로 殺害한 자는 杖60· 徒1年의 刑에 처한다고 하였고, 受敎안에는 情節에 매우 惡한 것으로 別段의 處斷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當該官司가 隨時로 稟旨處理하라'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관계가 重大한 것이어서 감히 專斷하지 못하오니 위에서 裁決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天立을 死刑에 처하는 것은 매우 지나치게 刑罰이 重하다. 死刑을 減輕하여 定配하라"라고 하였다. 肅宗 26年에, 韓山 사람 李尙譚이 그의 外孫女를 물에 잠겨 殺害하였다. 그 道 監司의 稟啓로 인하여 刑曺에서 올린 啓目에 아뢰기를, "尙譚이 外孫女를 물에 잠겨 죽인 것은 실로 사람의 道理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미 양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같은 헤아릴 수 없는 변고(變故)를 저질러 놓았읍니다. 大明律에 故意로 外孫을 죽인 자는 杖1百· 流2千里의 律이 있으나 이것은 너무 罰이 가볍고 헐합니다. 甲子年의 受敎 속의 情狀이 몹시 흉악한 것은 當該官司로 하여금 隨時로 稟旨하여 決定하라'고 한 規定이 꼭 들어 맞을 것 같으나 受敎 속에서는 다만 父가 子를 殺害하거나 兄이 아우를 殺害한 것에 대한 律만을 들어 말하였을 뿐이고 外祖와 外孫과의 일은 처음부터 論한 것이 없으니 大臣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읍니까"라고 하였다. 영의정 權大運은, "受敎中에 다만 父가 子를 殺害하거나 兄이 아우를 殺害한 것에 대한 刑罰만을 들어 말한 것은 例示規定으로서, 모든 것을 골고루 다 列擧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外祖가 外孫을 殺害한 것도 또한 類推解釋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法 밖의 刑罰을 加重하는 것은 아랫 사람들이 가볍게 논의할 바 아니니 위에서 裁決하십시요"라고 하였다. 좌의정 睦來善은, "刑曺에서 大明律에 規定되어 있는 것은 너무 罰이 가볍고 헐하다고 啓奏하였읍니다. 甲子年의 受敎中에 外祖가 外孫을 죽인 것은 비록 들어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骨肉의 관계를 말한다면 父子 兄弟 祖孫의 사이에는 진실로 差異가 없는 것이니 저절로 類推하여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裁決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우의정 金德遠은, "律文 속에 故意로 子를 殺害한 것과 外孫을 故意로 殺害한 것에 대한 처벌에는 비록 杖·徒·流의 구별이 있기는 하나 모두 死刑에 이르지는 않은 것은 손 그尊·卑의 관계를 嚴重히 하고 人倫의 떳떳함을 무겁게 여기는 뜻을 대체로 알 수 있읍니다. 甲子年의 受敎中에 다만 父子· 兄弟만을 論擧한 것은 이른 바 한 가지를 들어서 세가지를 反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尙譚이 이러한 兇惡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의 妾이 만들어낸 의견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만약 다만 尙譚만을 처벌한다면 犯行의 意思를 만들어 낸자와 犯行에 下手한 자가 罪責을 分擔하여야 할 原則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참작하여 처리하심이 어떻겠읍니까"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尙譚의 犯行情狀은 사람의 도리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律文 속에 이미 父가 子를 殺害한 것, 兄이 아우를 殺害한 것에 대한 規定이 있으니 外祖가 外孫을 죽인 것은 저절로 이것으로 間接으로 밝힐 수 있다. 이와 같은 지극히 兇惡한 무리를 一般普通의 例로 처단할 수는 없다. 또 尙譚이 惡行을 저지른 것은 오로지 그의 妾에게서 由因된 것이니 右議政의 收議中에 그의 妾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犯行의 意思를 만들어낸 자와 犯行을 下手한 자가 罪責을 分擔하여야 할 이치에 어그러짐이 있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매우 마땅한 의견이다. 그의 妾 義香과 아울러 모두 一律(해당)로써 論斷하고 死刑에 때를 기다리지 않고 絞刑에 처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兄嫂와 姪(점)婦를 殺害한 경우 〔重補〕 今上 9年에, 長水의 崔汝贊이 그의 兄嫂 李召史를 구타하여 밤을 지나고 죽어 버렸다. 死因은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감사의 狀啓에, "汝贊이거나 一贊이거나를 莫論하고 만약 과연 구타하여 이튿날 새벽에 致死하였다면 李女人이 반드시 아픔을 참고 입을 다물었을 理가 없었을 것인데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 들 중에 한 사람도 그 신음소리를 들은 자가 없읍니다. 辛女人이 자기 남편을 끌어내어 고발한 것은 이미 그의 남편의 뜻에 순종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汝贊이 스스로 犯人이라고 나서서 兄을 대신하여 죽고자 하니 그의 良心을 알 수 있읍니다. 남편의 犯罪를 立證하는 아내의 말을 가지고 兄嫂를 죽인 罪囚로 단정하는 것은 風俗과 敎化에 관계가 있읍니다. 의심을 强作히 하여서 重罪로 斷定하는 것은 자세히 살피는 처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대한 判付에 이르기를,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人倫의 떳떳한 도리를 갖추었기 때문이요,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風俗과 敎化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이 아니며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할 것이다. 이 몇해 동안에 나라에서 해마다 監獄管理의 狀況을 검열하는 것은 어찌 다만 꼭 죽게된 것에서 살길을 찾아 주는 것으로 남의 기꺼움을 사는 일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겠는가 殺人事件이 혹은 綱常에 관계가 있을 때에는 겸하여 倫理의 떳떳함을 扶植하여 風俗·敎化의 政治를 바로잡는 일을 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殺人事件이 倫理를 無視하고 風俗을 해친 것은 곧 前後의 많은 殺人事件 中에서도 아직 볼 수 없었던 것이다. 內容을 여러번 자세히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근심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獄事를 判決하는 것은 도리어 가벼운 일이며 倫常을 扶植하는 것이 더 중하게 되었다. 먼저 風化를 定하고 다음에 事件의 情狀을 말하는 것이 옳겠다. 대저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는 그 恩義의 무거움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한 것과 같은 것이며, 신하가 임금에게 대한 것과 같은 것이다. 부부사이에는 3從의 道에 좇은 依託함이 있고 백년의 좋은 언약이 있는 것이다. 살아서는 한 방에 거처하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가는 것이다. 부부의 情誼는 생각하면 重하지 아니한가. 이 事件에 있어서 辛女人의 일은 곧 한 變故인 것이다. 제 남편은 兄을 위하여 대신 죽을 마음으로 獄中을 돌아보며 차근하게 비밀의 부탁을 한 것은 本心이 살아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으나, 남편의 命令도 또한 순순히 들을 것과 듣지 않을 것이 있는 것이다. 남편과 시숙은 과연 누가 중하고 누가 가벼우며 누구가 親密하고 누구가 疎遠한가. 설령 汝贊이 정말 犯行한 일이 있더라도 그의 남편은 兄을 위하여 대신 제가 벌을 받으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간곡히 庇護하는 것이 하늘의 理致와 사람의 情理에 必然한 것이다. 만약 그 남편의 兄弟 사이의 우애를 생각하고 그의 시숙의 원통하고 억울한 情狀을 가엾게 여긴다면 그날 밤의 일은 제가 이미 參看하였으니 몸을 바쳐 죽기를 맹세코 爭辯한들 또한 무엇이 옳지 않겠는가. 그 檢驗을 行하던 처음에는 監司가 한번 辛女人에게 물어보는 것은 오히려 자세히 살피기 위함이라고 핑계할 수 있으나 辛女人의 供招를 보면 道伯(監司)된 자가 事理上 마땅히 人倫을 해친 變故에 생각을 움직이고 法을 어긴 證言에 觀察을 자세히 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을 하지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兄弟사이에 主犯과 從犯을 갑자기 바꾸어 狀啓의 사연에 醜拙한 것이 다 들어난다. 그의 아내의 한 마디의 立證으로 그 남편을 刑罰하는 案을 斷定하였다. 이미 失墜된 倫常이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땅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審問함이 마땅치 않은 곳에 의심을 일으키고, 끝에는 마땅히 倫常을 扶植하여야 할 곳에서는 放心해 넘겼다. 이미 獄事를 按察하는 體面을 잃었고 또 敎化를 宣揚하는 責任을 어그러지게 하였다. 일이 倫常을 해친 것에 관계가 있으니 여러해 되었다고 하여 容恕할 수는 없다. 當該監司는 罷職하고 卿等은 推考한다. 비록 獄事의 情狀으로 말할지라도 李女人은 失行하여 官婢에 歸屬된 女子이다. 한번 崔氏의 집을 나오면 곧 길가는 行人과 같은 것이다. 夫婦의 情誼는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어찌 嫂叔間으로 論할 것인가, 東으로 가든 西로 가든 제 마음대로 맡겨진 것이다. 명절 날 돌아오지 아니한 것을 보아도 서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站裏에 寄宿한 때와 橋頭에서 訃告를 받았을 때에도 모두 參看한 證人이 있으니, 一贊의 死刑은 이미 無意味한 것이 되었다. 또 汝贊이 자기의 兄이 집에 있지 아니한 때를 當하여 閨房을 떠나간 兄嫂가 밤중에 대문을 두드리는 것을 拒否하고 드리지 않은 것은 이미 배척하여 絶緣한 뜻을 보인 것이다. 공박을 받은 뒤에 받아 들인 것은 전일의 情誼를 생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살고 죽는 것이 汝贊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 일이겠는가. 곁에 있는 약봉지가 이미 明白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왼쪽 갈빗대의 傷痕은 자신이 부딪쳐 입은 것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대체로 李女人은 쫓겨난 뒤로 떠돌아다니며 있을 곳을 잃어 신세가 슬프고 처량하였다. 자식을 안고 徒步로 걸으며 이미 남편의 집에 돌아가 죽을 마음을 결정하였을 것이다. 몰아내고 쫓아내는 학대가 일어나고 困辱을 싫것 경험하게 되니 한 때를 참지 못하는 女子의 偏性이 바로 밤중에 자살한 것이다. 前後의 事情이 이러할 뿐인 것이다. 檢驗官이 비록 穀道가 變하지 않은 것이며 구타를 당한 것이라고 결론하고 있으나 일찌기 들으니 毒약을 먹은 것이 급한 자는 그 毒이 위에 있다고 한다. 하물며 처음에 法대로 檢驗하지 못한 것이겠는가. 前後事情을 살펴 볼 때 李女人의 飮毒自殺한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汝贊이 여러해동안 滯囚되어 갖은 拷問을 겪었으니 이것이 果然 무슨 治獄의 體 裁인가. 汝贊은 이 判付를 가지고 타이른 뒤에 즉시 석방하라. 辛女人 죄가 크고 몹시 惡하니 國法으로 論하면 결코 살아서 獄門을 나은 마땅치 못한 것는 것 가이며 汝贊을 이제 무죄석방하는 것은 참작하여 용서하는 길이 있어야 合當하겠다. 監司로 하여금 地方官을 엄중히 계칙하고 辛女人을 嚴重히 매를 쳐서 絶島에 定配하고 제 一生에 限하여 길이 官婢에 隸屬시켜 赦前에 가리지 말게하라. 그리하여 국가가 人倫을 중하게 여기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정사를 보여 주게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重補〕 11년에, 安峽의 李 堰이 姪婦 具女人을 줄로 묶어서 물에 던져 죽게 하였다. 死因은 남에게 물에 던져 빠져 죽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監司 李時秀의 啓本에 아뢰기를, "具女人은 靑孀寡婦입니다. 빈궁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여 음란한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李 堰이 친족을 모아놓고 힘을 합하여 여러 사람의 앞에서 묶어가지고 큰 江물에 던지고 큰 돌로 눌러 놓았던 것입니다. 그 情狀을 살펴보면 몹시 모질고 완악합니다. 엄중히 訊問하여 情狀을 얻었읍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서는 아뢰기를, "삼가 大明律을 상고하여 보니 弟·姪을 故意로 殺害한 자는 杖1백·流3千里에 처한다는 規定이 있읍니다. 이 殺人 事件은 그 정상을 推究하여 보면 刑罰은 실로 死刑으로 決定할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명율을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 事理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監司의 狀啓에는 死刑에 처하고자 하였고, 刑曺의 啓發에는 도리어 死刑을 容恕하는 法을 適用하여 하였으니 어디에 좇아 酌定하여야 할지 알지 못하겠도다. 法의 理論 밖에 情狀이 몹시 패려하고, 情狀 밖에도 또한 倫理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이 같은 獄案은 갑자기 결정하기가 어렵도다. 卿과 參判·參議 三堂上이 意見을 갖추어 事理를 論述하여 回啓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姪과 姪婦는 服制가 각각 다릅니다. 前日에 姪을 殺害한 자를 杖·流의 律에 처한 것을 그 姪婦의 경우에 援用하려는 것은 아마 꼭 맞지 않을까 합니다. 大明律의 夫屬相毆條에 말하기를 尊長이 卑幼의 아내나 妾을 毆打 상해하여 죽게한 자는 絞刑에 처한다고 하였읍니다. 어찌 반드시 준비되어 있는 律을 버리고 間接的인 判例를 援用할 것이 겠읍니까"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다시 新任 監司로 하여금 事理를 論述하여 狀啓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戊申年에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다시 前 監司에게 물으니, 李時秀는 "마음 먹은 것이 모질고 교활하여 실로 용서할 만한 데가 없읍니다"라고 하였고 李致中은, "그 마음 먹음이 흉악하고 참혹하니 급히 해당한 法律을 시행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最初의 刑曺의 언의에서는 따로 疑問點을 指摘하고 또 大明律을 끌어 死刑에 처하는 것은 不當하다고 證言하였다. 仍하여 性大가 지레 쓰러져 죽음으로 또 한 사건에 두 범죄를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杖 1백·流3千里에 처하라는 奏請이 있기에 이르렀다. 두 번 감사에게 묻고 세 번 刑曺에게 下詢하여 그 논의의 같고 다름을 듣고자 한 것은 獄을 다스리는 일을 무겁게 여기고 윤리를 소중히 하며 겸하여 완악한 자를 징계하고 풍속을 맑게하려는 微意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에 이르러 曺와 道와 고을의 啓奏와 狀聞과 牒呈이 완전히 同一한 말을 하게 되었고, 前任 監司의 의견도 또한 어긋남이 없으니 다만 마땅히 多數의 논의에 좇아 시행할 것이나 그 引用한 律文이 각각 근거가 있고 관계 事件이 또한 가볍지 아니하므로 한번 大臣에게 물은 뒤에 단안을 내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李性源은, "具女人은 李 堰에게는 姪婦이고 性大에게는 친 누이입니다. 李堰이 질부를 함부로 죽인 것은 본래 이미 흉악하고 참혹하나 性大가 줄로 묶으라고 충동이고 상옷의 띠를 풀어서 청상과부인 누이를 묶는 것을 助力하고 돌을 안겨 江에 던질 때 도리어 주먹질과 발질을 하였다니 이 事件의 元犯은 性大가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獄事를 다스리는 도리로 말하면 性大를 關連者로 하고 李 堰을 元犯으로 한 것은 格式을 잃었음을 免치 못하겠읍니다. 李 堰을 死刑에 처한다는 1件은 아마 論의 할 것이 못될 것 같읍니다"라고 하였다. 우의정 蔡濟恭은, "李 堰이 具女人을 誘引하여 줄로 묶어서 강에 던지고 10餘個의 큰 돌로 그 시체를 눌렀읍니다. 그것을 건져내어 埋葬할 때에도 입에 재갈 물렸던 칙(葛)을 오히려 풀어주지 않았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사람의 本性이 있다면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읍니까. 李 堰을 死刑에 처하는 것은 法에 疑心할 것이 없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左議政과 右議政의 見解가 서로 어긋나니 後日 次對 때에 한 가지를 指摘하여 稟旨處理하라"라고 하였다. 己酉年에 안의 아들 重喆이 擊錚하고 原情하기를 "저의 아비는 나이가 이제 70입니다. 天恩을 입기를 빕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事件의 정상과 訴訟의 事理가 어떠하던 간에 나이 70이 된 사람을 元犯으로 만들어서 한결같이 監獄에 囚禁하는 것은 이것은 매우 法外의 처리인 것이다. 그 자세한 곡절을 該曺로 하여금 該道에 査問하게 하고 報告가 오기를 기다려 事由를 갖추어 草記를 올리라"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아뢰기를, "臣 심이지는 '줄로 묶고 물에 던진 것이 李 堰의 所爲가 아닌 것이 없읍니다. 만약 具性大가 옥중에서 말라 죽은 것으로 한 事件에 두 가지 犯罪가 생긴 것을 생각한다면 갑자기 輕한 처벌을 논의하였다간 骨肉相殘의 不祥事가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保障하기 어렵습니다. 엄중한 刑罰로 服罪를 받으십시요'라고 하였고, 臣 李義綱은 "具女人이 이미 鄕班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風俗과 敎化를 紊亂하게 하였으니 살아 있었더라도 또한 死刑을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李 堰은 남편의 叔父이고 性大는 同氣간입니다. 그 罪犯을 논한다면 性大가 李 堰에 比하여 더욱 重합니다. 그러나 이미 杖斃하였읍니다. 두 사람을 아울러 죽이는 것은 아마 자세히 살피는 처사가 아니라고 하겠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前任 監司와 後任 監司의 의견이 이미 다 서로 어긋나므로 大臣들에게 묻고 또한 卿등에게도 물었더니 각각 그 말한 것이 근거가 있다. 다시 그 時任의 監司로 하여금 前後의 文案을 자세히 閱覽하고 仍하여 또 한번 親히 按問 査察을 할것이며 面對하여 調査하고 말을 직접 듣곤 하는 사이에 어찌 알만하고 물을 만한 端緖가 없겠는가. 그리고 李 堰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또한 과연 山中 고을 風俗의 過去를 징계하여 將來를 豫備하는 데 관계가 있는가를 모두 그다지 멀리 헤아리지 아니하여도 알 수 있는 데가 있을 것이다. 이 判付의 사연을 가지고 당해 道에 指令하고 調査가 끝나기를 기다려 따로 의견을 갖추어 狀聞하게 하고, 또 本曺로부터 事理를 論述한 것을 添附하여 稟旨處理하라"라고 하였다. 5月 監司 李度默이 査啓하기를, "具女人의 음탕하고 더러운 행동이 소문이 퍼지므로 李 堰이 이것으로 인하여 그를 죽인 것은 또한 혹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였더니 判付에 이르기를, "전번의 判付에 이미 나의 의견을 보인 것이 있다. 가령 他人이 이러한 殺人의 變故를 犯하였더라도 오히려 지극히 흉악하고 몹시 패려하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시집의 叔父와 친정의 오라비로서 치마를 걷었다는 것이 참인가 거짓 인가를 보지 않고 다만 淫行이 있었다는 風聞만 듣고 虛實을 밝히지 않은채 바로 무찔러 죽이기에 이르렀으며 喪服의 띠로 묶는 짓을 助力하여 돌을 안겨 江에 던져 빠져 죽게 하였으니 그 光景을 想像할 때 차마 말 할 수가 없다. 두 犯人의 한 짓은 倫常이 끊어지고 사람의 도리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곳에는 風敎문제가 더 重하고 罪를 다스리는 事理는 도리어 가벼운 것이다. 元犯과 關連犯을 막론하고 다만 모두 死刑에 처하여 靑孀寡婦의 원혼을 위로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자세히 살펴 처리하는 도리에서 널리 물어서 처단하여야 하겠기에 大臣과 刑官과 前後의 그 道의 監司에게 물어 본 것이다. 主犯과 從犯을 區別할 적에 비록 한 두가지 서로 어긋나는 見解가 있었으나 要는 다 死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애초에 謀計를 낸 자는 오로지 李 堰이고, 性大는 犯行을 방조한 데 不過하다. 그럼에도 오히려 지레 쓰러져 죽어 正刑하지 못한 것은 可痛하다. 하물며 堰이겠는가. 이제 와서 獄案은 別로 다시 핵실하야 할 端緖는 없다. 이것을 監司에게 분부하여 道啓로 結案하여 取招하게 하라"여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議政府에 報告하여 詳覆施行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允許하였다. 庚戌年의 特別諭示에 이르기를 "李 堰의 事件에 同氣之親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자는 곧 具性大이다. 그러나 性大와 符同하여 갖은 악독한 짓을 한 자는 바로 李 堰이다 여러번 여러 사람의 논의를 들었으나 모두 李 堰을 死刑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正犯과 從犯을 決定함에 있어서는 처음 充分히 輕重을 정하지 못한채 性大가 먼저 獄中에서 지레 죽었으니 이것은 한 事件으로 두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 卿의 跋語를 보니 한 事件으로 두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不當하다고 하였고 與論을 探問하여 보니 의견들이 또 이와 같다. 國家에서 어찌 어렵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堰을 엄중하게 매를 쳐서 놓아 보내게 하라"라고 하였다 從兄弟와 姪을 殺害한 경우 〔重補〕 今上 8年에, 任實의 金德文이 주먹으로 그의 從兄 金德觀을 구타하여 7日만에 致死하였다. 死因은 구타 당한 것이었다. 監司의 狀啓에, "다만 소를 사랑할 줄만 알고 그의 兄은 알지 못하였읍니다. 叔父로 하여금 조카의 原告가 되게 하였으니 말하기에도 놀랄 만하고 탄식할 만 합니다. 傷害의 흔적이 모두 急所에 있으며 구타한 實地의 情狀은 元犯이 自服하였읍니다. 嚴訊하여 服罪를 받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德文이 비록 服罪하는데 이르렀으나 죽은 자의 父 德一의 마음은 반드시 快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法을 設定하고 刑을 만든 本意를 參酌 考究한다면 어떠할런지 알지 못하겠읍니다. 그러나 오직 輕하게 처리하는 恩典은 마침내 논의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송아지 한 마리의 生死가 그다지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데 친 四寸 사이에 이러한 전에 없던 變怪가 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한다면 死刑하여야 하며 용서할 것이 없다. 傷處가 중하고 경하다던가, 兇器의 있고 없음을 반드시 깊이 따질 것도 없다. 그러나 옥을 다스리는 도리로써 論한다면 指摘한 傷處가 네 곳인데, 세 곳은 모두가 다 柔軟하고 명치 한 곳은 처음 檢屍 때에는 柔軟하던 것이 覆檢 때에는 약간 단단하여 졌다. 그러나 3檢을 施行하지 않은 것은 疎忽하였다는 탄식이 없을 수 없다. 兇器로서 現納한 것은 즉 낫 한 자루이나 여러 傷處에 낫으로 加害한 흔적은 없다. 이것도 또한 어찌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이 事件만이 아니라 처음에 古阜의 罪囚 得伊의 文案에 이미 글로 써서 判下한 것이 있거니와 대체로 말하여 백성의 風俗이 여기에 이른 것은 朝廷의 敎化가 充分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진실로 몹씨 섭섭하다. 卿等의 回啓의 末尾에 쓴 글에 '殺人한 자를 死刑하는 法은 반드시 죽은 자로 하여금 원통한 것을 풀고, 산자로 하여금 快하다고 일컫게 한 뒤라야 바야흐로 刑罰의 要諦에 合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事件은 德文이 비록 服罪하기에 이르러 法을 바르게 執行할 수 있게 되었더라도 屍親인 得一의 마음은 반드시 장차 快하다고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遺憾으로 생각할 것이니 法을 設定하고 刑을 만들어낸 本意를 參酌 考慮하는 것이 어떠하겠읍니까'라고 한 것은 깊이 廷尉(秦·漢代刑罰에 관한 사무를 맡은 관리 또는 그 관청)의 奏達하는 道理를 얻은 것이다. 朝廷이 여기에 어찌 딴 의견이 있겠는가. 아, 人倫을 해치고 風俗을 패려하게 한 것의 허물이나 할 사람에게 있다. 어찌 그 犯罪의 實情을 알았다고 하여 기뻐하겠는가. 또한 監司로 하여금 德文을 監營의 뜰에 잡아다가 이 判付의 말뜻을 되풀이하여 타이른 뒤에 엄중히 매를 치고 死刑은 減輕하여 絶島에 보내어 종이되게 하라. 罪를 고치고 善에 좇게하는 方法을 알게 한다면 어찌 律대로 처벌하기 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 뜻을 아울러 분부하라"하였다. 〔重補〕 14年에, 光州 蔡厚宅이 蔡明辰을 구타하여 卽日에 致死하였다. 死因은 구타 當한 것이었다. 監司의 狀啓에, "門中의 논을 빼앗아 耕作하였으니 이미 일가끼리의 敦睦하는 뜻을 잃었으며 큰 몽둥이로 바로 쳤으니 殺害할 의사가 있은 것이 明白합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卿等은 意見을 開陣하여 回啓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아뢰기를, "親族끼리 相殘한 것은 風俗과 敎化에 惡影響이 있고 재물을 다투어 殺人違法하였으니 마음먹음이 몹씨 패려합니다. 그러나 律文을 상고하여 보면 堂姪을 毆打殺害한 것은 法律上 死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故意殺害에 比하면 또한 差異와 間隔이 있습니다. 위에서 裁決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五寸間인 至親으로서 두어 마지기의 작은 논을 다투어 殺戮의 變을 일으켰으니 堂內의 親族끼리 倫理를 해치고 道義를 어그러뜨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 普通常例의 殺人事件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刑官의 律 適用에 대한 논의는 혹은 있을 수 있는 의견이다. 監司로 하여금 다시 與論과 實地情狀을 探知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狀啓가 올라 온 뒤 稟旨處理할 때에 筵席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律文에 明白한 근거가 있으니 法의 解釋을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없읍니다. 죽은 자는 제 兄과 田地를 다투어 不和한 죄가 있고, 제 從叔父를 向하여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욕설을 퍼부은 일이 있었으니 즉 이것만으로 이미 패려한 놈입니다. 그런데 그의 從叔이 偶然히 한번 친 것은 또한 殺意가 있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死刑에 처한다면 뒷날에 큰 폐단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용서하라, 死刑하라고 하는 것을 처음의 의견을 固守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다. 蔡厚宅을 엄중하게 매를 쳐서 그 곳에서 永久히 奴隸로 定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15年에 錦山의 林贊儀가 喪杖으로 그의 從弟 日同을 구타하여 이튿날 致死하였다. 死因은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監司의 狀啓에 "喪杖을 가지고 사람을 傷害하는 道具로 삼고 殺人의 變故가 從兄弟間에 일어났읍니다. 大明律에 同堂 弟·妹를 故殺한 자는 絞刑에 처한다고 하였읍니다. 同推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回啓하기를, "大明律에 同堂의 弟·妹를 毆打 殺害한 자는 杖1백·流3千里의 刑에 처하고 故意로 殺害한 者는 絞刑에 처한다고 하였읍니다. 贊儀가 兄으로 弟를 꾸짖은 것은 事理에 괴이할 것이 없으며 이미 미리 꾀한 것이 아니고 또 몽둥이나 칼로 加害한 것이 아니니 거듭 거듭 참작 상량하여 보아도 그것이 故意殺害라는 것을 發見할 수 없읍니다. 本律에 의하여 判決 처리함이 마땅하나 事件이 지극히 重大하오니 위에서 裁決하심이 어떠하겠읍니까"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錦山의 罪囚 林贊儀의 犯行이 故意殺害냐 毆打致死냐 하는 것은 죽이느냐 살리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刑曺와 監司의 意見이 비록 서로 모순이 되기는 하나 또한 각각 論理의 근거가 있도다. 대체로 器仗은 喪杖이요 被殺자는 從弟이다. 法律問題를 떠나서도 저지른 일이 몹시 惡毒하다. 監司가 死刑으로 斷定한 것을 法의 運用을 잘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刑曺에서는 다시 말하기를 一般 毆打致死의 例로 論斷하는 것은 좋으나 故殺이라고 하는 것은 혹은 情狀에 지나칠 것 같다고 하였다. 이렇다면 贊儀에게 毆打致死의 律을 適用하는 것도 不可할 것이 없다. 事件이 至親간의 殺人에 屬하는 것으로서 자세히 잘 살피는 뜻에서 급거히 斷定하기가 어렵다. 大臣들에게 물어서 稟旨處理하라"라고 하였다. 刑曺이 回啓에 아뢰기를 "大臣에게 問議하니 左議政 蔡濟恭은, '贊儀가 분김에 한번 친 것은 혹은 異常할 것이 없는 일인데 우연히도 急所를 때려 드디어 죽게되었으니 어찌 贊儀가 미리 헤아렸던 일이겠읍니까. 贊儀가 日同을 죽인 것은 故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刑官이 毆打致死의 律을 適用하고자 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의견입니다'고 말하였읍니다. 大臣의 의견이 이러하오니 위에서 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읍니까"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大臣의 논의에 의하여 施行하라"라고 하였다. 倫 紀 肅宗 元年에, 豊德의 幼學 李時興이 璉川의 出身者 權穫相과 서로 奴婢 때문에 訴訟하였는데 係爭中인 婢 連非는 곧 그의 庶三寸인 李義生의 妻 安氏의 遺産分配를 받는 까닭으로 連非의 낳은 자식을 占有하기를 도모하여 거짓 義生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그의 母 張氏를 義生의 後妻로, 安氏를 前母로 文書를 僞造하였다가 發覺되어 定配의 刑에 처벌되었다. 晝講 때에 檢討官 이이명이 아뢰기를 "지금 罪人 李時興의 配所到着 報告의 啓本을 보니 그의 아비를 그의 庶三寸叔이라고 하고 그의 어미를 그 庶三寸의 妻라고 하였는데 罰이 流 4千里에 그쳤으니 일이 매우 놀랄만하고 해괴합니다. 예전 乙巳年間에 順天의 女人 戊眞이 財物을 取得하고자 하여 千貴同의 딸이라고 일컫고 他人을 아비라고 한 罪로 死刑으로 論斷하였으며, 戊午年에는 陽德의 私奴 奉鶴이 본래 邊錫基의 종 禹千乭의 子였는데 그의 主人을 배반하고자 하여 必孫의 아들 金鶴이라고 變名하며 臺帳과 戶籍에 넣은 것을 大臣들에게 수의하였더니 罪가 綱常을 犯하였다고 하여 全家徙邊의 처분을 하였었읍니다 지금 이 時興에 대한 罰은 반드시 前例을 따라 이 律을 適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미 戊眞을 死刑으로 처단한 일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大臣들에게 수의하여 裁決하심이 어떻겠읍니까"라고 하였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령하였다. 左議政 南九萬이 논의하기를, "時興의 罪를 어찌 살려 줄 道理가 있겠읍니까. 그러나 法律을 조사하여 보니 父母를 바꿔친 者는 死刑에 處한다는 律은 없고 다만 續錄에 罪가 綱常을 犯하고 情狀과 事理가 深重한 것은 全家徙邊한다는 法이 있읍니다. 法의 條文 밖에 다시 律을 定하는 것은 진실로 賤한 신하의 身分으로는 敢히 함부로 논의할 것이 아닙니다. 近來에 백성의 風習이 날로 惡하여 져서 生存한 父母를 죽었다고 말하고 喪服을 입고 官門을 지나가는 자가 前後를 잇달아 생기며, 속여 忠義衛에 所屬되기를 꾀하여 그의 父·祖의 이름을 바꾼자가 萬이란 數를 超過하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다 死刑에 처하지 아니하고 호을로 時興에게만 따로 死刑을 適用하기는 어려울 것 같읍니다"라고 하였다. 右議政 鄭載嵩는 논의하기를 "李時興은 天理와 人道를 絶滅하여 남김이 없읍니다. 死刑으로 論斷하더라도 지나칠 것이 없읍니다. 그러나 法의 條文에 이미 父母를 바꿔친 자를 死刑에 처한다는 規定이 없고 罪가 綱常을 犯하여 情狀과 道理가 深重한 것은 全家徙邊한다는 것은 바로 續錄에 있는 法이니 臣이 어찌 감히 다시 다른 논의를 할 수 있겠읍니까. 乙巳年間에 비록 戊辰을 死刑으로 다스렸으나 이것은 한 때의 惡을 懲戒하는 뜻에서 나온 일이니 이제 그것을 採用하여 判例로 삼는 것은 不當합니다. 위에서 裁決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全家徙邊에 처하는 것으로 規例를 定하여 施行하라"라고 하였다. 4年에, 鄭維憲의 妻 有女가 종 玉女와 더불어 四寸 오빠 李東蕃의 妾 終一의 아들을 竊取하여 제가 낳은 것이라고 거짓 일컫고 그 시부모를 속여 왔는데, 그 아이가 長成하게 되매 士夫의 집과 結婚하였다. 刑曺에서 추핵 할 때 李東蕃은 여러 달을 囚禁되고 終一은 여러 차례 비밀히 맞다가 이제 비로소 바로 말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훔쳐가게 된 것은 몰래 서로 주고 받은 것과는 差異가 있으므로 有女 等은 輕重을 구분하여 처벌하고 鄭維憲· 李東蕃· 終一等은 各 杖1百· 徒3年의 刑에 처하였다. 英組 2年에, 靈光 사람 李 範이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그런데 庶子 有機가 "嫡母가 종의 자식을 비밀히 길러 가지고 속여서 자기의 所生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本官이 査問할 때 有機가 말하기를, "종이 子女를 비밀히 바칠 때에 果然 제 눈으로 보았읍니다"라고 하고, 또 所謂 子女의 父母라는 자에게 물으니 다 上典에게 비밀히 바쳤다고 말하였다. 또 範의 아우와 庶弟에게 물으니 또한 範의 所生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事件이 오래도록 決定되지 아니하여 大臣들에게 의논하였다. 判中樞府事 閔鎭遠은 논의하기를 "範의 妻가 17年이나 斷産한 뒤에 51歲에 딸을 낳고 52歲에 아들을 낳았다. 세상의 婦女들은 50세 뒤에 자식을 낳는 일은 絶對로 없읍니다. 그런데 50세를 넘어서 17年이나 斷産한 나머지에 해마다 자식을 낳는 일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範이 血液이 서로 合쳐지는가를 檢査하였더니 다만 子와 母의 血이 서로 合쳐질뿐 아니라 他人의 피도 또한 서로 合쳐져서 이것으로 憑驗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有機는 律을 상고하여 처벌하고 그밖의 것은 그 道의 處決에 依하는 것이 아마 마땅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논의 의하여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40年에, 서울에 사는 幼學 李洙麟은 자기의 兄이 死亡한 뒤에 兄嫂를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田地와 家屋을 다 팔아 버렸는데 後患을 念慮하여 그의 姪 祖得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祖得은 말(馬)을 훔쳤다고 말하고 발에 자물쇠를 채워 창고에 가두어 두고 때때로 쇠송곳으로 다리를 찔러서 그가 自殺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閑良 沈耆賢이 그 일의 소문을 듣고 가서 洙麟을 꾸짓고 발로 방문을 차서 열고 그 房의 자물쇠를 뽑아 주었다. 司憲府에서 啓辭를 올려 刑曺로 하여금 洙麟을 嚴刑에 처하여 快하게 風俗을 바로잡기를 請하였다. 刑曺判書 趙明鼎이 잡아다 囚禁하고 推究하여 訊問하니 洙麟이 泛然히 自服한다고 말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祖得의 行爲가 비록 잘못을 저지렀으나 倫常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고 또한 강도나 절도도 아니니 혹은 매를 치고 혹은 꾸짖어서 제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猶父 猶子 사이의 事理上 當然한 일이다. 그가 훔쳐 팔았다는 것이 書冊과 馬匹에 不過한 것인데 자물쇠를 채워서 창고에 가두었다는 것이 이미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는 쇠송곳으로 찌르는 것이 殘忍하다. 이런 일은 婢僕에게도 결코 손수 下手할 수 없는 노릇인데 도리어 무슨 마음으로 제 손으로 친 조카를 송곳으로 찌른단 말인가. 저는 제 任意대로 兄嫂의 田地와 家屋을 팔고도 그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서 도리어 그조카가 책을 훔쳐 판 것을 懲治하였으니, 제가 이미 不正한데 무슨 마음으로 조카를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옛날에 蘇瓊이 말하기를, '아,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은 兄弟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兄이 이미 죽었으니 兄嫂를 받들기를 마땅히 어버이 섬기듯 하여야 할 것인데 7年 동안이나 친정에 쫓아 보내고는 도리어 그의 田宅을 팔아 버리고 또 이러한 殘忍한 일이 그의 兄의 아들에게 있었으니 이런 일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耆賢이 만약 벽을 차고 들어 가 救出하지 않았으면 祖得이는 장차 拘囚中에 한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곧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제게는 獄案을 단정할 수 있다. 承款하기 전에 제가 어찌 감히 살아서 獄門을 나갈 수 있겠느냐. 아, 선비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비록 잔인하고 倫常에 어그러지는 일을 한 자라도 다 輕罪에 붙이고, 더 중할 수 없는 國法은 한갖 勢力없는 잔약한 백성에게만 시행되는구나. 달로는 석 달, 날 수로는 40日동안을 서울 안에 어지럽게 소문이 퍼졌으니 슬프다. 귀와 눈이 귀머거리와 소경이 아니면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곧 돌봐 주기 때문이다. 만약 司憲府의 신하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服藥中에 있으면서 특히 下敎하였는데 모호한 自服으로 啓辭를 만들어 왔다. 그 適用한 刑罰의 이름을 물으니 또한 杖· 徒의 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이렇게 처리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風敎를 樹立하여 末世를 가다듬게 만들 것인가. 슬프다, 堂堂한 司寇인 臣下가 호을로 한 사람의 義氣있는 武士만 같지 못한가. 당해 堂上官은 모두 重한 것에 좇아 推考하게 하라. 만약 이 下敎가 있은 뒤에도 만약 끝내 自服하지 아니한다면 殘忍하여 倫紀를 없애고 放恣하게 임금을 속이는 洙麟을 杖治하다가 죽인들 무엇이 아까우랴. 절차에 좇아 엄중히 訊問하여 기어코 바른대로 供招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李洙麟을 다시 엄중 訊問하여 自服을 받았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제 直招한 供辭를 보니 조금도 숨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아 전번에는 李明宿의 事件을 차마 들을 수 없더니 지금에는 洙麟의 한 짓이 倫紀가를 없애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道義를 破滅하였으며 殘忍하다. 그의 마음 먹음을 깊이 따져 보면 命宿이와 다를 것이 없다. 만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러하나 祖得이 이미 生存하였으니 조카는 살았는데 叔父는 死刑하는 것이 그 또한 어떠할런지.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논의에 묻는다. 그런데 나는 말한다. 續大典中에도 또한 稟旨하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또한 그 뒤의 法官들이 혹은 비슷한 事件이 있을 때마다 문득 이 法律을 引用하여 바로 律을 論定할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이 뒤에 祖得이 이미 살았으니 이 律을 施行하는 外에 다른 길이 없다면 비록 그 머리를 베는 것은 용서하더라도 이와 같은 倫紀가 없이 殘忍한 사람을 常例에 좇아 參酌처리할 수는 없다. 세 차례 엄중하게 매를 친 뒤에 黑山島에 終身토록 定配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今上 8年에 禮曺에서 아뢰기를, "幼學 金樂仁의 上言을 보니 그의 父 澈은 본래 可臣의 아들로서 나이가 60세를 넘었으며 父母가 다 죽은 지가 또한 이미 50餘年이 되었는데 異性 親戚인 安鼎周가 虛僞로 禮斜(禮曺에서 養子를 허가하는 證書)를 내어가지고 生家의 伯叔父인 可相의 祭祀를 받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繼後하는 法은 본래 人倫의 至極히 重大한 일로서 반드시 門中의 어른들의 公正한 論議로 定하는 것인데 오직 저 安哥는 바로 異性의 親戚으로서 함부로 他人의 奉祀를 옮긴다는 것은 실로 常例를 벗어난 해괴한 일입니다. 자세히 調査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읍니다. 安鼎周· 金樂仁은 모두 刑曺로 하여금 엄중히 사핵하여 稟旨처리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논의에 의하여 施行하라"라고 하였다. 刑曺 回啓에, "鼎周는 바로 金哥의 外孫으로서 禮斜를 계교로 내가지고 澈로써 立後하게 만든 것은 진실로 事理밖의 노릇입니다. 律에 의하여 엄중히 다스려야 되겠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그렇게 하기를 윤허한다, 라고 하였다. [重補] 12年에, 昌原 金龍煥이 擊錚, 原情하기를 하고 "저의 同姓 四寸 國臣이 서울과 시골을 돌아다니며 빚을 내쓰고 族徵을 물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5月에는 鄭泰元· 朴世應等이 司圃署의 監差라고 일컬으면서, 蔚山의 堤防築造資金 1千5百兩을 國臣이 빚으로 쓰고 納入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該署의 公文을 계책을 써서 얻어내었으며 請託하는 편지를 求得하여 本郡에 부쳐 本고을의 守令에게 使嗾囑託하게 하였읍니다. 저의 아비에게 무거운 칼을 씌우고 棍杖의 모서리로 발을 방망이질하듯 두드렸읍니다. 그들은 國信과 더불어 제가 上京하여 事實을 調査하고 있다는 기미를 알고는 날마다 官에 告하여 저의 아비에게 懸罰(두 손을 묶어서 달아매는 형벌)을 加하고 채찍을 쳐서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읍니다"라고 하였다. 曺에서 啓奏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金國臣의 저지른 일이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이러한 倫紀를 紊亂케하고 綱常을 悖하게 한 놈을 法대로 엄중하게 다스려 그 叔父의 원통하게 죽은 목숨을 목숨으로 갚게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자세히 조사하여 알리라"라고 하였다. 刑曺의 草記에 아뢰기를, "鄭泰元· 朴世應을 잡아다가 事實을 調査하여 보니 그들의 供招에 말하기를, 昌原 사람 金國信이 돈 1千3百兩을 그의 叔父 仁大에게 부쳐두었는데 만약 國信을 堤防築造工事의 物主라고 하고 官錢이라고 거짓 稱託하여 그의 叔父에게서 받아내자고 하기에 그 고을의 官長에게 계책을 써서 請託하여 억지로 받아낸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압기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金國臣의 罪는 그의 叔을 殺害한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마음에 계획하고 제 손으로 犯行한 것은 아닐지라도 저로 인하여 죽게된 罪를 어찌 免할 수 있겠느냐, 國臣이 살아서 獄門을 나간다면 風俗이니 敎化니 하는 것을 어찌 닦아 밝힐 수 있겠는가, 서울 안의 謀利輩들과 부동하여 간사한 짓을 하였다고 하는 생각은 大局을 살피지 못하고 작은 것에만 구애하는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그 道에 분부하여 營門의 감옥에 엄중히 囚禁하여 두고 用刑의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영남(嶺南)의, 用刑을 기다리고 있는 罪囚들의 罪名을 蕩滌하라는 恩典中에서 昌原의 金國臣은 罪가 倫綱에 관계되므로 常例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 前日의 判下대로 恪別히 嚴刑하여 먼 시골 땅에서 風俗과 敎化를 존중하는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게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13年에 刑曺의 啓目에 아뢰기를, "罪人 沈和鎭의 供述에 "저의 嫡室 三寸叔의 말을 삼가지 않아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가슴이 써늘하리 만큼 놀랄 말을 하여 한 집안 사람 들도 또한 들어서 알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이 일을 變通하지 않았다가는 장차 家族이 禍를 免하기를 保障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제가 嫡系의 六寸을 가보고 果然 서로 수작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읍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沈和鎭이라는 자를 削籍하고 낮추어 庶人으로 만들며 당해 官司에 回付하여 먼저 嫡統을 빼앗으려한 음모를 訊問하고 다음으로 叔父를 誣陷한 罪를 사핵하라, 나의 뜻은 倫紀를 扶植하고 風俗을 바로잡는 데 있다. 대체 叔은 父와 같고 姪은 子와 같다. 猶子로서 猶父를 告發하는 것이 무엇이 子가 父를 告發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겠느냐, 설령 제가 한 말이 事實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들, 父子間의 倫常을 알지 못하는 자가 능히 君臣의 分義를 알수 있겠는가 王政의 立場에서 헤아려볼 때 결코 그 말을 들어 시행할 수는 없다. 하물며 심협은 사람됨됨이 매양 素樸하고 어리석음을 認定할 수 있다. 처음부터 협에게 묻지 않고 굳게 정한 것은 특히 그의 처지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또 近來에 헐뜯고 참소하는 것이 習慣을 이루어 그것이 媒介의 가까운 길인 것처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和鎭이 같은 姪이 叔을 告發하는 일이 있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이 그치지 아니하면 장차는 奴婢가 主人을 告發하고 妻가 夫를 告發하게 될 것이다. 小人의 道가 점차로 퍼져가는 징조를 소홀히 여길수는 없다. 叔을 誣告하고 嫡統을 빼앗으려고 한 죄로 該當한 刑罰에 처한다면 제가 어찌 감히 변명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저의 招辭中에 云云 한 것은 곧 半은 承款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商量하여야 할 일이 있다. 靑平家에는 멀고 가까운 一族 가운데 嫡·庶를 莫論하고 本派의 血屬은 다만 和鎭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和鎭을 死刑에 처하면 靑平의 뒤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또 和鎭이 제 집안의 일로 前郡守 沈載鎭에게 가서 의논할 때에, 다만 處變의 옳고 그른 것을 서로 의논하다가 말하는 사이에 비록 임금에게 登徹하자는 말이 나오기는 하였다고하나 제가 이미 스스로 告變한 흔적이 없으니 마음을 誅責하는 律로 孤島의 定配에 그치더라도 혹은 刑을 잘못한 것은 되지 않을 까 한다. 어제 筵席에서 내린 敎書에 의하여 和鎭을 매를 쳐서 絶島에 定配하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復 讐 아버지의 원수를 갚다. 肅宗 7年에 北靑의 어린 아이 趙文昌이 擊錚하고 原情하기를, 그의 父 趙惟寬이 金奉先의 訴告한 바 되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하고 그의 아우 惟孟과 더불어 奉善을 죽이고 卽時 관에 自首하였더니 특히 死刑을 減輕하고 定配하라는 명령이 있은지가 이미 15年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의 祖母가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언제 죽을지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疏決의 은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擊錚호소한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먼 시골 어린 아이가 아비를 위하여 擊錚하며 原情한 것은 또한 매우 가엾도다. 특히 그의 父를 석방할지어다"라고 하였다. 11年에 임금이 判書 金錫胄에게 이르기를, "刑曺의 文案에 百年이란 자의 殺人事件이 있는데 卿도 들은 일이 있는가, 그의 母에게 奸夫가 있어서 그의 父가 마음 아프게 여겨 병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 반드시 원수를 갚으라고 遺言하였다. 하루는 奸夫가 와서 그 母의 방에 있었다.. 百年이가 분한 생각을 익이지 못하며 또 아비의 遺言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서 드디어 찔러 죽였는데 일이 發覺됨에 스스로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錫胄가 말하기를, "臣은 일찌기 漢나라의 史記를 보았더니 景帝 때에 妻가 夫를 殺害한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또 그 母를 殺害하였읍니다. 景帝가 判決을 내리지 못하였읍니다. 그 때 武帝가 어린 나이로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그의 母가 남편을 죽인 때는 곧 그의 母라는 관계가 成立되지 않는 것이니 무엇이 죽일 수 없다는 事理가 있겠읍니까 하였읍니다. 景帝가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臣의 意見으로는 이 殺人事件도 또한 容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마음으로 가엾게 생각하여 뒷날 旱災로 인하여 특히 석방하려 하니 該曺에서 不可하다고 固執하므로 드디어 귀양을 보내었다. 23理에, 江原監司 兪得一의 啓本에 因한 結案을 보면 罪人 金時男의 供述에, "저의 妻男 大吉이 저에게 말하기를 그의 나이가 11歲 때에 孫儀良이란 자가 그의 父 富男을 殺害하고 그의 母 合節을 奸通하였으며 또 그의 아우의 妻 莫承을 奸通하여 아들을 낳기에 이르니 合節이 그 일에 대한 말을 퍼뜨렸다고 하여 儀良이 合節을 殺害하였습니다. 大吉이 이 일을 항상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하므로 제가 果然 大吉과 共謀하여 儀良을 죽였읍니다"라고 하였다. 三覆 때의 判付에 이르기를, "大吉이 儀良에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가 있다. 時男이 그 당연히 갚아야 할 大吉의 復讐에 助力하여 儀良을 打殺한 것은 人情을 참작하여 볼 때 異常한 일이 아니다. 특히 死刑을 減輕하여 定配할지어다"라고 하였다. 37年에, 三嘉의 出身者 洪邦弼이 남에게 殺害되었다. 그의 妻 崔氏가 그의 딸 洪氏와 더불어 여러 해를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손수 칼로 찔러 원수를 갚았다. 監司가 狀聞하였다. 임금이 下敎를 이르기를, "崔· 洪 두 女人이 꼭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 먹고 마침내 능히 자신의 손으로 칼로 원수를 갚고 官에 自首를 請하였으니 그 늠름한 節義가 옛 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것은 다만 함부로 사람을 죽인 罪를 특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節義를 表彰할 方法을 大臣에게 논의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判中樞府事 李 濡· 左議政 徐宗泰가 다 말하기를, "法을 믿고 제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게 되면 뒷날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旌閭하는 일은 가볍게 施行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復戶의 特典을 주어 우대하여 칭찬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의견에 좇았다. 景宗 元年에 科擧의 試驗場에서 使令 辰必이 사람을 禁止할 즈음에 과거 보러온 선비 朴爾輝가 떠 밀려서 致死하게 되어 殺獄이 成立하였다. 4年 뒤에 李爾輝의 아들 成仁이 辰必을 獄門 밖에서 무찔러 죽였다. 該曺에서 大臣들에게 논의를 청하였다. 左議政 李이명이 말하기를, "이미 아비를 위하여 復讐하였다고 하니 死刑에 처하는 律은 차마 適用할 수 없읍니다"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左議政의 논의에 의하여 施行하라"라고 하였다. 英組 12年에, 忠淸監司 李宗白의 啓本에 아뢰기를, "朴聖昌이 아비의 원수 崔得天을 刺殺하였읍니다. 聖昌의 犯行은 바로 周官에서 이른바 사람을 죽였으나 義로운 것입니다. 經書에서는 復讐하는 것을 義로 許容하였고, 法에는 마땅히 施行하여야 할 律이 있읍니다. 唐나라의 신하 韓 愈가 復讐狀에 이르기를, "무릇 父의 원수를 갚은 事件이 發生하면 그 事由를 具申하여 尙書省에 報告하여 의논을 모아 임금에게 奏聞하고 그 마땅한 바를 참작하여 처리한다"라고 하였읍니다. 그런데 聖昌의 母 金召史는 비록 눈이 먼 廢人이기는 하나 도리어 讐人의 妻가 되어 9年에 이르렀으니 용서할 수 없읍니다. 모두 該曺로 하여금 稟處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刑曺判書 宋眞明이 回啓에 아뢰기를, "聖昌이 어릴 때에 變故를 當하고 겨우 成長하자 快히 9年 동안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일이 매우 기특합니다. 官에 告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죽인 것으로 杖 60의 刑에 처한다는 것이 明白하게 律文에 쓰여 있습니다. 이 律에 의하여 처단하게 하십시요. 聖昌의 母 金召史는 눈이 어둡고 힘이 약하여 능히 抗拒하지 못한 것은 事理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설혹 義롭게 處身하는데 不足한 點이 있으나 罪가 死刑에 미치지 않으니 罪를 容恕하고 놓아 보내는 것이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는데 맞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特別히 韓愈의 論議를 引用할 것도 없이 지나간 事蹟을 찾아 보면 우리나라의 故事에서 보아도 모두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 官庭에 自首하여 죽는 것을 보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하니 또한 옛날의 王世命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특히 復戶의 特典을 주어서 아비의 원수를 갚고 그의 母를 찾아온 孝道를 表彰하고, 金召史는 놓아 보내서 聖昌으로 하여금 모시고 가서 孝道를 다하게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15年에 慶尙監司 李箕鎭이 啓本에서 아뢰기를, "安東의 사삿집 종 李時金이 그의 四寸 李丙哲과 더불어 身役에 관한 貢布納入에 대한 일로 저자에서 서로 詰難하였읍니다. 時金의 아들 李碧同이 같이 갔다가 먼저 돌아왔는데 3里도 채 못와서 홀연히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져서 또 되돌아 가게 되었읍니다. 中路에서 丙哲과 마주쳐서 그의 父의 있는 곳을 물으니 따라 오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짐짓 丙哲을 잡고 같이 그 집으로 가는 길에 忽然히 길 가의 수풀속에 그의 父가 목을 매어 죽어 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情理가 罔極하여 丙哲을 묶어놓고 돌로 마구 쳐서 인하여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本官이 推問하니 碧同이 罪를 承款하였읍니다"라고 하였다. 結案을 詳覆할 때 判付에 이르기를, "法이 비록 嚴하나 五倫도 또한 重하다. 時金이 스스로 목매었다는 것이 맹랑하다면 맹랑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된 자의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늘과 땅을 분별할 수 없다고 할 만한 때이다. 이런 때의 犯罪이니 어찌 參酌 裁量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所謂 마음이 움직여 다시 갔다는 것은 平日에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결코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罪囚를 불쌍히 여기시던 先王들의 착하신 뜻을 또한 어찌 오늘에 본받지 않겠는가. 碧同은 情狀을 참작하여 死刑을 減輕하고 定配할지어다"라고 하였다. 27年에, 서울에 사는 金德同이 自首하여 말하기를, "辛酉年에 저의 나이 겨우 12살 때, 저의 아비 時昌이 同性 四寸大父 斗京에게 刺殺되었읍니다. 제가 나이 어리고 힘이 약하여 항상 원수 갚을 마음을 품었으나 그 機會를 얻지 못하다가 今月 16日에 斗京을 저의 叔 時傑의 집에서 만났으므로 흙과 나무로 亂打하여서 腦의 뼈가 부서져서 現場에서 쓰러져 죽었읍니다. 이제부터 돌아가 원통하게 죽은 아비를 地下에서 보겠읍니다. 마음이 시원합니다. 이것으로 하여 와서 告합니다"라고 하였다. 刑曺에서 傳敎에 의하여 大臣에게 수의한 뒤에 死刑을 減輕하고 먼 곳에 定配하였다. 31年에, 殺獄罪人 奴 弼順을 事件이 完結되기 전에 屍親 李元成 兄弟등이 길에서 刺殺하였다. 刑曺에서 아뢰기를, "일찌기 丁巳年에 金繼漢 兄弟도 또한 父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원수를 刑曺의 門 안에서 刺殺하였습니다. 그때, 大明律의, 子孫이 行兇한 사람을 함부로 죽인자에 대한 律을 適用하여 杖60의 刑을 執行한 뒤에 석방하였읍니다. 그런데 그 뒤에 續大典의 殺獄條에는 그의 父가 被殺하여 殺人事件이 成立되었을 때 推究핵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그 원수진 사람을 죽인 자는 死刑을 減輕하여 定配한다는 條文이 規定되어 있읍니다. 繼漢과 元成이 원수를 擅殺한 것은 同一하나 繼漢을 처벌한 것은 續典을 頒布한 뒤에 있읍니다. 續典에 의하여 처단한다면 元所은 首犯이므로 本律에 의하여 死刑을 減輕하여 定配하고, 志成은 隨從으로 하여 죄 1등을 減輕하여 徒3年 定配하여야 되겠읍니다. 이 뜻을 감히 啓奏합니다"라고 하였다. 傳敎를 내려, "알았도다"라고 하였다. 38年에, 平壤사람 金宗甲이 그의 父가 尹明理에게 毆打 당하는 것을 보고 칼로 明理를 찔러서 인하여 致死하게 하였다. 詳覆 때, 判付에 이르기를, "지금 정승의 아뢰는 것을 들으니 곧 辛卯年의 受敎는 아, 그해의 啓覆은 바로 이 마루에서 거행하였다. 슬프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堯舜을 法하고자 하거던 마땅히 祖宗을 법 받으라고 말하였다. 하물며 이 受敎는 이제 70이 다 된 나이에, 18세 때에 先王의 受敎를 定한 것을 이 마루에서 다 받들으니 五臟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 事件을 만약 常例에 따라 三覆의 節次를 行한다면 그것을 어찌 孝道라고 하겠는가, 刑曺로 하여금 一切 受敎를 遵守하여 死刑을 減輕하고 定配할지어다"라고 하였다. 47年에, 順天 사람 方廷旭이 李永載에게 발로 차여서 致死하였다. 壬辰年에 監司 具允鈺이 威逼人致死의 律을 適用하여 杖1백의 刑에 처하고 埋葬費用으로 銀 10兩을 追徵하여 屍親에게 給付하였다. 同年 10月에 監司 尹東暹은 廷旭의 아우 廷杓의 提訴로 인하여 다시 調査할 즈음에 廷旭의 아들 정규가 官司의 뜰에서 永載를 刺殺하였다. 乙未年 5月에 尹東暹이 刑曺判書로 하여금 筵席에서 陳奏하게 하였다.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刑曺判書의 啓奏를 들으니 그 일이 옛날 王世命이 원수를 칼로 찌른 것과 다를 것이 없다. 監司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狀聞하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監司 蔡濟恭이 査啓하기를, "이 事件의 要緊한 點은 오로지 廷旭이 발에 채였다는 일이 虛僞인가 眞實인가에 달렸읍니다. 延旭의 죽음이 과연 永載가 찬데 있다면 정규가 永載를 칼로 찌른 것은 진실로 人情과 天理에서 禁하기 어려운 것이며 만약 혹시라도 永載가 발로 찼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의심이 있다면 정규가 어찌 殺人罪를 벗어날 수 있겠읍니까. 臣의 微微한 의견으로는 정규가 永載를 刺殺한 것은 아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에 대한 律을 適用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丙申年 2月23日에 令을 내려 이르기를, "방정규의 事件은 法으로 보면 마땅히 原情으로 論하는 것이 律에 있어서는 원수를 죽인 것으로 論하는 것이 마땅하다. 혹은 용서하여 살릴 길을 의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道에서 死刑을 減輕하여 처벌할 것을 照律할지어다"라고 하였다. 今上 4年에, 龍崗 사람 林 樺가 이웃 사람 金천적와 서로 싸우다가 나무삽(木揷)으로 천적의 머리를 때려서 昏倒되게 하였다. 천적의 아들 光贊· 光連이 함께 林 樺를 구타하여 즉일로 致死하고 光連은 逃走하고 光贊은 붙잡혔다. 4차례나 死體를 檢驗하고 光贊이 自服하게 되어 結案하였다. 監司의 啓本으로 因하여 刑曺判書 李性源이 回啓하기를, "설령 屍親의 供述대로 毆打한 자는 光連이요 차고 짓밟은 자는 光贊이라고 하더라도 그 兄弟가 분김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섞어하는 때를 당하여 구타하는 자가 반드시 차지 않았다고 할 수 없고 발로 차는 자가 반드시 구타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監司에게 분부하여 金光贊은 아직 그냥 囚禁하여 두고 金光連은 嚴重하게 정탐 수사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무릇 殺人事件의 文案은 死因을 여러 번 바꾸고 傷處를 여러 번 고치면 비록 이미 完結하였더라도 決코 그냥 殺人事件으로 成立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光贊은 光連의 兄으로서 처음부터 자기가 떠맡고 나서는 것은 人情을 참작하여 보면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犯行은 동기가 아비를 위하여 憤을 풀려는 데서 나온 것이요, 뒤에 罪를 자복한 것은 또 아우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證跡이 이미 용서할 만하고 情狀이 또 가엾다. 律文中에도 또 한 事件으로 손위와 손 아랫사람을 아울러 처벌하는 規定이 없으니 그들을 오래도록 囚禁하여 두기 보담은 어찌 속히 처벌해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金光贊을 특히 死刑을 減輕하여 定配할지어다"라고 하였다. [重補] 8年 咸興府尹의 錄啓에 의하여 同推罪人 朱炯翕이 주단을 刺殺한 獄事를 議啓하였다. 參議 李獻貢이 말하기를, 設使 炯翕의 父가 주단에게 被殺되고 그 卽時로 兵器를 돌리어 官에 告發하였다면 執法하는 官吏들도 마땅히 律에 의거 罪를 論議함에 있어 반드시 輕易하게 傳生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나 炯翕이 所謂 復讐란 것은 眞正한 公證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마침내 투홍의 私憤에 不過한 것이며 果然 炯翕의 父가 毆打를 當하여 致死하였다면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보았을 것이요 또 입이 있는 사람은 다 말할 터인즉 아무리 제대로 말이 되어 나가기만 힘쓰고 隱忍하여 告官하지 아니 하였다 할지라도 될 일이 겠는가. 洞里를 같이하고, 서계을 같이하여 11年을 지내다가 忽然히 書衿錄(儒生錄)의 登錄을 防害한 事件으로 因하여 重翁의 至親으로서 같은 憤心을 품고, 共同으로 이를 殺害하고, 復讐로 憑藉하여 도리어 官에 告發함은 살기를 圖謀한 計策이 明若觀火한 일이라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獄情의 是非와 償命의 與否는 모두 그만 두고라도 戊子年에 特敎로서 判付한 事實이 文案에 昭詳하게 載錄되어 있으니 敢히 輕率하게 容議를 加할 수 없으므로 지금까지 두었던 것이나, 庚戌年의 別諭內에 朱炯翕의 獄事를 父讐의 報復이라고 한다면 隣里에서 서계를 같이하여 난만하게 無故한 사이와 같이 11年을 지냈다고 하였으니 이는 先朝의 判下가 道伯의 狀淸을 不許한 것이며, 또 그를 成獄한 翌年에 문득 疑輕의 科에 付한 것은 더욱 殺獄을 重하게 하는 뜻이 아니라 하였으니 이를 處分한 聖意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이로서 年前審理할 때에도 또한 輕率하게 容議를 加하지 못 하도록 判下하였도다. 지금 囚人의 記錄에 인하여 다시 原案을 閱覽하건대 대개 成獄한지 近30年이 되고, 受刑을 屢百次로 하였으나 그의 父가 주단에게 被打되어 致死한 것이라 하니 이것이 丁寧이라면 丁寧이고, 그가 年久한 후에 發告하여 말하기를 그 父가 挽止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疑心스러운 일이며, 그의 말은 비록 取信할 것이 못 된다 할지라도 律文을 按察하건대 父讐를 報復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 그 事實이 年久하다면 杖60의 罪에 그치는 것이니 그가 官門에 나아가 自首함을 보면 그의 父가 주단에게 被死한 事實은 疑心이 없는 것 같고, 그의 招內에 炯翕은 孱弱하고, 주단은 壯健하므로 처음에는 敢히 뜻을 내지 못하였다가 重翕의 집에 가서 주단이 重翕과 싸우면서 炯立은 오히려 나를 죽일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는 憤心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같이 장살하게 되였다고 한 것은 可謂 實際라 할 수 있고, 炯立은 즉 그의 兄인지라 父讐를 報復하지 아니한 그 兄을 辱하고, 그가 말하는 舊怨과 新憤이 倂發된 것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眞情이라 할지로다. 殺獄이 아무리 至重하다 할지라도 傳輕할 疑端이 있다고 하면 尋常한 審理에 있어서도 오히려 3次로 致意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지금 大赦하는 時期이랴 옛날 先王朝에서도 무릇 이같은 重案에는 처음은 비록 嚴防하였으나 結局은 曠蕩의 特典에 付한 事實이 많었으니 만약 이를 先朝의 處分에 屬한 事件이라 하여 오늘날 敢히 擧論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 어찌 好生하는 至仁과 盛德을 본 받는 일이라 하겠는가. 卿은 그를 公庭에 招致하여 判下의 辭意를 曉諭한 후에 特히 放送할 지로다. [重補] 同年 寧越 朴來麟이 朴成大를 毆打하여 第23日에 致死하게 하였다. 致死한 實因은 被打로 되어 있다. 道啓에는 來麟의 父 泰元이 成大에게 피척하여 病으로 누어 일어나지 못하므로 來麟이 그를 한번 報復한 것은 진실로 人情에 말 수 없는 일이며, 그의 山上에 火災가 일어 남에 있어서 이는 成大가 故意로 放火한 것인지는 비록 알 수 없는 일이나 이미 그의 祖父의 墳墓에 가까웠으며, 또 悖說함을 듣기된 來麟의 心情으로서는 此漢이 이미 吾父를 殺害하고, 또 祖父의 墳墓옆에 불을 질렀으니 死生을 不計하고, 重傷· 致命에 이르기 된 것이므로 來麟의 犯情은 容或 考慮할 事實이라 하였고, 刑曺의 回啓에는 그 父가 죽음에 있어서 마땅히 卽地에 報復하여야 할 일이나 因循하게 날을 지내다가 祖山에 火災가 일어남을 보고, 또 成大의 말이 悖淚함을 듣고 비로소 毆打 殺害하였으니 이는 그 父의 復讐와 雪 하기 爲하여 나온 計策으로 볼 수 없는 일이므로 이를 嚴訊하여 取服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復讐를 許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先王의 制度에 違背되는 일이요 復讐를 許한다면 法에 의하여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 된다고 한 것은 옛날 先儒들의 말이 있는바 이 獄案이 事實 이말에 가깝도다. 이러므로 道臣은 原情으로서 論하고 司冠(刑曺)는 法을 지킨다는 意見이니, 나로서는 둘 다 옳은 일이라 하겠노라. 元犯成大는 來麟에게 可謂 反兵하지 못할 怨讐라 하겠다. 이미 그 老父를 殺害하고, 또 先榮을 불 태우고, 甚至惡談까지 加하였으니 이때를 當하여는 비록 來麟으로 하여금 칼로서 찔러 죽였다 할지라도 償命하는 科에는 適用되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그 父가 죽은 후에도 자못 頑冥하게 움직일 줄 모르다가 時日이 지난후에 成大를 打殺하고 또 登時에 告官하지 아니 하였으니 周官에서 말 한바 선비가 죽인 것은 無罪로 한다는 것과는 큰 差異가 있으나 暫時 囚禁하였다가 인해 釋放하였으니 대개 죽을 때의 付托은 반드시 죽이고 말기 되므로 즉 이것이 復讐하는 計劃이요, 致死하였다는 通報가 겨우 傳하여지자 成大는 逃亡하였고, 私和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來麟이 極口 否認하고 있으니 成大의 犯行을 來 이 기다리고 있었음은 말하지 아니 하여도 알 수 있는 일이니 이와 같은 罪囚는 特히 寬典에 따라 措處하는 것이 法을 지키고 原情을 參酌하는 데에 害로울 것이 아니니 死刑을 減하여 定配하라"라고 하였다. [重補] 12年 康津 尹太緖, 彦緖가 尹德奎를 毆打하여 第38日에 致死하였다. 致死한 實因은 病患으로 되어, 成獄하지 아니하고, 彦緖도 蒙放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德奎의 子 尹침과 尹恒, 그의 弟 덕뢰등 3人이 彦緖를 刺殺하였으므로 成獄하여 囚推하게 되었다. 德奎의 女 어린 任賢이 擊錚한 原情內에 저의 父 德奎가 지난 3月에 還穀을 받기 위하여 倉底로 간즉 同門 庶孼인 太緖와 孝緖 두 사람이 還穀을 爭奪하고 저의 父를 毆打하여 卽地에 氣絶하게 하고 38日만에 身死하였으므로 卽日 官에 告發하였으나 檢官이 漫辭로 營門에 報告되어 마침내 成獄되지 아니하므로 저의 祖父는 病憤한 끝에 絶食하여 죽었으며, 저의 母는 피눈물로 號泣하다가 죽었으니 한 집의 셋 喪吊事 이 두 寃讐에 綠由한 것이므로 침과 恒의 두 兄과 庶叔에 父母의 寃讐를 갑기 위하여 孝緖의 出來를 엿보고 있다가, 3人이 다 같이 手刀으로 배를 째고, 肝을 물고, 父의 墳墓에 와서 痛哭하고, 本官에 自首한 즉 兩兄과 庶叔은 枷를 싸워 囚禁하고, 太緖는 放送하였다 한다라고 刑曺에서 回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檢官이 만환하였음은 極히 無理한 일이며, 읍채가 扶抑함은 또 常情에 乖淚함이로다. 朝家에서 道伯을 設置한 것은 民情을 巡察하여 風敎를 바로 잡게 한 것이나 道內에 이러한 寃狀이 있어도 昧然히 모르는 것 같이하여 兇身인 완얼로 하여금 無辜하게하고, 兩人을 도리어 橫罹하게 하여 이 어린 女兒가 鳴寃하는 擧措를 敢行하도록 하였으니, 그 情狀은 可矜하나 法으로서는 不當한 일이며, 道伯의 溺職이 이와 같으니, 推官과 읍채들의 誤決은 特히 次第의 伴事가 아니로다. 當該監司 沈이지는 爲先 緘辭하여 從重推考하고, 이를 어찌 반드시 行査한 후에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尹침등은 保放하고 太緖等은 도로 囚禁하여 營上의 文案을 枚擧하고, 인해 徑決한 事由를 訊問하여 早速한 時日에 狀聞하도록 嚴飭하여 行會하게하라 監司 沈이지의 啓本에 비록 德奎의 死亡한 事由가 被打라 할지라도 彦緖가 慘殺을 當하였으니, 이로서 德奎의 償命에 足한 것이나, 弟가 被殺되었는데 兄을 또 償命하게 한다는 것은 審克하는 道理가 아닌 것이므로 賤臣의 所見은 이에 不外한 일이니 삼가 處分을 바란다 라고 刑曺에서 回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獄事는 解決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로다. 殺人者死는 天下萬世를 通하여 바꿀 수 없는 法이나 父母의 雪憤과 復讐를 위하여 사람을 毆打하여 傷하게 하고, 致命하게 된 者가 많었으되 이를 屈하여 容赦한 것은 대저 律例가 가장 重하기는 하나 倫義에 比較하여는 輕한 것이며, 거듭 그 取捨를 살핀다면 그 限界가 明確한 일이로다. 차 恥와 憤怒는 讐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親父를 爲하여 下手한 것도 오히려 傳生하거든 하물며 이 獄事는 復讐에 가까운 일이 아니 겠는가. 尹德奎의 死因은 被打나 因病을 莫論하고, 또 辜限의 內外임을 莫論하고, 痕損이 그 완얼에게 綠由하며 疾崇을 이르킨 것도 그 완얼에게 있었으니 그 완얼인 太緖. 彦緖等 2人은 홀로 德奎의 子 침. 恒등의 寃讐가 아니겠는가, 지금 道伯의 말을 쫓는다면 復讐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 터이며 그렇다면 復讐라는 復字는 律例에서 除去되어야 하겠는가. 또 혹 父母의 雪差와 逞憤을 위하여 사람을 殺傷한 경우에도 또한 一言도 없어 일일이 償命하여야 할 터이니 減死· 或은 杖· 流, 或은 勿論의 文字를 전부모아 水火에 付하여도 無妨하다는 것인가. 本獄의 成案은 지금 可論할 것도 없으니 인해 本曹에서 判下의 措辭를 列擧하여 諸道에 行會하여 각각 風俗을 致駕하게하고, 敎化를 崇尙하는 該道에 留心하게 할지로다. [重補] 同年 連山 崔玉函이 石楚得을 입으로 물어 第20日에 致死하게 하였다. 致死한 實因은 被咬로 되어있다. 庚戊年 道啓에 前道臣 金文淳. 권엄의 論啓에는 屍帳의 記錄과 屍親의 供辭가 情狀에 있어서 이미 緊重한 것이 못되고, 法에 있어서도 沕合하여 아니한 일이라고 한다 하였다. 別論內 一脂의 毒이 어떻게 위로는 어깨에 올라가고, 아래로는 腹部에까지 侵透한다는 말인가, 주잡하지도 아니하고 潰涵하지도 아니한 膿水가 무슨 理由로 그 毒이 腹部에 侵入되였다고 하겠는가, 卿等의 論啓가 甚히 分明하도다. 屍帳의 痕損과 屍親의 供招가 法文에도 合當하지 아니하고, 獄情에도 친합하지 아니하니 이 하나로서도 可히 傳生할 수 있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를 兼有한 일이 아닌가 玉函은 特히 放送할지로다. 基年8月에 石楚得의 子 致圭가 玉函을 칼로 찔러 卽日 致死하게하고 本縣에 自首하였다. 致圭의 招內에 저의 父가 玉函에게 被咬하고, 그 傷處로 인하여 致死하였으며, 臨死할 때에 눈물로 저에게 말하기를 玉函이 나의 手脂를 물어 死境에 이르렀으니 네가 告官하여 寃讐를 갚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의몸이 發告하여 成獄하게 되었으나 忽然히 玉函이 白放되었다는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失聲痛哭하였으며, 老母를 告訣하고, 칼을 갈아 出門한즉 叔父 楚振이 挽留하고저 하므로 의몸이 소매를 뿌리치고, 玉函을 따라 그의 姨母家에 가서 房中에 들어 玉函에게 이르기를 네가 吾父를 咬殺하였으므로 반드시 法으로서 雪寃코저 하였으나 너는 國恩을 무릅쓰고 白放되었으니 네로서는 비록 多幸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父讐를 갑지 못 하였으니 그 痛迫함을 참아 말 하겠는가, 네가 이미 吾父를 이로서 물었으니 내 마땅히 네의 數齒를 빼서 이 至極히 寃痛한 情을 조금이라 풀겠노라하고, 인해 그의 소매를 잡을 즈음에 저의 叔 楚振이 따라 왔으므로 의몸이 저의 叔에게 고색을 가지고 오라하여 저의 叔을 나가게하고 인해 玉函의 가슴을 한번 찌르니 玉函이 소리를 치며 건너房으로 逃亡하는바 의몸이 쫓아가서 亂刺하였으며, 의몸이 이미 讐人을 찔렀으니 이로서 죽어도 亡父를 뵈올 낯이 있다고 하였으나, 特敎로 白放한 囚人을 官家에 告하지 아니하고, 任意로 刺殺하였으니 律에 의하여 勘處한다 라고 道에서 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미 滌蕩할 뜻에서 나온 일이요. 兼하여 執疑하는 끝이 있어서 特令으로 決放하였으나 이에 石致圭의 讐復하는 일이 있게되고, 告官하는 擧措와 納招하는 말이 痛快하고 正當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律에 없는 律이라도 오히려 商量할만한 일이거든 하물며 法文이 明確한 일이 아니 겠는가 石致圭등은 放送할지로다"라고 하였다. [重補] 同年 金禾里奉이 債錢의 分用으로 인하여 同商人 金應采를 毆打하여 一夜를 지나 致死하게 하였으므로 이를 成獄하여 囚推하였다. 庚戌年 別諭內에 屍親外에는 다른 公證이 없고, 傷處가 柔軟하며, 약간 푸르고, 약간 굳어지고, 피를 吐한 것으로서는 舊症과 新崇을 區別하기 어려우므로 다시 調査하게 한다. 道에서 啓奏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獄事를 長期間 旣決. 未決로 둘 것인가, 裁判은 오직 酌處하기에 있는 것이니 道伯으로 하여금 모든 情狀을 參量하여 刑放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禾里奉이 蒙放한 후에 讐怨을 避하여 故鄕을 떠났다. 應采의 子 金啓孫과 聖孫, 兄弟가 두 개의 칼을 만들어 각각 가슴에 품고, 禾里奉을 찾어 周行하든차 辛亥年 가을에 禾里奉을 尼城의 大路에서 만나 啓孫은 먼저 胸腹을 찌르고, 聖孫은 繼續하여 咽喉를 찌르고, 큰 소리로 復讐하였다고 한번 외치고는 官家로 달려가 告하였다. 忠淸監司 朴宗岳의 啓本에 大明律에는 「父祖가 사람에게 被殺되므로서 그 子孫이 行凶人을 擅殺한 경우에는 杖60의 刑에 處한다」하고 大典通編에는 「父母가 被殺되므로 그 讐人을 擅殺한 경우는 減死한다」는 文字가 있으나 禾里奉을 酌放한 것은 好生하는 德意에서 나온 것인즉 啓孫이 刺殺한 것은 尋常한 擅殺로서 勘斷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이 金啓孫등 兄弟의 文案을 보건대 그 孝道가 可感한 일이며, 그 情狀이 可惻한 일이며, 그 心理가 可悲한 일이며, 그 정성이 可憐한 일이며, 그 뜻이 可奬한 일이니 이러한 일이 하나만 있어서도 法에 있어서 마땅히 容恕되어야 하거든 하물며 이 兄弟2人은 다섯가지의 卓越한 行實을 兼有하였으니 朝家에서 만약 이들을 等閑히 看過하여 例에 따라 「擅殺讐人杖60 급구핵전 擅殺讐人 減死定配」등의 律文을 適用한다면 그 어찌 世俗을 正導하고, 風化를 敦篤하게 하는 政事라 하겠는가, 대저 後讐하는 光景을 目擊하면 現場에서 몸을 던저 一己의 死生은 不顧하고, 반드시 報復하고야마는 것은 종종 있는 터이나, 啓孫등은 利刀를 만들어 각각 懷中에 간직하고, 許多한 歲月을 積費하고, 또 許多한 商量을 기우려서, 그 讐人이 酌處되어 出獄할 때에 미치어서는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지키고, 멀리 가면 멀리 따라 畢境은 兄弟가 손을 같이 어 復讐하되 먼저 찌른 者는 兄이요, 뒤에 찌른 者는 弟이며, 讐人을 이미 殺害하고는 兄弟가 官府에 달려와서 自首하고, 法에 의하여 죽기를 請하였으니 古人이 이르는바 「慷慨殺身은 쉬워도, 從容就死는 어렵다」는 것이 啓孫의 兄弟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事債을 비록 三倫의 行實에 載錄하드라도 견재의 嫌疑가 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로다. 錦伯處(忠淸道監司)에 分付하여 啓孫등은 放送하되 營下에 招致하여 判付를 謄給하고, 仍해 곧 原籍官인 全州牧에도 交付하고, 또 道伯으로 하여금 그의 處地를 보아 別途로 收錄하게 하였다. 湖南의 文明으로서는 반드시 人材들이 많을 터이므로 京試官이 還朝하기에 本道의 人材들을 물어서 擧條를 내어 下諭하라고 하였든바 數日이 못되어 이 啓孫의 文案을 보고, 啓孫이 어찌 人材가 아니겠는가 아직 昨年의 申汝倜文案과 銀愛文案을 記憶하거니와 그 때에는 特別히 稱奬을 加하고, 그들도 또한 人材였으므로 이로 미루어 더욱 搜訪을 容緩하지 아니한 뜻은 世俗을 正導하고, 風敎를 敦篤하게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道內에 널리 보이게 하고, 仍해 本曺로 하여금 이 獄案과 判付를 列擧하여 完伯(全羅道監司)에게 下送하여 곧 宣布할 것을 分付하라"라고 하였다. 復 母 讐 [重補] 13年 光州 朴正得이 文女를 칼로 찔러 卽地에 致死하게 하고, 致死한 實因은 被刺로 되어 있다. 道啓에 正得의 母曺氏는 本來 失行한 事實이 없었으나 文女가 거짓으로 꾸며서 傳播하고, 또 높은 곳에 올라가 呼唱하기도 하였다. 가령 曺氏는 이를 참고, 죽지 아니 하였다 할지라도, 그 子息되는 者로서는 오히려 不共戴天의 원수이다. 이로서 참기만 하고, 正得이 만약 報復할 마음이 없다면 그 어찌 人子라고 하겠는가, 3年동안 機會를 엿보다가 一劍으로 배를 찔러 죽이고, 官에 自首하여 죽겠다고 한 것은 진실로 當然한 事理이며, 그 風敎를 敦篤하게 하는 政事에 있어서도 마땅히 容恕하여야 한다 하였다. 判書 沈이지의 啓奏에 누구나 淫蕩하고 醜雜한 말로써 그 母를 誣陷한다면 手刃으로써 刺殺하는 擧措는 子職을 저버리지 아니한 일이라 하였다. 上이 이르기를 大臣의 뜻은 어떠한가. 領議政 金鍾秀 아뢰기를 正得의 母가 投水한 것은 전혀 文女때문인즉 正得이 文女를 刺殺함에 있어서는 償命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上이 이르기를 刑官과 大臣의 말이 모두 나의 뜻과 合致하도다. 本曹에서 適用할 律文을 旁照하고, 道臣에 分付하여 곧 勘放하게 하라. 復 夫 讐 世祖 14年 上이 溫泉으로 幸行할 때 鴻山人 羅季文의 妻 尹氏가 行宮外에서 痛哭한다. 上이 드르시고, 그 事理를 무르니 對하여 아뢰기를 仁山君 洪允成의 婢夫가 允成의 勢力을 憑籍하고 길에서 妾夫를 만나 無禮한 行動을 敢行하므로 妾夫가 이를 責하였더니 驛吏들로 하여금 妾夫를 毆殺하였으나 本邑守令崔倫은 權勢를 두려워하여 다만 驛吏를 囚禁하고 나머지는 모두 不問하였으며, 允成의 두 奴子가 또 驛吏를 뺏어 갔으나 監司 金元慶은 또 赦令을 憑籍하여 모두 放還시키고, 도리어 妾의 父가 允成을 謀害한다 하여 獄에 捕繫하므로 이로써 妾이 우는 것이라 하였다. 上이 尹氏를 불러 親問하고, 그 事情을 惻然하게 생각하여 그 卽時에 監司 金元慶과 守令 崔倫을 拿致하여 詰問한바 모두 말이 窮하여 제대로 對答하지 못하므로 允成과 아울러 拿鞫하고, 婢夫와 두 奴子는 모두 極刑에 處하였다. 仍하여 敎하기를 尹氏가 威勢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能히 夫讐를 報復하였음은 그 節義가 嘉尙한 일이니 쌀 10斛을 賞給하라고 하였다. 肅宗 8年 前參奉 申勉이 常漢 受奉을 杖으로 때려 죽였다. 受奉의 妻 玉禮가 그 忿恨을 이기지 못하여 申勉의 이마를 打傷하여 16日만에 죽게 하였으므로 그 子 光斗가 官府에 告發하여 玉禮와 受奉의 두 아우를 囚繫하였다. 刑官 李翊이 啓하기를, 玉禮가 應死할 사람을 擅殺하였으니 이는 本來 死罪에 屬하는 것이 아니며, 그 夫讐를 報復한 것이므로 容赦할 길이 있다 하고, 司直 金錫曹 아뢰기를 玉禮가 이므 夫讐를 報復한 것이므로 原來 代殺하는 法理는 없을지라도 官에 告하지 아니하고 擅殺한 것은 스스로 그律이 있으므로 그대로 釋放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하였든바, 上이 그리하라 하였다. 14年 慶尙道 私婢 春玉이 그 夫讐를 報復하였든바, 이를 將次 償命하기로 하여, 該曺에서 大臣에게 議論하기를 請하니 大臣들은 모두 말하기를 子息이 그 父에 대하여서나 妻가 그 夫에 대하여서나 그 義理는 同一한 것이며, 그 復讐하는 道理에 있어서도 異同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그 夫가 致死한 때에 訴狀을 갖이고 官家에 告하였으니 擅殺한 罪도 또한 施行할 수 없는 것이며, 此女의 義烈은 足히 世俗을 警飭할 만한 일이요 可히 褒할지라도 罪줄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上이 敎하여 이르기를, "春玉이 그 男便의 非命에 죽었음을 悲痛하고 含哀積慮한 끝에 칼로서 讐人을 刺殺하였음은 實로 丈夫로서도 行하기 어려운 일인데 鄕谷의 賤女로서 이러한 擧事를 敢行하였음은 至極히 嘉尙한 일이나 褒奬의 典을 施行함이 合當할지며, 律에 이미 父母를 爲하여 復讐하라는 글이 있으므로 夫讐는 그중에 있음을 알 수 있고, 擅殺이란 罪와 償命이라는 律은 이에 可論할 바도 아니니, 特히 정려에 褒彰하여 朝家에서 彰善痺惡하는 뜻을 보이게 할지로다"라고 하였다. 英組 23年 京畿監司 李命坤의 啓本에 張玉奉이 喪妻한 후 盧姓의 女人을 率畜하였던바 그 性行이 悖惡함으로 이를 버렸다. 그후 朴阿只를 子婦로 다려온 즉 盧女가 嫌怨을 품고, 凶한 符雀을 埋沒하므로서 玉奉의 子 貴得이 갑작이 怪疾에 걸려 死亡하고 子婦 朴阿只도 또한 같은 怪疾에 걸려 呻昑하던 중이다. 玉奉의 姪 春發과 이웃사람들이 盧女를 詰問하여 묻어 둔 凶符를 파 내었다. 朴阿只가 夫讐를 報復하기 위하여 鎌刀으로써 盧女를 刺殺하고 그 길로 官門에 가서 法의 處決을 받고저 한다. 續大典에 이르기를 「그 妻가 그 夫의 讐怨을 報復하기 위하여 讐人을 擅殺할 경우에는 子孫이 父讐를 갚기 위하여 行凶人을 擅殺한 律에 의한다」하였으나 이는 他人이 그 夫를 殺害하였을 때의 復讐를 말한 것이요. 그 媤父가 一時나마 同居한 女人에게는 適用될 수 없으므로 아무리 律文을 考察하여도 마침내 施行할 律文이 없으므로 敢히 駝啓한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貴得의 妻가 시집온지 한 해도 못되어 그 媤父가 이미 遂出한 花妻이므로 그를 모르는 것은 異狀한 일이 아니며, 悲寃을 품은 孑孑 女人이 鎌刃으로서 讐人을 刺殺하고 官門에 왔어 發告함은 그 마음이 可矜하니 續大典의 律에 의하여 施行하고, 亂之本은 玉奉이니 本道로 하여금 參酌하여 科治할지로다"라고 하였다. [重補] 今上 5年 順天人 趙以中이 李陽宅을 打殺하여 水中에 던졌다. 道臣 徐有隣의 稟啓에 인한 本曺判書 徐浩修의 回啓에 이 獄事를 初檢에서는 許多한 傷處가 모두 柔軟하다고 하여 물에 빠져 致死한 것으로서 致死의 實因으로 하였고, 覆檢에서는 許多한 傷處가 모두 堅硬하다고 하여 被打한 후 물에 던져진 것으로서 致死의 實因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金世江으로써 正犯으로 하였으나, 世江이 死亡한 후에는 또 趙戒中을 正犯으로 하고, 趙戒中이 定配된 후에는 또 趙以中을 正犯으로 하였으니 대저 獄體란 것은 死者의 實因과 生者의 正犯이 가장 重要한 것이다. 實因이 前後가 서로 다르고, 正犯이 여러번 變更되니 償命의 案과 傳生의 論을 容易하게 決定할 수 없으며, 이 獄事의 要點은 專혀 自溺과 被打에 있는 것이나, 道臣의 結語에서는 陽宅을 물에 떨어져 죽게 하였으면 世江이 首犯이요, 以中이 次犯이며, 陽宅을 被打하여 죽게 하였으면 戒中이 首犯이요. 以中이 次犯이라 한 것도 또한 情僞의 實地를 把握한 것이나 世江이 死亡되고, 戒中을 發配한 후에 正犯을 세 번이나 變更하여, 以中에게 勒歸함이니 이 審理하는 날을 當하여 惟輕의 典을 施行하는 것이 合當할 터이나 敢히 擅斷할 수 없으므로 上裁를 바란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道의 狀啓와 刑曺의 回啓가 같은 理論이 있다 하겠다. 李陽宅이 사람에게 毆遂되어 水中에 自殺하였다면 世江이 元犯이나 이는 이미 死亡되었고, 만약 사람에게 打殺되어 水中에 轉投하였다면 戒中이 元犯이나 이는 또 酌配되었으니 이러나 저러나 以中이 決코 元犯이 아님을 알 수 있고, 5年동안을 추핵하면서 세 번이나 元犯을 變更하였음은 今番의 審理와 같은 것이 없었으니 朝家에서 어찌 저같은 寃獄이 있었을 줄 알았겠는가. 이를 參酌하여 定配할지로다. 6年 陽宅의 奴 快孫이 上言하였다. 그 內容에 丙申 2月22日 저의 上典 陽宅이 和順試所에서 돌아 오든차 順天廣淸村에 이르러 同行하던 張希祖와 本村 趙戒中이 言爭하다가, 戒中이 그 弟 道中과 從弟 總角인 以中을 거느리고 一行을 毆打함으로서 一行이 四方으로 흩어지고 陽宅을 林亭路上으로 追擊하여, 몽둥이와 돌로 體打하여 卽地에 致命하게하고, 屍體를 水中에 던져 그 形跡을 湮滅하기로 한 것인바, 同接 金寅喆등이 屍體를 건져서 本家에 連絡한 것이며, 陽宅의 兄 陽奎가 府使 任觀周에게 檢按하여 주기를 請하였으나 觀周는 兩班의 屍體을 檢按하기는 未安한 일이라 하여 卽時 檢按하지 아니함은 대개 戒中의 請託을 받은 것이며, 25日네 처음 와어 檢按한바 머리의 상투가 아직 풀어지지 아니하고, 網巾이 풀리지 아니 하였으며, 衣服도 如常하고, 爪甲에는 沙泥가 없었으며, 脊背와 脅助에 傷處가 怪硬였하으니 이는 確實히 죽여서 水中에 던진 것이나 證人金世江이 初招에 말하기를 橋梁을 改修할 때에 戒中등 三人이 한 儒生을 毆打하여 仍해 投水함을 바라 보았다 하고, 再招에는 이를 變辭하여 말하기를 陽宅이 쫓끼여 水中에 自溺하였다 함으로 府事가 被逐自溺」으로서 그 實因을 懸錄하였으며, 初檢後에도 卽時 覆檢을 請하지 아니함은 그 屍體가 썩어서 傷處를 없애기 위한 것이며, 3月初1日에 藥安郡守 林世裁가 覆檢하여 寃氣가 어리여 傷處가 더욱 明白하다 하고, 처음으로 「被打投水」로서 그 實因을 懸錄하여 金世江의 邂逅致死에 因한 것이라 하였으므로 府事가 營門에 親往하여, 世江을 元犯으로, 戒中을 于犯으로하고 成獄하지 아니 하려 하였으며 그때 道臣 李普行이 推官에게 論報하게 하였다. 光陽 懸監의 報告에 말 하기를 世江과 陽宅은 原來 피가 맺친 원수가 아니므로 이를 毆打하여 投水한다는 것은 果然 理外의 일이며, 世江의 招辭를 보면 3人이 한 儒生을 毆打하여 水中에 던 음을 目擊하였다고 하니 戒中등을 마땅히 元犯으로 하여야 하나 以中에 이르러서는 陽宅이 致死하든 밤, 草笠을 쓰고, 姓名을 變하여 他處로 逃避하였으니 만약 犯行이 없었다면 어찌 怯을 내어 멀리 달아 났겠는가. 이로서 推測하면 以中을 마땅히 元犯으로 하여야 하고, 戒中과 道中은 緊犯이므로 別途로 推官을 定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樂安郡守 申致權과 興陽縣監 沈命德의 報告에 말하기를 이 獄事는 대체 戒中이 根本이며, 道中과 世江은 干連이나 世江은 이미 死亡되였으므로 以中이 眞犯일 것 같다고 하였으며, 府事는 病을 憑籍하여 8個月 동안 闕推하고, 또 無端히 道中을 放送함으로, 陽奎가 營門에 呼訴한즉 營門에서 別途로 南原등 9個邑의 官員을 推官으로 定하여 한데 모여 詳細히 調査하게 하니 이들이 該府에 發送한 關文에 이르기를 陽宅이 「被打投水」한 것은 戒中의 行爲가 明白한 事實이며, 當初의 事件原因이 戒中의 起鬧에 始作되어 畢境致死하게 된 것은 以中의 毆打로 인한 것이고, 以中이 그날 밤 逃亡하면서 加冠變姓한 情狀은 嚴刑하여 그 實情을 알아야 할 것이며, 戒中은 空然히 起鬧하여, 殺越의 變을 이르킨 者이니 全然 釋放하지말고, 照律次 取招하여야 할 터이나 그후 戒中은 原謀와 共毆로서 定配되였다고 하였으며, 決訟案에 말하기를 謀殺하기를 造意한 者는 斬刑에 處하고, 따라 加工한 者는 絞刑에 處하고 隨從은 하였으되 加功하지 아니한 者는 杖1百·流3千里의 刑에 處하기 되어 있으니 戒中은 原謀共毆와 謀殺하기를 造意한 者와 서로 같으므로 그 罪를 마땅히 斬刑에 處하여야 할 터이나 定配에서 그쳤음은 痛恨한 일이므로 査官과 營門에서는 以中을 元犯으로 하여 償命하기를 바란다 하였으며, 庚子年 겨울에 疏決하라는 命令이 내리므로 道臣 徐有隣이 正犯을 3變하므로써 以中은 次律에 處할 것을 稟請하였다는 말을 들은 저의 內士典 許氏가 夫黨에게 泣訴하여 말하기를 讐漢의 兄弟가 次第로 酌處되니 復讐할 希望이 없으므로 내가 直接 營門에 가서 呼訴하겠다 하고, 血書로써 泣訴하니 道臣이 크게 驚動하여 마땅히 啓聞하여 復讐하게 할 뜻으로서 曉諭하므로 南原에 滯留하면서 날마다 다시 上奏하기를 바라고 있었더니 辛丑年 3月에 以中이 酌配되므로 許氏는 살아서 집으로 도라가지 아니 하겠다고 盟誓하고, 懷中에 칼을 뽑아 營門에서 自決하려하니 官婢들이 칼을 奪取하고, 寄宿하는 집으로 돌려 보내므로 許氏는 다시 그날 밤 새벽에 食刀로서 自刎하였으나 橫刺되어 多幸히 絶命은 되지 아니하고, 엎어서 歸家하였으나 물 한잔도 마시지 아니하면서 말 하기를 夫讐를 報復하지 못한 것이 恨이라고 하더니 4日만에 드디어 殞命되고, 이 所行을 들은 道臣도 이를 슬퍼하여, 이를 啓聞하여 褒烈과 復讐慰死할 뜻으로서 陽奎의 訴狀에 題下하였으나, 殺人하는 變이 옛날부터 얼마나 많으며, 夫君을 위하여 殉節하는 夫人이 없으리요 마는 하분은 被殺投水되고, 하분는 飮恨決命하였으니 世上에 어찌 저의 內外上典과 같은 事情이 또 있겠으며, 戒中의 三兄弟에 하나는 全釋되고, 둘은 酌配되여 마침내 한 사람의 償命도 얻지 못하였으니 徹天의 寃恨이 어떠 할가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옛날에도 重要한 罪囚에 대하여는 56日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바, 대저 殺獄事件은 一般的인 獄事에 比하 바 아니므로 마땅히 死刑에 處하여야 할 것을 살린다면 死者의 命을 補償할 수 없는 것이요. 마땅히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인다면 어찌 生人의 寃恨을 伸雪하겠는가. 昨年 봄 本獄案을 處理할 때에 再三反覆 參究하여도, 事情이 疑亂하고 主客이 혼유되어 다만 區別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道伯의 結語와 刑官의 處辭가 모두 以中의 傳生을 請하니 有司들은 살려야 한다하고, 自上에서는 죽여야 한다고 하면 어찌 저 같은 事體가 있겠는가. 그중 戒中이 가장 致疑되는 사람이나 이미 決配하였으므로 朝家에서 이를 다시 囚繫하여 成獄한다면, 이는 苛酷한 刑政에 屬하므로 判付中에 以中을 決放하도록 하였더니, 이 上言을 보건대 李陽宅의 妻 許氏의 事實이 참으로 矜惻한 일이로다. 이미 들은 후에 어찌 잘못된 先入之見을 固執하여 償命으로 慰死하는 方法을 생각지 아니 하겠는가 陽宅은 被殺하고, 許氏는 自裁하였으니 비록 兇身 한 사람이 無辜한 두 사람을 殺害한 것이라고 하여도 또한 虛語가 아닐 것이며, 刑曺判書는 本道를 歷任한 바 있으므로 本事를 잘 알것이고, 그때의 審理에도 또한 重臣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다시 文案을 取閱하여 모든 事由를 論理的으로 草記하여 稟處하되 許氏의 事績에 있어서는 本獄事의 如彼如此를 莫論하고, 遐上의 村女가 이같이 犧牲한 貞節은 크게 激感되는 터이니 그 實績의 有無를 곧 當該監司로 하여금 物情을 調査하여 早速 狀聞할 것을 分付하라"라고 하였다. 本曺判書 徐有隣의 回啓에 臣이 昨年 겨울 이 獄案을 審理할 때에 이 獄情의 顚末을 대략 알게 되므로 한 獄事에 세 사람을 正犯으로 하는 것은 獄體에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와같이 列記하여 登聞하고, 以中의 傳生을 仰請한 것이나, 대저 致死人의 口中과 爪甲에 沙泥가 없고, 頭髮과 網巾도 如常함은 實로 毆打殺水한 事實이 明確한 일이나 無寃錄에서는 물이 깊으면 沙泥가 없다는 말과 두복이 붓지 아니 한다는 論이 있으므로 이를 혹 生前投水로 旁證할 수 있기 때문에 引用하여 말한 것이나 또한 敢히 自信이 있었던 일은 아니며, 또 만일 彼逐自溺으로 돌린다면 世江이 首犯이고, 戒中은 그 다음, 以中은 또 그 다음으로 되는 것이며, 만약 毆打投水로 돌린다면 戒中이 首犯이고, 以中은 從犯, 世江은 證人이 되므로 이를 反復하여 以中을 彼此間의 從犯임을 밝히였을 뿐이며, 일즉 戒中과 같이 淸脫로 措處한 것은 아니니 이는 어디까지나 文案上의 起疑와 說難에 따른 것이며, 文案外의 許多한 曲折과 許氏가 來訴한 것은 이미 審理를 끝 마치고, 上奏文書를 封緘한 後에 있었기 때문에 將次 이를 按査하여 彼女로 하여금 餘憾이 없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臣이 還朝하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 하였든 것이며, 대개 當初부터 爭端을 이르킨 者도 戒中이요, 林亭에 같이 가서 몽둥이로 毆打한 者도 戒中이나 世江의 再次 招辭에도 또 丁寧하지 아니한 즉 비록 決配로 인하여 追理하지 못 하였다 할지라도 種種의 疑端이 되는 것은 臣의 跋辭에서 足히 按視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나 또 생각건데 前日에 考察한 것도 이 文案이며, 오늘에 考察한 것도 또한 이 文案인바, 이 文案外의 事情을 詳細히 行査하기도 前에, 莫重한 殺獄을 敢히 屍親의 呼 하는 말만 듣고, 문득 舊議를 飜覆하여 新見을 세울 수 없으므로 判付下에 臆測으로서 對答할 수 없으니 빨리 時任道臣으로 하여금 이 上言의 辭意를 모든 前後의 文案에 比較하여 疑端이 拈出되거든 各人에 盤問하고 道臣이 親히 詳査하여 論理 啓聞한 후에 다시 稟處하게 하고, 許氏의 卓卓한 節義에 있어서는 臣이 本營에 있을 때 目擊한 한 事實이며, 男便의 復讐를 위한 一片丹心에서 처음은 칼로서 自決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結局은 飮食을 全廢하고 自盡하였으니 옛날의 烈婦들도 이에 더할 것이 없으며 南土의 民人들은 盛歎하지 아니 하는 사람이 없고, 順天의 모든 선비들도 呈單한 事實까지 있었은 즉 그 實績을 公議에 付하여 旋褒하여야 할 것이며, 이미 該道監司로 하여금 狀聞하라는 命이 있었으니, 그 狀聞이 到着되기를 기다려 該曹로 하여금 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 하올가 하였다. 傳敎로 允許한다 하고 許氏이 事績은 卿이 이미 그 光景을 目擊하였다고 하니 時任 道伯의 狀聞을 遲待할 것도 없으며, 南土民人들은 稱贊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고, 本府의 章甫(선비)들도 呈單하는 擧事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 一款을서도 輿論의 純然함을 알 수 있고 비록 時伯이 다시 그 實績을 探査한다 할지라도 여기에 더할 것도 없을 터이니 以北以彼에 旋褒一款은 實로 不容易한 擧事에 屬하도다. 대저 遐土의 村女가 반드시 夫讐를 報復하기 위하여 칼로서 그 목을 찌른 것도 不足하여 食飮을 끊고, 盡命하였으니 이러한 貞節은 옛날의 烈婦에 比하여도 부끄러울 바 없는지라 順天 許女는 該曹로 하여금 特히 旋閭하여 朝家에서 風敎를 崇尙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復 兄 讐 [重補] 11年 長興 金點東이 李慶平과 李己平을 毆打하여 卽日에 致死하게 하였다. 致死한 實因로 被打로 되었다. 道啓에 正犯點東은 被死人 得奉의 아우이며, 得奉의 死亡은 하로밤 사이에 있었고, 이의 爭端을 일으킨 者는 廣平이며, 得奉을 척살한 것은 己平이다. 子弟가 父兄을 위하는 마음으로써 讐人이 앞에 있으니 이를 結縛하지 아니할 수 없고, 이미 結縛하였으니 毆打하게 된 것은 必然한 事態인지라, 그 心情을 惟究하지 아니하고, 直接 法만으로서 處斷한다는 것은 審寃하는 道理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得奉의 죽음은 廣平등의 兄弟에 綠由하고, 廣平등의 죽음은 得奉의 弟 點東에 綠由하였으니 가사 點東이 果然 復讐한 것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에 진실로 兩犯人을 한꺼번에 죽일 수 없으므로 首犯인 己平에게는 혹 復讐라고 할 수 있어도, 隨從인 廣平에게도 또한 檀殺을 許한다는 道臣의 原恕論은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嚴刑하여 取扱하게 한다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한번 行檢하여 兩獄을 成立시키니 屍親과 元犯이 서로 主客이 된 것은 實로 前後의 獄案에 처음 보는 일이로다. 그 情犯을 參酌하고, 그 事理를 推究한 즉 己平의 죽음은 得奉의 命을 報償한 것이라 할지라도 廣平의 죽음은 浪死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己平으로써 得奉의 命을 報償하였으니 點東으로써 廣平의 命을 報償한다는 것은 法에 있어서 當然한 일이므로 卿曺의 언의가 法理論에 適切한 줄 알고, 이에 의거 判決하여 一死의 寃情을 伸雪하고저 하였으나 다시 생각근데 弟로써 그 兄의 원수를 報復함에 있어서 바야흐로 警惶하고 憤痛할 즈음에는 비록 讀書하는 士夫라 할지라도 處置의 得當을 責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原初 爭端을 일으킬 때에 廣平도 또한 參涉하였음은 즉 그 弟와 兄을 같이 結縛한 것은 怪異한 일이 아니고, 또 結縛하여 왔어는 德來와 春同이 結黨齊進하였으니 廣平의 兄弟가 모두 반드시 點東의 손에 結縛된 것도 아니므로 이로서 傳生하는 것이 原情論에 害로울 것이 아니니 點東은 加刑하여 定配할지로다"라고 하였다. 本曺判書 鄭昌順의 所啓에 點東이 비록 兄의 원수를 報復한 것이라 할지라도 官府에 告하지 아니하고 檀殺한 것도 輕率하게 傳生을 論할 수 없는 일이거든 하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生命을 殺害하였으니 더욱 復讐로서 말 하기는 不當한 일이라고 하였다. 道에서 다시 行査하여 啓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一條의 疑端을 마침내 釋然히 다할 수 없는 것은 德來등이 助虐한 手勢이며, 그 猛不猛은 點東에 比하여 果然어느 程度인가. 지금 成獄할 때에 例事로 반핵 하여 鐵案을 牢定할 수 없으니 道臣으로 하여금 이로서 意見을 내어 該邑에 論題하고 詳細히 究詰하여 그 報告를 받어 狀聞稟處하게 하라. 戊申年에 다시 行査하여 回啓하였다. 判付內 當初 惟輕에 付한 것은 다만 復讐의 義理에 付하였든 것이며, 常法의 屈不屈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卿이 復讐로서만 處理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復命하는 말을 듣고 仍해 다시 惟究하라는 命令을 하였으나 道의 査啓와 供招를 보근대 대저 助力한 者는 德來등이 였으나 이를 結縛하고, 毆打하고 또 떠밀고, 또 눌누고 獰毒한 手勢를 다하여 點東이 下手하기 前에 이미 生氣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畢境의 結果가 點東에게 있었을 뿐이며, 이를 죽인者는 반드시 點東一人뿐 아니니 獻殺의 律은 비록 친합하지 아니할 것 같으나 檀殺의 罪는 또한 억울하다 할 터이니 疎決할 때를 기다려 酌決하기로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德來등 共犯一款은 敢히 全部를 隱諱하지 못하니 이 獄事의 面目이 前目과는 다른지라 點東을 지금에 왔어, 傳生하는 것도 失刑에는 이르지 아니하니, 點東은 道伯으로 하여금 嚴刑· 減死하여 定配하게 할지로다"라고 하였다. [重補] 13年 平山 金大老味가 金延石을 毆打하여 翌日에 致死하게 하였다. 이 致死한 實因을 初· 覆· 四檢에는 被打로 되어 있고, 三檢에는 被咬로 되어있다. 그의 妻 張召史가 擊錚하는 原情內에 夫의 兄 金草國이 金延石과 水邊에서 싸웠는데 延石에게 떠 밀려 溺死하였으므로 저의 夫가 官에 告한즉 延石이 그 罪를 스스로 알고, 飮藥하여 自死하니 延石의 族屬들이 저의 夫가 打殺한 것으로서 成獄되었다고 하였다. 道啓에 延石의 死亡은 진실로 被打인 줄은 알겠으나 大老味와 加把里가 그 兄이 떠밀려 溺死하였다는 奇別을 듣고, 同憤犯打하였으므로 延石의 死亡이 누구의 손에 被殺되였는지 알 수 없으며, 韓女의 교서와 衆金이 結縛한 事實에 있어서는 모두가 共犯에 不過한 즉 이 獄事의 正犯을 勘定함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正犯을 비로 大老味에게 돌린다 할지라도 그 事實을 밝히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刑曺의 回啓에 草同이 溺死하였으니 나로서는 發明할 말이 없다고 한 것은 이미 延石의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草同의 妻와 弟가 悲憤痛寃하여 이를 結縛· 毆打한 것은 人情上 必然的인 所致로 볼 수 있는 일이며, 加把里가 追後에 犯手하였으나 그 重傷을 볼 수 없고, 모든 金哥들이 같이 가서 助勢하였으므로 隨從을 分揀할 수 없으니 正犯을 大老味에 돌린다 하여도 所據가 없지 아니한 일이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殺獄事件을 심핵하는 方法이 첫째 實因이요. 둘째 正犯이라,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이 두가지에 있으나 이 獄事는 實因이 極히 分明하지 못하고, 正犯을 斷定하지 못하여 再三· 再四 檢驗하고, 行檢하면 할수록 起疑가 많고, 實因을 被打로 하였다가 第3檢에는 「打變而爲咬」로 懸錄하였으니 被咬와 被打에 致死함은 비록 같다 할지라도, 被打이니, 被咬이니 하여 獄情이 이미 眩亂하고, 腦腫이 黑硬함은 必死의 證跡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처음부터 槪觀하지 못하고, 두번 째에 忽然히 露出되였다가 3·4檢 때에는 도리어 없어지므로 行檢할 때 마다 각각 다르고 隱現이 無端하니 果然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있다고 하였으며, 果然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없다고 하는가 이것이 있고 없고를 莫論하고, 元來 一個死體에 없던 것이 무엇 때문에 忽然히 變하여 있게되고, 있든 것이 무엇 때문에 忽然히 變하여 없게 되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起疑되는 위에서 더욱 起疑되는 일이며, 正犯에 있어서도 果然 歸一할는지 모를 일이로다. 대개 延石의 被打는 처음부터 한 사람에게 被打된 것이 아니요, 이는 즉 東打· 西毆로 左倒右 曳한 것이며, 5人이 둘너 섯서 한 사람을 그 가운데에 두고, 同時에 乘憤하여 一齊히 出力하여 규노한 者도 5人이요, 당당한 者도 五人이라 주먹질· 발질등 一團을 混成하였으니 5人中에 누가 먼저 犯行하였는지 알지 못하면서 特히 大老味는 草同의 親弟이므로 하여 宗福의 告發에 들어 있으므로써 이 獄事의 正犯으로 拈出한 것은 이미 十分無疑라고 할 수 없거든 하물며 또 莫男의 前後 招辭에 혹은 參觀하였다 하고, 혹은 이런 事實이 없다하여 물음에 따라 供述하므로 도무지 段落를 지울수 없으니 이러한 亂招로써 明證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나, 모든 事物을 綜合하여 正犯으로 指定하는 것은 자뭇 활 쌀에 따라 標的을 세운것과 같도다. 설사 大老味가 果然 正犯이라고 하드라도 草同이 被死한 것은 이미 被溺된 事實이며, 그 實因이 法文에도 合致하고, 延石이 筒所(法廷)에 自首하였으니 草同을 죽인 者는 延石인지라, 大老味는 兄의 屍體가 水中에 現在함을 目見하고, 讐人이 面前에 나타났을 때 그 憤心이 顧後할 것도 없이 한번 毆打하게 되는 것은 天理와 人情에 있어서 固然한 事實이며, 犯無犯에 이르러서도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므로 本 罪로서는 마땅히 惟輕에 付하여야 하고, 情理로서도 實로 原恕할 수 있는 일이며, 道狀과 曹啓에도 또한 言外의 意見이 없지 아니하니, 此等의 獄事는 常格만을 固守할 것이 아니며, 또 大明律을 按察하건대 「罪人 本犯應死 而檀殺者 杖1百」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旁照의 一端이 되는지라 大老味는 이 律로써 勘放할지로다"라고 하였다. 復 子 女 讐 肅宗 16年 本曺의 啓目에 이 京畿道臣의 啓本을 보근데 京德이 相建을 打殺한 것은 그 子가 이에 被殺됨을 參見하고 痛毒한 心情을 이기지 못하여 登時에 杖殺한 것이며, 官에 告하지 아니하고 檀殺한 것으로써 罪할지라도 이는 無識한 村女의 아는바도 아니며, 律文中에 「有祖父母父母 爲人所殺 而子孫 檀殺行凶人者 杖六十 基卽時殺者母論」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 京德의 罪狀은 律文에는 父母가 子孫의 讐人을 檀殺하여도 母論한다는 文句가 없으나, 子孫이 祖父母에게, 祖父母가 子孫에게 情理로서는 비록 罪因이 없다 할지라도 그 執法者의 處地와 道理에 있어서는 法에 없는 法으로써 敢히 重獄을 輕斷할 수 없으므로 裁可를 바란다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京德이 그 子의 被殺됨을 보고 至情의 所在에서 마침내 相建을 打殺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니 情法으로써 參酌함에 寬典을 施行함이 妥當하니 杖60의 刑을 執行하고 特別 放送할지로다"라고 하였다. 今上14年 安州人 車殷采의 女 末足은 나이가 겨우 14이나, 이웃에 사는 金常佐가 이를 誘引하여 방안으로 들어가 劫奸하려고 하였다. 末足이 큰 소리로 發惡하였든 바, 殷采의 夫妻가 이 소리를 듣고, 急하게 달려가서 常佐를 毆打하여 그 卽席에 致死하게 하였다. 道臣의 啓本에 의하여 本曺判書 李福源이 回啓하여 말하기를, "大明律에 「무릇 妻妾이 다른 사람과 通奸할 때 그 奸所에서 奸夫와 奸婦를 直接 부들어 登時에 殺死한 경우는 勿論한다」하였으나 이는 그 男便이 直接 奸通하는 現場을 捕獲한 경우를 말한 것이며, 金常佐가 14歲의 女兒를 强奸하려 하였음은 진실로 至極히 痛惡한 일이나 女子로서 男子엑게 誘惑되여 그 男子의 집에 까지 갔다는 것은 劫逼과 差異가 있는 일이며, 다만 强奸하려고 한다는 소리는 들어도 이미 行奸한 事實은 發見하지 못하였으니 곧 成奸한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며, 父母의 사이는 비록 至情이라 할지라도, 律文에 夫妻만을 말 하고, 父女를 말 하지 아니한 것은 그 法의 뜻을 可히 알 수 있으므로 執法하는 義로써 論하고, 後日을 念慮하는 道理로써 參酌하면 決코 生議에 傳할 수 없으니 道臣으로 하여금 嚴刑하여 取服하기를 請한다"라고 하였다. 判付에 이르기를, "夫妻 두 사람이 하나의 事件으로서 아울러 首從이 되어 多年間 拷擦하는 것은 天和에 關係되는 일이로다. 無知한 어린 女兒가 다른 사람에게 誘引된 것은 異狀할 일이 아니나 發惡하면서 소리를 쳤다 하니 이 어찌 强逼이 아니겠는가, 大凡 女人은 出嫁하기 前에는 그 父를 따르니 그 父가 主인 것이며, 이미 出嫁한 後에는 그 夫를 따르니 그 夫가 主인지라, 이미 出嫁한 후에 그 夫가 그의 淫所를 捕捉하였을 때의 檀殺을 許諾한다면, 出嫁하기 前에 그 夫가 그 女의 劫奸한 者를 檀殺함에 있어서 홀로 償命한다는 것은 모든 法意를 揆察할 때에 이와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續典을 按察하건대「그 母가 다른 사람으로 더불어 潛奸할 때에 그 子가 奸所에서 奸夫를 刺殺한 경우에는 參酌하여 定配한다」하였으니, 子가 母에게 所施하는 것을 어찌 父母가 女에게 베푸지 못하겠는가, 官에 告하지 아니한 罪로써 論한다면 용혹 可할 터이나 償命의 律로서 處斷한다면 이는 法의 本意가 아닐 터이며, 만약 이를 償命한다면 이로부터 强暴하고, 豪橫한 무리들이 이러한 말을 憑藉하여 未嫁한 處女를 誘引하여 恣意로 劫奸하여도 그 父母된 者 敢히 下手하지 못하고, 이를 坐視하여야 하게되니 이러한 被害가 도리어 檀殺하는 弊害보다 더욱 甚할 터인지라, 이는 官에 告하지 아니하고 檀殺한 律로서 酌決할지로다"라고 하였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