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관지
- 구분특집(저자 :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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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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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902
- 담당 부서
대변인실
◇古法典◇
秋 官 志
第1編
○官制
삼가 鄭道傳의 “朝鮮經國典”을 상고하여 보면, 太祖가 卽位된 처음에 儒臣에게 명령을 내려 歷代의 典章을 講究하게 하고 前朝의 制度를 참고하게 하여 官職의 제도를 定立하였으니, 3公은 6卿을 통솔하고 6卿은 모든 官司를 통솔하여 上級官廳과 下級관청이 서로 연결되고 중앙과 지방이 서로 이어져서 한 王朝의 定한 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朝鮮經國典)이 그 가장 刑政에 관한 것을 論한 것은 “憲典”의 後序에 더할 수 없이 하였다. 그 後序에 말하기를 “憲典”은 6典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나머지 5典의 성립은 이것에 힘입지 않은 것이 없다. “吏典”중의 任免賞罰의 규정도 憲典이 아니면 그 選定을 공정하게 할 수 없으며, “戶典”중의 徵稅규정도 憲典이 아니면 그 방법을 균형하게 할 수 없으며, “禮典”속의 예절에 관한 규정도 憲典이 아니면 그 儀式을 엄숙하게 할 수 없으며 "政典"에 있는 지휘명령의 규정도 憲典이 아니면 그 여러 무리에게 위엄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工典”의 興業 製作의 규정도 憲典이 아니면 그 힘을 살펴 정도에 맞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建國한 벽두에 刑官을 設置한 지대한 의의를 가히 알 수 있다.
刑 曺
正2品衙門
法律·상얼·奴隸의 政事를 관장한다.
삼가 상고하여 보면, 우리 나라의 刑曹는 바로 中國의 刑部이다. 刑官의 名稱은 예전과 지금이 같지 않다. 虞나라에서는 士師라고 하였고, 周나라에서는 司寇(사구)라고 하였고, 漢나라에서는 廷尉라고 하였고, 명나라에서는 刑部라고 하였다. 新羅에서는 議方이라고 하였고, 百濟에서는 佐平, 고려에서는 典法이라고 하였다. 我朝에서는 또한 刑曺로 정하였으니 周나라의 큰 뜻에 좇은 것을 가히 알겠다.
무릇 국가의 治刑 治罪는, 중앙·지방의 송사와 소장은 반드시 먼저 刑曺를 경유하여 그 爰辭(원사)를 받아 가지고 官吏에 관한 것은 義禁府에 移送하고 절도는 포도청에 移送하고 田民에 관한 것은 漢城府에 移送하고 그 밖의 것은 원고·피고 양편의 정상과 증거를 엄중히 조사하기를 기다려서 律官으로 하여금 法을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형벌 받는 것으로 백사람이 두려워 할 줄 알게 되면 이 백성으로 하여금 날로 선량한데로 옮겨가고 죄를 멀리하게 하여 거의 형벌로서 형벌 없는 政治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중대하도다.
沿革
太祖元년에 典書 2員, 議郞 2員, 正郞 2員, 佐郞 2員, 主事 2員을 두었고, 太祖 3년에는 典書 1員을 감원하였고 뒤에 개정하여 判書 1員, 參判 1員, 參議 1員, 正郞 4員, 佐郞 4員을 두었으며 뒤에 正郞·佐郞 각각 1員을 감원하였다. 英宗 25년에 正郞 1員을 武官으로 任命하게 하였고 32년에는 佐郞 1員은 文官으로 任命하게 하였다.
判書 1員(正2品), 參判 1員(從2品), 參議 1員(正3品),
正郞 3員(正5品 1員은 武官), 佐郞 3員(正6品 1員은 文官)
삼가 살펴보건대 착한 임금이 어렵게 생각하고 조심하는 것은 刑官의 人選인 것이다.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살펴서 政治가 공평하고 송사가 다스려지면 백성은 안심할 수 있지만 법의 적용을 농간하여 형벌을 남용하고 위세를 난폭하게 행사하면 곧 백성은 발을 움츠려 訟庭에는 풀이 나게 하고 관청에는 채찍(鞭∼매)을 매달게 하는 것도 오직 刑官에 달려있고 3년동안이나 한재가 나고 5月에 서리가 날게하는 것도 또한 刑官에 달려있다. 皐陶(고요)의 治刑이 밝고 마땅하였던 것은 진실로 숭상할 일이다. 원통한 백성을 없게 하였다는 刑獄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며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包龍圖를 어디에서 얻어 올 것인가 진실로 진실로 刑官을 簡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職務分掌
四 司
삼가 살펴 보건대 한 曺는 4司로 나누고, 4司는 9房으로 나누고 그리하여 9房은 百司와 8道를 관할하는 것은 나무에 가지가 있고 가지에 잎이 있는 것과 같다. 管領하는 것이 비록 넓고 관할하는 데가 비록 멀지라도 한 曺에 統屬되지 않는 것은 없다. 삼가 너의 官職을 지키되 너의 직권의 한계를 넘지 말 것이며 그 三典을 받들고 그 五敎를 돕는다면 거의 職責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詳覆司
詳覆大酸의 일을 맡는다. 大典에는 檢詳이 詳覆正郞을 겸임하게 되어 있다. 刑獄을 重視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뒤에는 폐하여 실행하지아니하였다. 지금도 刑曺에 아직 檢詳廳이 있다.
考律司
律令 按覆의 일을 맡는다.
掌禁司
刑獄 禁令의 일을 맡는다.
掌隸司
奴隸 囚의 簿籍을 맡는다.
9 房
삼가 살펴 보건대 4司에 각각 2房이 있고 刑房을 합쳐서 9房이 된다. 모든 官司의 문서 왕복과 8道의 狀啓 牒報와 罪人을 論斷하여 임금에게 奏上하는 일을 맡아 句管한다. 그리고 中央官司중 愼妃의 祠宇는 바로 端敬王后의 廟앞에 있는 祀宇이며 敬寧殿은 仁聖王后의 魂殿(혼전)이며, 孝昭殿은 仁元王后의 魂殿이다. 그 밖에 司畜署는 도로 戶曺에 붙이고 掌隸院(장례원)은 도로 刑曺에 붙이고 忠翊府(충익부)는 도로 忠勳府에 붙이고 歸厚署는 도로 繕工禁火司에 붙여서 巡廳으로 고친 것과 太平館 別造廳 接待所는 모두 폐지함과 아울러 정리 修正하여 기록하지 아니한다. 英宗때 追封한 陸·園·墓所와 創設한 濬川司(준천사)와 奎章閣·擒文院에 관한 것은 모두 刑房에서 擧行하고 왕복 文書는 모두 刑房의 아래에 添附하여 記錄한다.
詳1房
地方의 詳覆事務를 맡는다.
正郞1員 감원한다. 2房의 佐郞이 겸임한다
管轄
議政府 中樞府 司饔院(사옹원) 司僕寺 繕工監 中學 北部 南部 顯陵 禧陵 孝陵 咸鏡道
詳2房
中央의 詳覆事務를 맡는다. 佐郞 1員
管轄
宗親府 都摠府(도총부) 藝文館 宗簿寺 典醫監 惠民署 義盈庫 南學 扈衛廳(호위청) 實錄廳 國葬都監 穆陵 康陵 崇陵 開城府 江華府 京畿道
考1房
律令에 관한 사무를 맡는다. 正郞 1員
管轄
戶曹 忠勳府 敦寧府 耆老所(기로소) 內醫院 宣惠廳 常平倉 大同廳 守禦廳 奉常寺 사도사(사도사) 禮賓寺 造紙署 宣陵 靖陵(정릉) 江原道
考2房
考1房과 같은 事務를 맡는다.
佐郞1員 減員한다. 1房正郞이 겸임한다.
管轄
備邊司 侍講院 讀書堂 校書館 平市署 司幸監 中部 內農圃 掖庭署(액정서) 南別殿 山陵都監 獻陵 章陵 長陵 順懷墓 昭顯墓 忠淸道
禁1房
刑獄과 禁令에 事務를 맡는다. 正郞 1員
管轄
工曺 儀賓府 司憲府 摠戎廳(총융청) 尙衣院 典設司 內資寺 活人署 掌苑署 氷庫 漏局署 東部 西學 長生殿 廷接都監 健元陵 貞陵 泰陵 慶尙道
禁2房
禁1房과 같은 事務를 맡는다. 佐郞1員
管轄
兵曺 承政院 禁衛營 左·右捕廳 左·右巡廳 衛將所 講書院 軍器寺 內贍寺(내섬시) 長興庫 典牲署 社稷署 宗廟署 西部 齊陵 厚陵 英陵 平安道
隸1房
地方의 奴婢에 관한 事務를 맡는다. 正郞1員
管轄
禮曺 義禁府 訓練都監 御營廳 司諫院 掌樂院 通禮院 司譯院 觀象監 軍資監 廣興倉 司圃署 昌陵 敬陵 全羅道
隸2房
中央의 奴婢에 관한 事務를 맡는다. 佐郞 1員
管轄
史曺 漢城府 弘文館 成均館 承文院 濟用監 瓦署 內需司 禮葬都監 儺禮廳(나례청) 光陵 順陵 恭陵 翼陵 黃海道
刑房
禁亂, 罪囚에 관한 事務를 맡는다.
曺司佐郞이 겸임한다.
管轄
尙瑞院 典獄署 奎章閣 擒文院(이문원) 濬川司(준천사) 嘉禮都監 東學 冊禮都監(책례도감) 殯殿都監(빈전도감) 부례도감(부례도감) 莊陵 思陵 溫陵 徽陵(휘릉) 寧陵 明陵 懿陵(이릉) 惠陵 弘陵 元陵 永陵 順康園 昭寧園 顯陵園(현륭원) 綏吉園(수길원) 仁淑墓 愍懷墓(민회묘) 懿昭墓(이소묘) 孝昌墓
掌務所
曺內의 金錢 布木에 관한 事務를 맡는다.
郞官 1員이 輪番으로 겸임한다.
錄事 2員
品. 議政府로부터 파견한다.
本曺의 堂上官의 坐稟에 관한 일을 한다,
月令 1員
品. 兩醫司로부터 파견한다.
감옥의 죄수를 救療하고 傷處를 보살펴서 手本을 作成·제출하는 임무를 맡는다.
○所屬官司
律學廳
法令에 관한 事務를 管掌한다.
敎授 1員(縱6品), 別提2員(品上同), 明律 1員(縱7品), 審律 1員(縱8品), 訓導 1員(正9品), 檢律 2員(縱9品)
律官의 分差
義禁府(本曺敎授兼任), 承政院(本院에서 啓下한다), 兵曺·司憲府·奎章閣·開城府·江華府·8道의 檢律(各 1員, 春秋로 取才하여 配定파견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세상의 士大夫들은 詩·書는 말하기를 좋아하되 律令의 읽기를 부끄러워하여 모든 刑書와 法文은 다락 높은 곳에 묶어서 치워버린다. 儒生들에게 보이는 大比料와 蔭官이 6品으로 승진하는 과거에 비록 經國大典을 講하는 과목이 있긴 하나 급한 경우에 가서 구차하게 책임을 미봉하여 실질은 없고 形式만 꾸미는 일에 그치는데 가깝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刑官이 되면 訴訟을 判決하고 죄수를 論罪하는데 있어서 무슨罪가 무슨 律에 해당한지를 알지 못하여 一切의 높이고 낮추는 것을 律官에게 맡기게 되니 律官이 故意로 죄를 경하게 하고자 하면 경한 律을 말하고 故意로 죄를 重하게 하고자 하면 重한 律을 말하여 솜씨껏 제 의사대로 法을 농간하게 되고 刑官은 다만 벼슬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어찌 國家가 律令을 重視하는 本意이겠는가.
典獄署
삼가 살펴 보건대, 獄이라고 하는 것은 周나라의 園士라는 것이다. 近世에서는 죄수가 한번 감옥에 들어 가기만 하면 죄의 무겁고 가벼운 것을 물론하고 대개 많은 침해를 당하게 된다. 獄卒들이 枷鎖(가쇄)를 벗겨준 수고비를 내라고 독촉하고 묵은 죄수는 새로 오는 죄수에게 감옥의 문지방을 넘어온 돈을 내라고 강요한다. 하루의 고통이 10년을 지나는 것 같다. 여름밤이면 여러 죄수들이 서로 겹쳐서 팔을 서로 交叉하고 뒤섞여서 더운 기운이 서로 전념하여 병이 나기 쉽고 겨울에는 음침한 방에 눈이 날아들어 오고 짚자리가 어름 같아서 구을며 울부짖으며 죽기를 바라도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정말 죄가 있는 자라도 오히려 불상하다고 하겠는데 만약 죄없이 걸려들었다면 그 어찌 측은하고 놀랄만 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착한 임금이 죄수를 염려하고 刑獄을 신중히 하는 일을 5日 내지 10日에 한번씩 살펴보기에 이르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아, 我朝에서는 建國의 初期부터 한 달에 세번(죄수의 상황을)啓奏하는 규정이 있는 것은 罪人을 오래 감옥에 가두어 두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聖上께서는 그것도 오히려 지체된다고 근심하시어 특히 5日에 한번씩 보고하라고 명령하시고 가벼운 죄인은 모두 석방하게 하시니 비록 夏禹氏가 죄인을 불상히 여겨 울었다는 德政도 이보다 더 나을리 없을 것이다.
沿革
太祖元년에 令 2員, 丞 2員을 두었다가 太宗 14년에 令을 丞으로, 丞을 副丞으로 改正하였고 뒤에 改正하여 提調 1員(刑房承旨가 例兼한다), 主簿 1員, 奉事 1員, 參奉 1員으로 정하였고 肅宗 29년에는 奉事를 감원하고 參奉을 增員하여 2員으로 하였다. (每年 春秋에 貶坐(폄좌)하되 刑房承旨가 刑曺의 參議와 더불어 같이 처리 결정한다)
提調 1員(刑房承旨가 例兼한다), 主簿 1員(縱6品), 參奉 2員(縱9品).
掌隸院
奴隸의 簿籍에 관한 事務를 管掌한다.
沿革
太祖元년에 刑曺都官을 두었으니 知事 1員, 議郞 2員, 正郞 2員, 佐郞 2員, 主事 2員이 있었다. 世宗13年에 掌隸院이라고 고치고 判決事 1員, 司議 2員, 司評 4員을 두었으며 中宗11年에는 兼判決事 1員을 더 두었다가 15年에 감원하고 뒤에 또 司議와 司評을 각각 1員씩 감원하였고 英宗 40年에는 本院을 페하고 도로 本曺의 掌隸司에 所屬시켰다.
保民司
삼가 살펴보건대 先大王의 백성을 보호하는 恩德은 지극하다. 일찌기 백성을 보호하는 마음으로 힘써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를 실행하였다. 특히 均役廳을 설치하여 永久히 兵役의무있는 良民에게 稅金으로 每年 布木 2필씩 받던 것을 덜어 주니 8道의 백성들이 보호해 주는 혜택에 고무되지 아니하는 者가 없었으나 임금의 마음은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度支의 돈을 支出하고 西關의 稅米를 發給하고 또 保民司를 설치하여 영구히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의 吏隸의 봉급을 정하고 京都의 백성들에게 不法 侵奪하지 못하게 하였다. 甲申년 이후로는 가깝게는 國都에서부터 멀리는 먼 시골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각각 자기의 처자를 보호하고 고장을 보전할 수 있게 되어 즐거워함이 마치 마른나무에 휘추리가 난 것 같았다. 아 거룩하다. “保民”이라는 두 글자가 孟子에 보였는데 1,500년 뒤에 비로소 우리 임금의 시대에 실행하게 되었으니 만약 孟子가 안다면 반드시 자기의 說이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다, 지금은 비록 폐지되어 本曺에 還屬되었으나 그 구분 획정한 돈과 곡식과 나누어주는 봉급이 前例에 의하여 사용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保民司는 없더라도 保民하는 實績은 있으니 이 保民司의 있고 없음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 司의 條目은 經用篇에 기재되어 있다, 까닭은 그 沿革의 起源과 상세를 기록하여 오랜 후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先大王의 保民하는 지극한 뜻을 알게 하려 한다.
沿革
英宗 40년 甲申년에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의 吏隸들은 급료가 없고 오로지 禁贖으로 支用하고 있으니 不法한 侵害나 不法强徵하는 폐단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특히 保民司를 掌隸院의 옛 청사에 설치하고 提調 2員은 刑曺와 漢城府의 두 首度堂上官이 例兼하고 郞官 2員은 刑曺·漢城府의 두 郞官이 겸임하고 刑曺와 漢城府의 書吏 각각 한사람과 使令 각 한명이 윤번으로 일을 보았으며, 庫直 1名과 守直하는 上直軍士 2名은 舊 掌隸院의 雇軍으로 移定하고, 오로지 贖錢을 管理하여 두 관사의 吏隸들의 급료에 대비하게 하였고 다음해 乙酉년에는 두 관사가 그 贖錢으로 正式의 需用으로 定하였다가 다시 保民司를 폐지하고 刑曺에 還屬시키었다.
左·右捕廳
盜賊을 잡고 밤에 순경도는 일을 맡는다.
삼가 살펴보건대, 朝鮮經國典에 盜賊篇은 憲典안에 屬하여 있다. 대개 捕廳이 刑曺에 屬한 것은 建國初期부터의 制度이다. 經國大典의 武職에 捕廳이 記載되어 있지 않다, 經國大典은 成宗때 이루어진 것인데 捕廳을 設置하지 않았으니 어느 해에 捕廳이 설치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本曺의 膽錄에 堂上官과 郞官이 公事로 인하여 捕廳의 從事官을 부르는 發牌의 規定이 있고 貶坐때 捕盜部將이 楹外에서 절하는 규정이 있으니 捕廳이 刑曺의 所屬官司인 것을 알 수 있다.
左·右巡廳
밤의 巡察을 맡는다.
삼가 살펴보건대, 經國大典에 刑曺正郞이 禁火司의 別坐를 겸임한다고 하였는데 禁火司는 뒤에 巡廳으로 고쳐졌다. 그러므로 巡廳은 刑曺의 所屬官司로 된 것이다. 그리고 褒貶(포폄)을 처리하는 규정은 없다.
○吏隸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吏(아전)라고 하는 것은 예전의 胥吏(史)이다.
漢나라의 法에는 經書하나 이상에 통달하면 吏에 補任될 수 있고 그 사람들이 卿相이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고, 唐나라의 法은 비록 漢나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試才하여 이에 補任하고 簿記, 文書를 밝게 익혀 會通하기를 기약하였다. 前朝에서는 吏를 補任하는데 두 길이 있었다. 三都監, 三軍의 錄事와 都評議使司의 知印·宣差는 모두 士人으로 하였고 연리·典吏·令吏·司吏의 등속도 또한 良家의 자제들도 충당하였으나 시험을 보여 補任하는 규정이 없고 그 자신의 志願을 聽許하였었다. 건국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吏曺에 命하여 才藝를 시험하는 法規를 정하였으니 그 門閥(문벌)을 참고하고 그 律文의 知識을 시험하여 비로소 吏가 되는 것을 許可하고 勤務日數가 2,600日이 되면 승진하여 驛丞·渡丞이 되게 하였다. 세상에서 吏를 丞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中葉 이후부터는 驛丞·渡丞에 任用하는 규정은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으니 吏는 승진 출세 할 길이 없게 되고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 심하여 져서 上官을 속이고 下民을 侵奪하여 날로 조그마한 利益만을 營爲하고 있으니 또한 가히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 수 있다.
書吏 49人
堂上部吏 各 1人, 早·晩仕各 1人, 執吏 9人, 禮房 2人, 兵房 1人, 工房 1人, 京奴色 2人, 外奴色 2人, 上下色 1人, 禁亂色 1人, 承發 1人, 書寫 3人, 政院待令 1人, 禁吏 5人, 隨從 14인.
使令 46名
堂上帶率(당상대솔) 각각 3명, 郞廳帶率 각각 2명, 牌頭(패두) 9명, 政院待令 1명, 留司 15명.
삼가 살펴 보건대, 經國大典에 吏의 定員數는 49人인데 중간에 數를 增加하여 書吏는 72人에 이르고 使令은 定數가 없었다. 先大王 甲申年에 經國大典의 규정에 의하여 定員數를 整理·修正하고 달마다 布를 주었다.
丘從 14명
堂上官의 丘從(구종) 8명, 郞官의 구종 6명.
奴 33명
首奴 2명, 庫直 1명, 直房直 1명(首奴가 例兼한다), 房直 2명, 大廳直 2명, 文書直 1명, 禁府 5명, 隨從 20명.
婢 91명
首婢 1명, 茶婢 1명, 月令廳 1명, 錄事廳 1명, 議政府 1명, 備邊司 5명, 中樞府 5명, 隨從 65명.
律廳
房直 3명.
典獄署
書吏 4인, 鎖匠 5명, 軍士 10명.
○館舍
刑曺의 廳舍는 西部 積善坊 景福宮 光化門의 오른편에 있다. 北은 兵曺, 南은 工曺, 東은 큰길, 西는 律學廳과 司譯院이다. 門밖에는 폐지된 우물이 있고 청사 뒤에는 연당(蓮塘)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太祖 3년에 漢陽에 首都를 정하고 처음으로 景福宮을 營造하니 왼쪽에는 宗廟를 짓고 오른편에는 社稷壇을 세우고 앞에는 議政府와 六曺를 벌려 놓았다. 謗木橋는 西쪽에 있고 惠政橋는 東쪽에 있었다. 대개 建國初에 首都를 定한 큰 規模를 알 수 있다. 刑曺의 廳舍는 반드시 그 때에 創建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400年 동안에 여러번 兵火를 겪어서 營造한 해와 重修한 날짜의 文獻이 傳하지 못하였으니 참고하고 依據할 길이 없다. 아직 듣고 본 바에 좇아 肅宗때의 癸巳年부터 시작하여 기록한다고 하였다.
堂上官의 廳舍 14間(四面으로 退柱(퇴주)하고 左·右편에 작은 房이 있다)
行閣 2間(英宗임금 丁亥年 2月에 중수), 茶廚(다주) 1間, 兒房 4間(肅宗 癸巳年에 청사 북쪽에 창건하였다. 겨울의 開坐때 사용한다. 西面으로 退柱하고 左·右에 작은 방이 있다), 行閣 3間, 창고 2間, 부엌 1間(英宗임금 丁亥年에 重修廳의 뒤쪽에 있다), 마루의 西쪽 벽 위에는 英宗의 御筆·御製인 五言律 두 首를 가운데에 봉안하였고 英宗의 글씨 여덟字를 오른쪽에 봉안하였으니 모두 칠 올린 木板에 金字로 하였으며 고운 붉은 빛으로 선을 두르고 문채있는 비단으로 싸 놓았다.
御筆 御製의 律詩에는 말하기를,
“예전부터 사람과 나라를 禍되게 하는 일이 黨比보다 더 혹심한 것은 없다, 東人이니 西人이니 하고 표방하더니 老論이니 少論이니 하고 번지어 자꾸 옆으로 터져 간다. 公道는 때로 잃어져 버리고 사삿된 마음은 날로 걸리어 붙는다. 모름지기 殷鑑이 가까움을 알고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된 힘을 다 하라, 否德한 내가 임금이 되어 이제 스물 아홉 해가 된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자주 호구의 길을 잃었다. 나라 일은 오직 가시밭길일 뿐인데 천재는 또한 날로 심하구나. 경사라고 칭찬하는 말을 끌어 내지 말라. 다만 밤낮으로 두려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從古禍人國 莫如黨比酷 東西裳標榜 老少專橫析 公道時論喪 私心日係着 須知殷鑑邇 終始竭忠力 不德承丕基 于今卄九稔 歲連痒稼穡 民屢奪 國事維其棘 天災日又甚 休提稱慶說 但自夙宵 )
왼쪽의 御筆은 “크게 공평하게 하라 근신하게 하라 힘써 법문(法文)을 지키라”(大公欽訃勉守法文)고 하였고,
오른쪽의 御筆은“크게 공평하고 크게 바르게 하여 삼가 法文을 지키라”(大公至正謹守法文)이라고 하였다.
重補 마루서쪽 벽 위에는 남쪽에 가깝게 현판(懸板)을 달아 英宗의 甲申年 10月에 내린 傳敎를 새겨 놓았다.(자세한 것은 “經用”에 보라).
서쪽 벽 위에는 북쪽에 가깝게 현판을 걸고 지금 임금 丁酉年 6月의 傳敎를 새겨 놓았다.(자세한 것은 “律令”에 보라).
북쪽 벽 위에는 서쪽에 가깝게 현판을 걸고 지금 임금 戊戌年 11月의 綸音(윤음)을 새겻다(자세한 것은 “啓覆”에 보라).
북쪽 벽 위에는 서쪽에 가깝게 현판을 걸고 지금 임금 己亥年 3月의 傳敎를 새겻다(자세한 것은“倫常”에 보라).
남쪽 벽 위에는 동쪽에 가깝게 현판을 걸고 지금 임금 甲辰年 3月의 傳敎를 새겻다(자세한 것은 “檢驗”에 보라).
남쪽 벽 위에는 서쪽에 가깝게 현판을 걸고 備邊司의 啓目과 그에 대한 判付를 새겻다(자세한 것은 “續條”에 보라).
中間의 북쪽갓 들보 위에 현판을 달고 戊申年 7月의 傳敎를 새겼다(자세한 것은 “甲章”에 보라).
중간 남쪽 갓 들보 위에는 현판을 달고 戊申年 11月의 傳敎를 새겼다(자세한 것은 “續條”에 보라).
섬돌 아래 왼쪽에는 嘉石(가석)(아래는 깎았고 위는 넓다. 길이는 3尺 8寸 넓이는 2尺이다. 즉 周禮의 罷民을 다스리는 表石인 것이다)오른 쪽에는 肺石(폐석)이 있다. (아래는 둥글고 뾰족하다. 깅이는 5尺 4寸이다. 네 面에 여덟모가 졌다. 즉 周體의 窮民을 暢達하는 表石인 것이다).
郞官들이 쓰는 청사 6間(4面에 退柱하였다).
左·右쪽 방 4間, 宿直室 3間半(앞에 퇴가 있다).
茶廚 1間
마루의 서쪽 벽 위에는 한가운데 國忌板을 걸어두고, 왼쪽에는 “廳憲”을 걸어두고, 오른쪽에는 “做度式”을 걸어 놓았으니 모두 黑板에 흰 글씨로 쓰고 고운 붉은 빛으로 가를 선둘러 놓았다(“廳憲”“做度式”은 “雜儀”에 보라).
서쪽 곁채에는 掌務의 창고 1間, 奴婢色의 창고 2간, 馬廐(마구) 4間, 부엌 1間, 大門 1間, 옆문 1間.
남쪽 곁채에는 누상고(樓上庫) 8間(8房의 永久 보존문서를 保管하여 두고 官封한다), 누하고(樓下庫) 8間 (8房이 처리한 문서를 保管한다). 續案倉庫7間(지금 임금의 己亥년에 신축하였다).
동쪽의 곁채에는 續案倉庫 3間. 刑房 창고 2間.
書吏長房 2間, 마루 24間, 書寫廳 4間, 詳覆房 2間(啓覆文書를 保管한다).
堂上官이 쓰는 3門 3間, 郞官이 쓰는 中門 1間, 옆문 3間(하나는 하인들의 出入門이요, 둘은 죄인들의 出入門이다), 大門 1間“刑曺 衙門”이라고 간판을 써 붙였다).
朝房
朝房은 北部 鎭長坊 昌德宮의 金虎門 밖에 있다. 東쪽과 남쪽은 큰길, 서쪽은 예조 숙직실, 북쪽은 사도사이다(英宗임금 庚戌년에 신축하였다).
當上官이 쓰는 대청 3間(앞에 퇴가 있다).
上房 2間, 茶廚 1間.
郞官이 쓰는 대청 3間, 房 2間, 茶廚 1間.
律學廳의 마루 1間, 房 1間, 東門 1間
書吏廳의 마루 3間, 房 2間.
大門 1間, 馬廐(마구) 1間, 변소 1間(청사 뒤쪽에 있다), 북쪽의 옆문 1間(罪人이 出入하는 문).
律學廳
律學廳은 刑曺본청사의 서쪽에 있으니 동은 刑曺館舍, 남쪽은 작은 길, 서쪽과 북쪽은 司譯院이다.
마루 4間(앞에 퇴가 있다), 房3間, 中門1間, 左·右에 빈 행랑 2間, 大門 1間.
典獄署
典獄署는 中部 瑞麟坊에 있다. 동쪽·서쪽·남쪽은 民家이고 北쪽은 길이다.
마루 3間, 房 1間.
書吏長房 2間, 마루 1間, 使令廳 3間, 숙직실 1間, 軍士숙직실1間, 男子의 감옥 동쪽에 3間 서쪽에 3間 北쪽에 3間이요, 女子감옥 남쪽에 2間, 西쪽에 3間, 獄門 1間, 大門 2間, 옆문 1間, 홍살문 1間(동네 입구에 있다. 썩거나 상하면 戶曺에서 수리한다).
○經用
삼가 살펴 보건대 刑曺에는 본래 財源이 없고 다만 奴婢貢木 35同 15필이 있을 뿐이였는데 肅宗 丁酉년 이후부터 노비가 점점 흩어져 도망쳐서 歲入은 날로 줄어들어서 모든 경비의 지출을 견디어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官長의 月俸과 吏隸의 月給이 모두 禁贖에서 나오게 되니 죄인의 정상을 論定하고 律을 상고하는데 있어서 비록 贖錢을 받아야 할 것과 贖錢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 있드라도 하나 같이 모두 贖錢을 받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매양 소송하는 백성이 訟庭에 들어오면 下隸들은 먼저 牌債(패채)를 토색하고 曺의 아전들은 또 情錢을 요구한다. 외롭고 잔약한 백성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죄를 결정하고 法을 참조함에 이르러 官청에서는 다시 贖錢을 내라고 독촉하니, 이 어찌 어진 군자의 정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자가 재물로써 죄를 면하는 것도 이미 法의 본의가 아니거니와 빈궁한 백성이 옷을 잡히고 솥을 팔고 행길에 울부짖는 일은 더욱 어찌 착한 임금이 죄수를 신중히 다루고 불상히 여기는 뜻에 마땅할 수 있겠는가. 외람되게 생각하여 보면, 우리 先大王께서 특히 백성을 보호하는 뜻을 진렴하여 保民司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여 贖錢을 함부로 받는 것을 엄금하고 억지로 받는 것을 엄중히 고치니 백만 생민들이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가히 天命을 빌어 국가의 명맥이 오래가게 할 수 있음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保民司는 지금은 비록 本曺에 還屬되었으나 保民을 위하여 구분 획정된 錢穀과 酌定된 禁止條項은 다 길이 後世의 規準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삼가 保民司의 節目과 개정한 때의 前後의 敎書를 刑曺와 漢城府의 節目위에 기록하여 뒷날 참고하고 의거할 자료로 한다.
保民司의 節目
지금 이 두 衙門의 官用경비와 給料를 區分 劃定하라는 명령은 본시 백성을 구휼하고 폐단을 矯正하려는 큰 뜻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나라의 財源이 결핍한 것을 보니 국가의 經常費에는 손댈 수 없다. 그러므로 戶曺의 應辦色(응판색)으로 하여금 매년 官帽代 몫으로 된 銀 5,000량을 현금 12500냥으로 만들어 移管하게 하여 官衙에 당연히 써야 할 비용과 吏隸의 月給의 財源으로 하였다. 두 衙門(刑曺, 漢城府)의 書吏의 給料는 甲胄 다섯벌 값으로 쌀을 特賜한다는 命令이 있으니 그 수량이 356石 5斗가 된다. 이것을 賑恤廳(진휼청)에 移管케 한 뒤에 給料로 大米(白米) 296石과 小米(좁쌀) 148石(白米 356石 5斗는 차례 차례로 代錢으로 바꾼다)을 진휼청으로부터 出納하고, 官用經費와 給料를 이미 국가로부터 따로 區別하여 策定하였으니 員役의 定員數는 전과 같이 함부로 많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一切 經國大典의 옛 制度에 의거하여 簡少한 것에 좇아 참작 결정한다. 刑曺에는 書吏를 堂上官의 陪吏(배리)외에 46人으로, 使令은 堂上官과 郞官의 대솔사령(帶率使令)외에 44명으로 한다.
두 衙門이 위반자를 禁制하는데 있어서 刑曺의 杖罪·流配罪에 관하여 移牒해 온 것과 漢城府의 亂廛(난전) 금지에 대하여 모두 贖錢을 받는 규정이 있다. 그 중에서 당연히 流配하여야 할 것과 당연히 杖罪에 처하여야 할 것은 본래부터 즉석에서 杖罪에 처하거나 流配시켜야 마땅하지만 만약 그 犯罪가 비교적 가벼워서 情理가 가긍한 자에게는 犯人의 소원에 좇아 贖錢받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贖錢을 만약, 法을 다스리는 관청이 刑杖을 사용하는 마당에서 증수하도록 한다면 허다한 농간의 폐단을 禁斷시킬 수 없을 것이다. 保民司를 設置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保民司는 2品衙門으로 정하고 두 官衙의 首度堂上官이 提調가 되어 專管하게 하고 두 官衙의 郞官 각 1員을 정밀히 선택하여서 파견하도록 한다. 國家에서 획정하여준 金錢·米穀과 각종 收入되는 돈은 그 出納을 檢査하여 每月 초하루에 받아들이게 하고 支拂會計는 一切 他官衙의 例에 의하여 하고 두 郞官이 이름을 列記하고 着署하며 두 堂上官도 또한 이름을 列記하고 着押하여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처리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 그리고 禮曹에 있는 官印 한개를 가져다 使用한다.
保民司에서 贖錢을 收納하여 支拂할 때는 두 郞官이 윤번으로 勤務하고 刑曺의 庫直이 머물러 있으면 守直하고 두 官衙의 書吏 각 1人과 使令 1명이 윤번으로 守直하고 軍士 2名은 옛 掌隸院의 雇立軍을 옮겨 보낸다. 그리고 두 官衙의 堂上官과 郞官이 保民司를 겸임하고 있으니 곧 바로 同一官衙인 것이다. 모든 文書와 簿冊을 서로 대조 검사하여 하인의 무리들이 농간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
贖錢을 保民司에서 收納할 경우에는 律文을 對照한 뒤에 곧 通信을 作成하여 該司에 移送하면 該司의 郞官은 收納한 뒤에 곧 收納報告書를 만들어 두 堂上官에게 올려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納入할 者가 納入을 拒否하면 刑曺에 돌려보내서 그 태만한 죄를 징계하게 한다. 刑曺에서 만약 한표의 贖錢이라도 받거나 保民司가 만약 백성에게 한대의 매질이라도 한다면 곧 堂上官은 견책하여 파면시키고 郞官은 귀양보내는 律을 적용한다.
法司의 出禁은 이미 規定된 限度가 있는 것인데 점차로 조금씩 물러서서 한 禁亂牌로써 여러 곳을 침노하게 되고 이 禁亂牌로써 다른 禁亂에 대신 나타나기에 이르렀으며 契房(곗방)을 만든 자는 함부로 犯禁하고도 제 스스로 가만히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며, 세력이 있는 자는 違法하기를 꺼려함이 없어도 故意로 放置하여 생색을 내게되어, 결국 被害者는 오직 赤貧한 窮民에게만 돌아가게 된다. 슬프다, 저 員役의 무리들이 이미 實料가 있은 뒤에도 어찌 감히 다시 예전의 버릇을 되풀이 할 것인가, 만약 혹시나마 전과 같이 하여 改悛하지 아니한다면 當該官衙의 堂上官이나 郞官은(책임상) 들어난 罪過에 따라 무겁게 다스리고, 犯法한 下吏는 엄중하게 매를 쳐서 멀리 귀양 보낸다.
亂廛(난전)을 禁하는 일은 없을 수 없는 것이나 그런 각 상가의 백성이 혹은 아래위의 江 부근에 나가거나 혹은 다른 고을에 왕래하는 것을 中路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물품을 가진 것을 만나면 본전인(本廛人)이라고 일컫고 위협과 공갈로 虛勢를 부려 반드시 헐값으로 억지로 사고자 하여 드디어 모개로 실어다 놓고는 비록 조그만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과 和賣하지 못하게 하고 심한 것은 피해자인 상인이 길거리에서 울부짖기에 이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비록 捕廳의 염탐군이라도 또한 감히 함부로 서울이외의 지방에 가지 못하는 것인데 이 무리들은 어찌 감히 서울과 시골에 出沒하면서 恣意로 폐단을 일으켜 中央과 地方의 小民으로 하여금 賣買·運送의 길이 끊어져 곤난을 받는 일이 날로 심하게 만든단 말인가, 이 뒤로는 이러한 폐해는 각별히 엄금한다. 만약 違犯하는 자가 있으면 각 해당 道의 觀察使는 일체 筵席(연석)에서 내린 敎命에 좇아 드러난 罪狀에 따라 嚴하게 杖刑을 料하고 특히 중죄로 다스리게 한다.
漢城府에서는 이전부터 하던대로 당연히 出禁하여야 할 아홉가지 전방(9廛)이외에 어물전(魚物廛), 신전(鞋廛), 四床廛(사상전), 眞絲廛(진사전), 옷전(衣廛), 鉢里廛(발리전), 隅廛(우전), 內貰器廛(내세기전)의 8전은 다만 本廛人이 잡아서 告發하는 것을 허락하여 治罰하게 하고 그 밖의 다른 각 전에 대한 방금 폐단을 개혁하여 정리하는 때를 당하여 본전인이 잡아 바치는 것을 또한 허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平市署가 본전인의고소를 기다려 사실의 진상을 엄중히 조사하여 보아 진정 많은 물화를 쌓아 놓고 몰래 서로 賣買하여 폐해를 끼치는 일이 매우 심한 자이면 漢城府에 移送하여 懲治하도록 한다.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진실과 허위를 서로 속여서 미약한 백성이 피해 받는 일이 있으면 該官衙의 堂上官과 郞官은 드러나는 죄과에 따라 엄중히 다스릴 것이요, 吏隸는 “反坐本律”(반좌본률)의 규정을 적용할 것이다. 대체로 보아 각가지의 禁制에 대하여 한달에 여섯번 出禁하는 것은 본래 국가의 典法인 것이다. 法律을 다스리는 官衙의 官員이 만약 엄하게 단속하지 아니한다면 禁制하는 吏隸가 中間에서 농간할 것은 뻔한 事勢이니 특별히 엄금하여 폐단의 근원을 숙청한다.
保民司 創設時의 傳敎
英宗 40년 10월 27일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며칠을 두고 생각하고 연구한 政事는 곧 백성을 보호하려고 하는 뜻이다 孟子가 말씀하기를 백성을 보호하여 王노릇하면 막을 이가 없다고 하였고 明나라의 太祖 高皇帝가 恭愍王(공민왕)을 타일러 말하기를 왕이 만약 백성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王子가 날 것입니다고 하였다. 지금부터 講究하여야 할 정사는 백성의 보호를 생각하는 일을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슬프다, 한 사람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것도 오히려 엄금하는 것인데 하물며 당당한 큰 국가의 法을 다스리는 官衙일까 吏隸들의 禁亂에 협잡하는 일 때문에 내 마음은 항상 놀라고 있다.
亂廛은 서울 백성의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니 禁하지 아니하면 市民이 견디어 날 수가 없고 만약(禁制하는데 있어서)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면 小民들이 또한 견디어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어제 漢城主簿 李復永의 아뢰는 말을 들으니 난전에 贖錢을 받는 일은 비록 5·6月이라도 오히려 등이 싸늘하여 진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고요히 생각하니 漢나라의 글에 이르기를 “百金은 中産層의 한 집 財産”이라고 하였다. 그가 과연 眞犯이라면 비록 百金의 贖錢을 받아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등이 싸늘하여 진다는 말로써 推測하여 보면 그 억지로 받는 것이 10分의 5·6은 되는 것이다. 漢城府가 이러하니 刑曺의 하는 일도 가히 알 수 있고 서울이 이러하니 地方의 하는 일도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이 폐단을 구제할 길을 생각해 보니, 吏隸들의 給料가 고루 裕足한 뒤라야 어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節約하여서 濫用과 雜費를 除去하는 것도 또한 서울 백성을 생각하고 보호하는데 한 도움이 될 것이다. 備邊司로 하여금 타이르고 경계하여 贖錢을 받아서는 안될 것을 贖錢을 받고 禁制하여서 안될 것을 함부로 禁制하는 자는 나타난 情狀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슬프다, 한낱 郞官도 오히려 등이 싸늘하여지는데 하물며 임금이겠는가. 이 傳敎를 듣고 銘心하여 스스로 힘쓰지 아니한다면 어찌 재상(宰相)이 되어 國家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폐단을 구제하는 일이 없이 만약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80을 바라보는 나이로 年末이 가까운 때 6日동안이나 講究한 本意이겠는가. 슬프다, 비록 官職이 있는 士大夫라도 數十貫의 돈은 갑짜기 마련하기 어려울 것인데 아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小民이 비록 數十文의 돈인들 어찌 능히 이것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律官이 刑律에 의거하여 官의 命令이 嚴重하게 贖錢을 독촉하고 사나운 아전이 문 앞에 이르게 되면 본래의 贖錢은 비록 1貫이지만 몇 배로 늘어나는지 알 수 없다. 금방 죽게되어 애걸하여도 듣고도 못들은 체 하니 길거리를 헤매며 여기저기로 빌려보고 구걸하여 보건만 만약 范純仁이 가난한 친구에게 麥丹을 주던 마음이 없으면 그 구걸하는 것을 보고 누가 돌봐 돕기를 좋아하겠는가. 슬프다, 이러한 일들이 있는 즈음에 어찌 人和의 분위기를 손상함이 없겠는가, 한 여자가 원통한 것을 부르짖어도 오히려 5月에 서리가 온다고 하는데 하물며 일만 백성이 울부짖어 호소할 곳이 없는 것이겠는가.
슬프다, 이러한 폐단은 내가 潛邸(잠저)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으나 감히 구제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아아 옛날 周處는 한 말을 듣고 세 가지 폐해를 除去하였다는데 지금의 吏隸는 몇 백명이 서울백성을 착취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이 吏隸의 무리들도 또한 백성이다. 그 어찌 즐겨 이런 일을 할 것인가. 孟子가 말한 항심(恒心)없는 백성인 것이다. 슬프다 노쇠한 나이에 다시 政事를 맡아 80을 바라보는 나이로서 스스로 힘쓰려는 때에 서울의 일만 백성으로 하여금 제집에 편안히 定住할 수 있게 하고 漢城府와 刑曺의 吏隸가 恒心있는 백성이 되게 한다면 이것은 일거양득(一擧兩得)인 것과 저 軍民의 貢布를 감액하여 준 일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사이가 동떨어짐보다도 더 한 것이다. 내가 일찌기 先正의 東湖問答에서 들었다. 이 命令이 만약 내린다면 한갖 서울안 뿐만이 아니라 거의 시골 백성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漢城府와 刑曺가 給料를 定하여 잘못된 弊習을 없애버리는 등의 일은 備邊司로 하여금 商議하여 확정하게 하라.
슬프다, 어제 한번 그 아뢰는 말을 듣고도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 늙고 쇠약해진 임금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데 아아 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예전부터 큰길가에 집을 지으면(여러 사람의 여러 의견 때문에 집을 세우지 못한다는) 비웃는 말이 있다. 오늘부터 大臣과 오늘 명령이 내리는 備邊司의 堂上官은 備邊司에 留宿하면서 이일에 대한 條目을 講究하여 나의 백성을 위한 뜻을 버리지 말라.(堂上官의 대청 위에 현판을 새겨 걸었다)
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1年에 使用하기로 되어 있는 갑옷과 투구 8벌중에서 5벌값은 특히 형조와 한성부에 떼내어 주어서 나의 老年에 서울 백성을 보호하고 절약과 검소를 힘쓰는 뜻을 보여 줄 지로다.
保民司를 창설한 뒤에 내린 傳敎
같은 해에 傳敎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保民司를 설치한 것은 대개 나의 老境에 백성을 위한 苦心에서 한 것이다. 漢城府와 刑曺는 비록 이같이 한다고 하여도 司憲府의 吏隸들이 서울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고 贖錢을 받는데 節制 없음이 漢城府나 刑曺보다 더 심하다 하니 司憲府를 비록 保民司로 하여금 操縱하게 할 수는 없으나 이름을 保民司라고 해놓고(이러한 일을)단속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 폐단은 除去하고 한 폐단은 存置하는 것이 된다. 이후로는 司憲府가 律文에 비춰서 贖錢을 받는 것은 月末에 保民司를 經由하여 報告하게 할 것이며 만약 律官이 조종하고 吏隸가 폐해를 끼치는 일이 있거던 그 律官과 吏隸를 草記하여 엄중히 다스릴 것을 保民司의 節目중에 添加하고 친히 筵敎를 받아 보살펴 거행하게 할지로다.
地方에서 贖錢을 받는 일이 범람하고 난잡함이 서울과 다름이 없다고 하니 먼 시골의 빈궁한 백성이 호소할 곳이 없고 부지하여 갈 수가 없으니 진실로 가엾은 일인데, 죄가 있어서 法律에 비춰 본 뒤 贖錢을 받아서는 안될 것을 억지로 贖錢을 料하여 징수하는 것은 이 또한 어찌 王化를 宣揚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모든 律에 비춰서 귀양보낼 자는 본래부터 上奏 啓聞하여야 할 것이나 贖錢을 받은 자에 이르러서는 罪名과 情理上 贖錢바치기를 許可한 事由를 列記하여 每 3개월에 책을 만들어 保民司에 移送하고 保民司에서는 當該 堂上官이 자세히 살펴보아 만약 贖錢을 받는 것이 不當한 것이 있으면 그 道를 論責하게 하고 地方이 만일 빼버리고 報告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어떠한 罪科로 돌려야 할 것인지 이것으로써 엄중히 단속하라.
두 官衙 (刑曺와 漢城府)의 訴訟書類의 作紙와 刑曺의 補充隊奴婢文書의 作紙, 漢城府의 家屋·田畓文書의 作紙, 戶籍을 作成할 때 처지는 雜物의 등속이 때로 혹 있으나 본래 수효가 적어서 보잘것없는 것이니(그것은) 각각 당해官司에 주어 公用建物의 修理 및 도배와 墻垣등 不時의 需用에 對備하게 하라.
두 官衙의 堂上官이 笞刑이나 杖刑을 判決한 것을 郞官이 혹시라도 함부로 그 매치는 回數를 감해 주고 사사로이 贖錢을 받는 일이 있다면 事體가 한심할 뿐 아니라 이러한 폐단도 또한 의지할 곳 없는 小民이 더욱 지탱하여 保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법을 세운 뒤에 다시 예전 버릇을 따라 어떤 때는 여러 해가 지나간 경미한 犯罪를 들춰내어 심문하고 또는 널리 同類를 끌어들이게 하고 羅卒을 시켜 贖錢을 徵收한다면 백성에 대한 폐해는 더욱 퍼지고 불을 것이다. 이번 制度를 정한 뒤에 이러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一切 씻어 버리도록 하라. 만일 違犯하는 자가 있으면 곧 당해 官員은 귀양보내고 下吏는 엄하게 杖刑을 加한 위에 멀리 귀양보내고 단속하지 아니한 堂上官도 또한 論罪하라.
두 官衙의 負役의 무리들이 지금부터 實料를 주게된 뒤에 訟事를 審理하여 推問하고 체포할 때에 題辭例債(제사례채)니, 牌子債(패자채)니, 情債(정채)니 하면서 교묘한 명목을 만들어 가지고 함부로 侵奪하는 폐단을 부리는 자는 엄중하게 禁斷하고 그러고도 다시 예전의 버릇을 그냥 가지는 자가 있으면 단속하지 아니한 官員은 특히 嚴重하게 다스리고 犯行을 저질은 吏隸는 엄하게 매를 쳐서 멀리 귀양 보내라. 三司 所屬이 各官司의 吏隸들과 더불어 契房을 만들어 가지고 法을 속여서 모면하는 자도 또한 엄금하여야 하니 만일 이러한 犯人이 있으면 어느 쪽을 물론하고 모두 함께 엄중하게 매를 쳐서 멀리 귀양 보내라.
刑曹·漢城府
英宗 41년 4월 6일 刑曺判書 鄭弘 이 奏達하기를,
지금 刑曹와 漢城府 두 官衙의 員役의 給料는 議政府로부터 別途로 區分·劃定하여 바야흐로 節目을 만들어 啓下하였으니 保民司의 이름은 비록 없어 졌으나 保民司의 實益은 진실로 전과 같은 것입니다. 保民司 設置時의 傳敎가 節目에 실려 있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聖意가 數十줄 敎書 가운데 간절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다만 서울의 백성들을 위하여 莫大한 은혜와 덕택일 뿐 아니라 진실로 法을 맡은 官司가 遵守하여야 할 良法인 것입니다. 지금 새 절목을 啓下하는 때를 당하여 受敎의 뜻을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으며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에 특히 현판을 만들어 걸어 길이 遵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上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同年 4월 19日에 領議政 申晩이 啓奏하기를,
刑曺와 漢城府의 員役의 給料는 前日의 定奪(裁決)에 의거하여 그 剩餘物資의 구획을 마련하여 그중 利子로 生하는 銀 2萬兩은 戶曹에 보내고 그 대신 關西地方의 稅穀인 小米 2萬石을 청해 얻어서 每年 全經費에 使用하게 함은 可히 永久히 遵守 實行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所謂 耗條經費라는 것은 年末이 되어야 받아 쓸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生計를 세워가는데 좋은 방책이 없읍니다. 當初에 保民司를 폐지할 때 月課米를 宣惠廳에 還屬시킨 것을 아직 그대로 留置해 두게 하여 每月의 給料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上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今上 5年에 宣惠廳의 堂上官 鄭民始가 啓奏하기를,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의 員役의 給料를 마련하는데 贖錢 2千兩을 받아 들여 補充 使用하라는 뜻을 자세히 말씀하시고 節目을 作成하였으나 贖錢이 있고 없음은 宣惠廳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强力한 命令으로 納入을 독촉할 수 없읍니다. 臣의 의사로서는 각 道의 贖錢 徵收는 이미 檢律의 所管事務이고 檢律은 바로 刑曺의 所屬이니 刑曺에서 管掌하여 督勵·단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이 뒤로는 各道의 贖錢은 該曺에서 收納하여 支給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그대로 允許하였다.
重補 6年에 宣惠廳에서 啓奏하기를,
各道의 贖錢은 當初에 作租하는 법을 폐지하였는데 그대로 올려 보내도록 한다면 당초의 創意한 것과 다름이 있고, 또 폐지하면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가 많은 장애가 있으니 전대로 시행하고 贖錢은 두 官衙에 分配하여 받아쓰게 하옵소서.
그대로 允許하였다.
刑曺에서 啓奏하기를,
刑曺와 漢城府의 吏隸의 給料는 이미 예전 慣習대로 擧行하게 되어 오로지 各道의 贖錢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行會한지 8년이 되어도 全然 올려 보내지 아니한 道가 있으며 비록 간혹 올려 보내는 것이 있어도 또한 매우 零星합니다. 이 뒤로는 반드시 季節의 끝달에 等別로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그대로 允許하였다.
備邊司節目
두 官衙의 員役의 給料를 마련하는 米·錢의 수량을 區分 劃定하여 左에 기록한다. 前年에 사둔 關西의 還穀인 小米 2萬石과 今年의 幅利銀을 戶曹에 還屬하고, 대신 關西의 還穀인 小米 2萬石을 每年 減耗條로 合計 4千石을 除하고 그 道監營에서 돈 1萬2千兩으로 바꾸어 年末에 이르러 均役廳에 納入하게 한다. 平壤에서부터 실어 보내는 馬賃은 戶曹의 詳定例에 의거하여 元數中에서 計算하여 減하고, 均役廳의 給代錢 7百9兩은 全例대로 마련하고 漢城府 戶作錢은 每年 3分의 1인 336兩도 前例대로 마련한다.
地方의 贖錢은 穀物로 바꾸지 말고 돈으로서 上納하되 嶺南·湖南·關西는 각각 4百량, 海西·湖西는 각각 250량, 京畿·關北·關東은 각각 1百량씩 合計 2千량을 4季月에 나누어 上納하여 不足한 數에 補充 使用한다.
刑曺와 漢城府의 書吏 合計 90人의 給料는 甲胄의 代米로써 賑恤廳에서 筵稟하여 前例대로 아직 支拂한다.
以上 各處로부터 오는 돈 1萬5千45량은 經用의 規例에 의하여 기한이 되어 賑恤廳에 실어다 바치고 賑恤廳에서는 甲申년에 정한 節目에 의거하여 每月末에 支給한다. 두 官衙가 푸주에서 받는 贖錢은 甲申年 정리할 때 이미 한데 합쳐서 한 몫으로 마련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것에 의거하여 施行하고 각종 贖錢은 두 官衙에 分配한다.
備邊司의 定例
刑曺와 漢城府 두 官衙의 1年간의 應捧(經常歲入)
關西의 小米 4千石, 每石價錢 3兩씩 作錢하면 合 1萬2千량 中에서 平壤에서부터의 價 540량을 減하면 實지 收入 11,460兩
漢城府의 式年 戶 作紙錢 3分의 1 336兩
均役廳의 給代錢 709兩
8道의 贖錢 2千兩
懸房의 餘錢 103兩02錢
合計錢 14,608兩 02錢
甲胄 5部價米 356石5斗升 賑恤廳 (白米 296石 小米 148石)
均役廳錢 두 官司 1年 分配
錢이 1萬3千百74兩8錢이고, 米가 4百32石. 當然히 收入하여야 할 數量에 비하여 餘錢이 1千4百33兩錢이고, 餘米가 42石이다. 그런데 錢 4百20兩2錢과 米 12石은 즉 3年에 한번씩 있는 閏달의 所用으로서 18년을 축적하면 閏달 여섯번 것을 준비하게 되고도 또 閏달 한번의 使用分이 된다. 그 나머지 1千13兩2錢은 그대로 賑恤廳에 留置하여 두고 어쩌다가 懸房贖錢의 收入이 減하게 되는 경우와 緊急한 公用의 必要가 생겼을 때 適當히 찾아 쓴다.
懸房錢의 두 官司의 1年分配
돈이 3千2백24兩4錢이 되어 받는 돈에 비교하면 남는 돈이 1百3兩2錢이다, 이것은 곧 保民司의 庫直의 月給과 땔나무 기름 종이등의 支出을 두 官衙에서 每月 計算하여 差減하고 6月과 12月에 賑恤廳에 移送하여 經常支出에 補充하게 한다. 그리고 윤달에 들은 것도 또한 輸送한다.
刑曺의 贖錢의 두 官署 1年分配
分配의 數量은 甲申년에 整理修正할 때 이미 定한 方式이 있고 그 뒤에도 또한 실정을 참작하여 융통성 있게 처리한 것이 많으니 반드시 다시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이것에 의하여 施行한다. 다만 錄事 2員은 전에는 각각 6량씩 주던 것을 整理修正時에 감액하여 5량씩 주기로 하였으나 錄事라는 職은 본래 매우 淸寒하여 職務에 이바지하기가 어려움이 있는 까닭에 부득이 議政府에 議하여 每月 刑曺에서 贖錢으로 각각 1兩씩 더 준다.
朔 (삭름)(廣興倉으로부터 每月 나누어준다)
判書 (正2品) 米 2石 6斗 黃豆 1石 5斗
參判 (從2品) 米 1石11斗 黃豆 1石 5斗
參議 (正3品) 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正郞 (正5品) 米 1石 1斗 黃豆 10斗
佐郞 (正6品) 米 1石 1斗 黃豆 10斗
律官·敎授·別提(正6品) 米 1石 1斗 黃豆 10斗
明律 (從7品) 米 13斗 黃豆 6斗
審律 (從8品) 米 12斗 黃豆 5斗
訓導 (正9品) 米 10斗 黃豆 5斗
檢律 (從9品) 米 10斗 黃豆 5斗
典獄主簿 (從6品) 米 1石1斗 黃豆 10斗
參奉 (從9品) 米 10斗 黃豆 5斗
月俸(刑曺의 掌務所로부터 每月 돈으로 나누어준다)
判書 丘價(구가) 7兩 巨燭價 2兩
參判 丘價 7兩 炬燭價 2兩
參議 丘價 7兩 炬燭價 2兩
正郞 丘價 5兩 炬燭價 2兩
佐郞 丘價 5兩 炬燭價 2兩
律官 丘價 4兩 錄事 丘價 5兩
月令 丘價 4兩
吏隸의 布(늠포)
書吏 1人 白米 4斗 좁쌀 2斗 錢 4兩
書寫 1人 錢 4兩5錢
使令·丘從·庫直·房直·皮 直·軍士·律廳의 房直 모두 合하여 4兩
京首奴·外首奴·首婢·權差使令 모두 合하여 錢 3兩. 男茶奴錢 2兩.
堂上官의 陪下人 錢 5兩
郞官의 陪下人 錢3兩
典獄署 吏隸의 布
書吏 4人 每月 米 1石 5斗 小米 5斗(나누어 먹는다)
布 5疋(나누어 쓴다)
使令 5명 每月 米 1石. 좁쌀 3斗(나누어 먹는다)
布 5疋(나누어 쓴다)
軍士 10명 每名 每月 布 1疋, 錢 2兩
均役廳錢 1月分配
三堂上 丘價 7兩씩 21兩
六郞官 丘價 5兩씩 30兩
律官 8員 4兩씩 32兩
錄事 2員 5兩씩 10兩
月令 1員 4兩
書吏 49人 4兩씩 196兩
米6斗씩 (大米 4斗, 小米 2斗)
書寫 2人 4兩5錢씩 9兩
使令 34명 4兩씩 136兩
三堂上 帶率使令 9명 4兩8錢씩 43兩 2錢
丘從 8명 4兩씩 32兩
六郞官帶率使令 12명 4兩씩 48兩
丘從 6명 4兩씩 24兩
庫直 1명 4兩
軍士 2명 4兩씩 8兩
房直 2명 4兩씩 8兩
皮 直 1명 4兩
啓目紙價 9兩(6月과 12月에는 褒貶(포폄)啓本紙가 있으므로 각각 2兩5錢을 더하고 10個月은 각각 5錢씩 減한다)
合計錢 618兩2錢
米19石9斗(大米 13石 1斗, 小米 6石 8斗)
懸房錢 1月分配
三堂上 月 炬燭價 2兩씩 6兩
六郞官 月 炬燭代 2兩씩 12兩
三堂上의 陪下人등 5兩씩 15兩
六郞官의 陪下人등 3兩씩 18兩
三堂上官의 朝報價 4兩씩 12兩
疏箚價 2兩씩 6兩
分撥軍 3名 4兩씩 12兩
六郞官의 朝報價 4兩
朝報軍 1名 4兩
司諫院의 輪回債 8兩
曺의 用紙代 6兩(曺內의 各種 日用으로 分配한다, 6月과 12月은 都目政事에 쓰는 用紙代가 있기 때문에 2兩5錢씩 더하고 다른 個月은 각각 5錢씩 減한다)
九房의 文書用紙代 1兩9錢
堂上官 1員의 말먹이代 1兩2錢
入直하는 郞官의 말먹이代 3兩
燈油代 1兩
五郞官의 卯仕酉罷의 勤務 때의 말먹이代 6兩
堂上官과 郞官의 벼루·붓·먹값 2兩7錢
曺內의 日用 薪炭代 9兩(自 10月 至 正月 加兩, 自 4月 至 7月 減兩)
書吏의 宿直房 땔나무·燈油代 2兩
律官廳의 땔나무·燈油代 1兩6錢
茶母등이 있는 곳의 땔나무·燈油代 8兩
合計 錢 146兩5錢
曺贖錢의 1月分配
堂上官과 郞官 依幕의초, 薪炭代 6兩
(自 10月 至 正月 加 1兩, 自 4月 至 7月 減 1兩)
望炬(망홰)·龍脂價 9兩(2兩2錢은 首奴에게 油價로 支給하고 9錢은 牌頭에게 乾龍脂값으로 支給하고, 5兩9錢은 庫直에게 炬火代로 支給한다)
曺內의 日用하는 用紙代 4兩5錢
日用하는 印章과 膠末代 1兩
三堂上의 別陪丘從 5名 各 3兩씩 15兩
典獄署의 必要經費 10兩
錄事 2員 각 1兩씩 2兩 加給
禮房書吏 2人 錢 4兩씩 8兩(定員外의 增員)
色掌書吏 1人 錢 5兩
上下色書吏 用紙代 1兩
政院待令書吏 1人 錢5兩
書寫 3人 筆墨代 8錢
堂郞朝報書吏 4人 錢1兩씩 4兩
庫直 1명 1兩 9錢(이후 關贖의 支出은 柴炭價에 補充 使用한다).
京奴婢의 首奴 1名 錢 3兩
地方奴婢의 首奴 1名 錢 3兩
首婢 1名 錢 3兩
茶米價六錢
男茶母 2名 錢2兩씩 4兩
權差使令 8名 3兩씩 24兩
律廳의 房直 3名 錢4兩씩 12兩
曺上官案色 用紙代 2錢
合錢 123兩
1年錢穀分配合計額
均役廳 돈 7千418兩4錢
白米 156石5斗
小米 78石6斗
懸房 돈 1千758兩
曺 贖錢 1千476兩
隨時分配
堂上官·郞官이 새로 除授된 때 官帽代 2兩.
律官 8員의 官帽代 2兩씩 16兩(每年 1回 6月에 支給한다)
書吏의 頭巾代 각 3錢씩(每年 年末에 支給한다)
牌頭·使令의 鵲衣代 각 1兩씩(每年 年末에 支給한다)
議政府의 隔月 古風債 4兩9錢
舍人司의 古風債 4兩
分兒曆書價 56兩3錢1分(免賤作錢으로 支給한다)
大小科의 試驗場에서 試驗紙 分給(堂上官에게는 두벌, 郞官에게는 한벌, 堂上官이나 郞官의 아들, 사위, 아우, 侄이 만약 大科나 小科에 合格하면 合格한 사람의 數에 따라 覆試때에 전례에 따라 시험지를 나누어준다).
文官인 郞官에게는 朔書紙와 筆墨價(隨時 支給한다)
文官인 郞官이 春秋館의 官職을 兼任한 때는 日記를 修正할 때 쓰는 用紙代 4錢(1年에 두번 支給한다)
堂上官 3員의 上疏用紙代 每장에 3錢
書寫에게 겨울 3個月 柴炭代 1兩
獄鎖匠(옥쇄장)에게 겨울 지나는 墓代 2兩
下賜가 있은 때의 行下(행하)로 司 (사약)에게 6錢, 別監에게 4錢, 밤에 坐起할 때 炬燭·龍脂代(隨時 마련한다)
啓覆할 때, 每번 정서용지 2卷 10장씩. 12件 合 30卷(原文의 30件은 30卷의 誤記인듯)(每卷 對價 2錢씩 會6兩)과 筆墨價 3兩, 燈油價 1兩과 炭價 1兩疏決 할 때의 文書用紙·筆墨代(隨時 마련한다)
國境을 넘어 타국에 들어간 罪人에 대한 文書修整 할 때 各種用紙代(隨時 마련한다)
6月과 12月의 都目政事 때, 9房의 用紙代 1兩5錢을 더한다.
9房의 삯군삯 3兩 6錢
監試의 初試와 增廣試의 初試 施行을 告示할 때 9房의 삯군삯 3兩6錢.
易書(역서)하는 書吏 每 1人1日에 糧米價 3錢씩 日數로 計算하여 마련한다(饌價는 1兩)
增廣試·庭試·別試大小科 初試 때 榜目用紙代(隨時로 마련한다)
地方에 있는 堂上官을 陪從해 온 帶率下人 1名(旅費 每月 2錢 道路의 里數를 계산한 往復과 滯留糧穀을 隨時 마련한다)
堂上官·郞官의 推考 贖錢(隨時 마련한다)
郞官이 어쩌다가 本曺의 일로 就理하게된 때의 茵席(인석)·空石의 代金 4錢(禁推하여 照律하게 되면 贖錢을 隨時 마련한다)
堂上官이 休暇를 얻어서 갈 때 下人의 旅費로 가까운 곳이면 3兩, 중간정도의 길이면 4兩5錢, 먼길이면 6兩을 준다.
郞官이 休暇를 얻어서 갈 때 下人의 旅費로 (堂上官의 경우의)半額을 준다.
堂上官이 陵의 祭官이 된 때는 飮食物의 供饋와 馬의 삯·下人의 旅費로 合 7兩을 支出한다(英陵의 祭官으로 갈 때는 3兩을 加給한다).
郞官의 陵의 祭官이 된 때는(堂上官의 경우에 비해) 3分의 1을 감한다.
陵의 거둥에 隨駕하는 堂上官·郞官에게 支供熟設의 費用으로 每 한때에 1兩을 支給한다.
堂上官의 帶率한 丘從 7名, 郞官의 帶率한 下人 4名의 飮食物 供饋는 每한 때에 7分씩(7錢 7分)
饌首奴(찬수노) 馬 1匹 삯 每日 1兩
軍幕 싣고 가는 말 4필 삯 每日 每匹 1兩 짐꾼 삯 每日 每名 3錢 옷 箱子 싣고 가는 말 各 1필 삯 멀면 4兩 가까우면 2兩
陪行하는 執吏書吏 2人, 工·禮房 各 1人.
律官 1員의 말 삯 每日 1兩
郞官의 天翼(철릭)을 後染하는 代價 1兩 書停所의 堂上官·郞官의 帳幕2件 삯 3兩·揮帳·坐板·屛風(우비등을 每件에 삯 1錢)
留都하는 堂上官·郞官이 祗迎(지영)할 때
장막·雨備等의 삯(以上은 本曺에 있는 것 이외에 不足한 것을 세낸다)
서울안의 거둥 때 나아가 참여하는 여러 堂上官의 帶率과 陪從下人등의 요기하는 값 1兩
郞官의 帶率과 陪從下人등의 요기하는 값 5錢.
現職에 있는 堂上官의 初喪에는 賻儀를 보낸다.
正木 5필 代金 10兩
四兩重초 3雙 代金 9錢
龍胎40柄 代金 2兩 8錢
중정도의 홰 2同 代金 8錢
現職에 있는 郞官의 초상에 보내는 賻儀
正木 3필 代金 6兩
四兩重초 2雙 代金 6錢
龍脂 30柄 代金 2兩1錢
中홰 2同 代金 8錢
現職 書吏·書寫의 埋葬費 錢 3兩
牌頭·使令·色丘·庫直·首奴·茶母등의 埋葬費 錢 2兩(以上 隨時 支給한다)
鋪陳(포진)
말굽무늬 방석 3닢 每닢價 5錢
흰 무늬 방석 6닢 每닢 값 3錢씩 ( 木·안찝 값 합하여 4錢을 더 마련한다).
방에 깔 地衣 9件 每件價 1兩씩(선두를 무명과 工錢을 합하여 8錢을 더 마련한다)
登每(등매) 9件, 每件代金 1兩씩(선두를 무명감도 다 넣어서).
案息(안식) 9部, 每部 價 3錢
狗皮방석 6닢, 每닢價 2兩씩. 以上은 2年에 한번 더 改備한다.
大廳에 깔 地衣 2件 每件價 선두를 감갖춰 5兩5錢씩 3年에 한번씩 改備한다.
豹皮(표피)방석 1닢 價 8兩(선감 모두 넣어)
虎皮방석 2닢 價 각각 7兩씩(선감 모두 넣어)
山羊皮 방석 1닢 價5兩(선감 모두 넣어서).
重記
屯之山(둔지산)에 밭 3日耕 陳田 81負 6束 舊陳
豆毛浦田 21負 1束 陳荒
高陽 田畓 모두 55負 2石 4斗 5升지기 利川田畓 20斗 5升지기, 稅錢 4兩
忠州 豆衣面 落字沓 2負 6束 舊陳
沓 4負 1束 舊陳
沓 4負 8束. 壬辰年起耕
忠州 李世英의 屬公田畓 모두 96負 9束內
田 77負 2束
沓 19負 7束 稅價 4필
中央·地方의 官奴婢로부터 內戌年에 收貢한 무명 35同 15필
京·外奴婢 己亥年 改案
中央의 奴婢名簿에 付記된 것 奴 25명 婢 43명, 京畿道 奴 43명 婢 58명중에 실지로 奴婢 貢木을 바치는 자 44名. 忠淸道 奴 68명 婢 72명중에 實貢 63명, 黃海道 奴 17명 婢 43명중 實貢 27명, 江原道 奴 52명 婢 69명중 實貢 50명, 慶尙道 奴 81명 婢 122명중 實貢 155명, 全羅道 奴 43명 婢 51명중 實貢 63명, 平安道 奴 43명 婢 75명중 實貢 113명, 咸鏡道 奴 43명 婢 42명內 實貢 74명, 中央·地方의 官奴婢로부터 己亥年에 收貢한 무명 13同 16필.
○律令
삼가 살펴보면, 律令이라는 것은 法律家의 三尺인 것이다. 죄가 크면 칼과 톱(刀鋸)이요. 작으면 채찍과 매로 각각 그 죄에 따라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한다.(이러한 法을)王府가 간직하며 公事의 衙門에 달아 두어 우매한 사나이와 賤한 하인들로 하여금 무슨 죄는 무슨 律에 해당 하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하여 감히 범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착한 임금의 형벌로써 형벌을 그치게 하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고요(皐陶)가 獄을 만들 때는 兵과 刑이 合一하였더니 周나라가 “周官”에 나오는 官職의 制度를 세우매 나누어 두 官職으로 하였고 成王과 康王의 때에는 囹圄(영어)가 텅 비었더니 穆王의 “呂刑”에는 死罪가 3千이나 되었다. 세상의 차례가 내려올쑤록 刑律은 더욱 번거로와 졌음을 알겠다. 크게 생각하면 我朝에서는 三王때보다는 낫고 五帝 때와는 같은, 金·玉같이 귀중한 법규가 찬란하게 밝게 갖추어 졌다. 지금으로부터 國家開創의 初期에 遡及한다면 거의 4百年이 되는데 “欽恤”이라는 두 글짜의 뜻은 歷代의 임금이 서로 전하여 오다가 英祖임금의 時代에 이르러서는 英祖가 王位에 계시던 52年 동안을 죄수를 5日마다 염려하고 열흘마다 慰撫하였으며, 특히 조정의 신하에게 명하여 經國大典·典錄通考등 여러 法律書를 산삭증보(刪削增補)하여 “續大典”을 編纂하여 完成하니 “全家徙邊律”등 모두 62條를 改定하였다. 義禁府의 壓膝(압슬)하는 刑律과 捕盜廳의 杖足하는 刑律, 그 밖의 烙刑(낙형)하는 律, 刺字(자자)하는 律 朱杖으로 亂打하여 拷問하는 律을 차례로 刪除(산제)하여, 8道에 頒布하고 먼 後世에 전하였다. 세상은 비록 내려 왔으나 刑律은 더욱 간단하여 졌다(刑을 다스리는데) 밝고 신중하게 하는 德과 죄수를 가엾게 여기는 뜻이 나라안에 넘치었다. 그리고 또 우리의 지금 임금께서는 先王의 뜻을 받아 이어, 왕위에 오른 처음에 中央과 地方의 刑杖이 그 規定을 어긴 것이 많다고 하여 “欽恤典則”을 定하시니 苔와 杖의 길고 짜름과 枷와 杻의 두껍고 얇음이 각각 일정한 법이 있게 되었다. 그러고도 오히려 글로 쓰는 것만으로는 뜻을 다 알릴 수 없을 두려워하여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안으로 中央의 여러 官司에서부터, 밖으로 8道에 이르기까지 감히 이것을 넘거나 지나치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억만년 이렇게 태평함이 실은 여기에 기초한 것이다. 어찌 갸륵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저 혼자 느끼는 것이 있다. 刑曺의 뜰 앞에 왼쪽에는 “嘉石”이 있고 오른쪽에는 “肺石”이 있다. 즉 周體의 罷民을 다스리고 窮民을 暢達하는 表石인 것이다. 南峴에는 諫鼓(간고)를 걸어놓고 西橋에는 謗木(방목)을 설치하여, 지금도 백성들이 서로 전하여 鍾峴이니 謗木橋니한다. 建國初에 三代의 큰 뜻을 모방하였음을 可히 알 수 있다. 만약 그 當時로 하여금 三代의 禮樂을 憲章으로 하고 三代의 文物을 윤색(潤色)하게 함으로써 한 王朝의 制度를 이루었다면 三代와 같은 어진 정치를 거의 다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깝게도 모든 신하들이 임금의 은덕있는 뜻을 받들지 못하여 禮는 開元것을 쓰고 刑律은 大明律을 쓰며 田賦와 軍民의 制度는 新羅·高麗의 것을 參考하여 썼기 때문에 마침내 “三代가 아니면 다 구차한 것”이라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뜻 있는 선비의 한탄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刑律의 書籍
大明律
明나라 太祖 洪武 30年에 만든 것. 大明律에는 律의 條目이 모두 일곱가지 있다. 各例律(47條), 吏律(職制15條, 公式18條), 戶律(戶役15條, 田宅11條, 課程19條, 錢債3條, 婚姻18條, 倉庫24條, 市廛5條), 禮律(祭祀6條, 儀制20條), 兵律(宮衛19條, 關津7條, 廐牧11條, 軍政20條, 郵驛18條), 刑律(盜賊28條, 人命20條, 鬪毆22條, 罵8條, 訴訟12條, 詐僞12條, 犯姦10條, 受臟11條, 雜犯11條, 捕亡8條, 斷獄29條), 工律(營造9條, 河防4條), 總460條이다.
無寃錄(무원록)
明나라 宣宗임금 正統 3年에 만든 것.
肅宗 임금의 御製인 無寃錄引에 이르기를, 어려운 것은 刑獄을 다스리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고, 그 중에도 刑獄을 判決하는 일이 더욱 어려우며, 원통하기는 억눌리어 굴복하는 것보다 더 원통한 것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억눌리어 死刑을 당하는 것이 더욱 원통한 것이다. 대개 刑獄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슴에 관계되는 것이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刑은 다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니 지극히 긴절하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檢驗(검험)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조금이라도 여러번 檢驗하여 보는 때에 사실 파악이 밝지 못하면 바로 죽고 사는 것이 거기에 달렸으며 원통한 원망이 그것으로써 일어 나는 것이다.
이것이 東 城에 살던 사람 王與가 2綠을 참고하고 취사선택하여 編輯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뒷 세상의 밝히기 어려운 獄事와 뜻밖의 일들이 밝게 갖추어 記載되어 있어서 진실로 法律을 다루는 사람의 指針이 되는 것이다. 뒷날의 刑獄을 맡은 官員들이 진실로 능히 반복하여 깊이 본받아 한 나라의 백성들이 저절로 원통함이 없기에 이르게 된다면 거의 이 무원록 編目의 本意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附則大明律 明나라 神宗 임금 萬曆 13年에 만든 것이다.
經國元典 續典 太祖 甲戌年에 이루어진 것.
經濟六典 世宗임금 庚戌年에 이루어진 것(상고하여 보면 文獻備考 刑制條에 말하기를 太祖 4年에 명령을 내려 經濟六典을 撰述하였다고 하였다.)
鄭道傳이 序文에서 말하기를, 聖人이 刑律을 製作하는 것은 이것을 믿고 政治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다스리는 일을 돕게 할뿐인 것이다. 죄줌으로써 죄를 그치게 하고 刑罰로써 형벌이 없기를 기약하는 것이라. 진실로 그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진다면 刑罰이란 것은 두고 쓰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 殿下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德은 上帝의 덕과 맞는다, 무릇 犯法하여 有司가 論罪하기에 이른 자가 있을 때면 적어도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매양 불상히 여겨 힘써 너그러운 법에 좇으며 용서하여 放免한 것이 많아서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하였다. 또 우매한 백성의 法禁에 저촉되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에 當該 官司에 命令하여 大明律을 가져다 方言으로 번역하여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닫게 하고 모든 단죄와 판결에 모두 이 律을 쓰게 하였다. 위로 上帝의 법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의 목숨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장차 이 백성들이 法禁을 알고 犯하지 아니하면 刑律이란 것은 두고도 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