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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이석연 법제처장]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김영수 지음) 추천글
  • 등록일 2010-07-27
  • 조회수7,356
  • 담당부서 처장실
  • 담당자 이민규

<추천의 글>


삶의 교훈과 지혜의 원천인 「사기」, 새로이 태어나다


이석연(법제처장, 법학박사)


  "사마천이 쓴 사기의 「육가」편에 보면 ‘말(馬) 위에서 나라를 얻었다고 해서 계속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이름으로 집권했지만 한나라당의 논리만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난 2008년 3월 나는 법제처장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정부 산하 공공기관장의 임기 만료 전 사임을 강요하고 있는 몇몇 사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럴 때(정권 출범 초기) 일수록 법치에 입각한 통합의 리더십이 요구된다면서 한(漢)나라 유방의 천하평정 후 통치방향에 관한 육가의 이와 같은 답변을 예로 들면서 당시 정부, 여당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이에 언론은 정권 출범 초기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모처럼 나온 쓴소리 내지 참신한 발언이라면서 크게 다루었으며 일부 언론의 칼럼에서는 사기 육가(陸賈, 육고라고도 함) 열전의 설명에 지면을 할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 130편에는 우리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가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 OBS 경인방송에 방영된 「명불허전」프로그램에 출연하여서도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의 하나로서 나는 과감히 역사인물 사마천을 꼽은 적이 있다. 사마천이라는 역사 인물과의 만남은 나에게 소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안목을 기르도록 함으로써 그 후 공직자로서의, 시민운동가로서의, 법조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준 소중한 인연이었다. 왜 내가 사마천의 인생역정과 「사기」의 세계에 매료되었는가를 몇 말씀 더 드리고자 한다.

  "이 치욕과 수모를 생각할 때마다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리고 등골에 흐르는 땀이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던 것은 오직 하나,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탐구하여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한편의 학술을 완성하겠다는 한줄기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시절 고시공부에 매달리며 방황할 때, 「사기」의 집필과정을 밝힌 사마천의 이 글을 접하고 눈이 번쩍 뜨이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동시에 내가 겪고 있는 고민과 방황이 사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후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사마천의 인생역정과 「사기」에 그려진 인간과 세태(世態)에 매료되었다. 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서이자 문학서인 「사기」를 저술했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정의를 삶의 올바른 가치로 여기고 이를 몸소 실천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거짓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는다(不虛美, 不隱惡)는 「사기」 전편을 관통하는 집필원칙은 오늘을 사는 지식인의 글과 행동에서도 소중히 견지되어야 할 가치이다.

  말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없고, 소신의 일관성을 지킨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궁형의 치욕을 받게 된 사마천, 그는 이렇게 절규한다.

  ‘하늘의 뜻(天道)은 늘 착한 이만 돕는다고 했다. 그런데 도척(盜蹠) 같은 자는 천수를 누리고 백이, 숙제는 굶어 죽었다. 근자에도 나쁜 짓만 하면서도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천도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天道是耶非耶)!’

  사마천은 역사는 언제나 정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기구한 처지에 빗대어 갈파하고 있다. 「사기」 전편에 사마천의 인간에 대한 고뇌가 묻어 있다. 내가 삶의 역경과 선택의 순간에 사마천을 생각하고 그에게 배우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마천에 의해 복원된 3000년에 이르는 인류사에는 인간으로서 경험 가능한 것,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사기열전과 세가는 백미다. 특히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자, 소수자, 이단아 등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다. 내가 「사기」에서 길을 찾는 또 하나의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세한도를 그리게 된 동기를 밝힌 추사의 친필 글씨 부분[제사(題辭) 내지 서문]을 즐겨 읽고 그 뜻을 음미하곤 한다. 당시 죽음의 형벌을 겨우 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추사는 그 글에서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멀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는 「사기」 정세가(鄭世家)의 귀절을 인용하면서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 사람들도 세력이 있을 때는 찾아오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세력이 없어지면 문 밖에 새 그물을 칠 정도로 찾는 사람이 적었다는데 하물며 보통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사기 급정(汲鄭)열전]라고 탄식하고 있다.

  평소 나와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는 김영수 교수가 그의 「사기」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는 대작을 펴냈다. 「사기」의 130편 원문에서 우러나는 당시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살리면서 이를 현대적 관점과 시각으로 완벽하게 복원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김 교수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감칠 맛 나는 표현을 통하여 「사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처세의 교훈과 삶의 지혜라는 성찬(盛饌)을 즐길 수 있다. 읽으면서, 또 읽고 난 후 진한 감동과 여운이 지속되면서 자연히 두 번 세 번 읽게 되고 그 때마다 서향(書香)의 멋과 맛을 새롭게 느끼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김영수 교수는 지난 20년 동안 100여 차례 넘게 중국을 방문하여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밟으면서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하여 동양사 나아가 인류문명사의 뿌리인 중국과 중국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많은 글과 저서, 강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그 방면에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해 온 분이다. 특히 몇 년 전에 펴낸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는 그 어느 중국학자도 따라오지 못한 사마천의 관련 자료와 현장답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국내 유일의 중국 사마천학회 정회원이자 사마천 고향인 섬서성 한성시의 명예촌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김 교수는 「사기」에 언급된 대부분의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곳에서 전해오는 고사(古事)의 풍문과 현장의 모습을 직접 촬영한 사진을 곁들여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그야말로 김 교수의 땀과 열정으로 쓴 책이다.

  오직 한 곬으로 매달려 연구와 탐사에 매진하면서도 오늘의 우리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역사의 거울에 비쳐 과감히 지적하고 질타하는 그의 태도에 존경을 표하며, 반면 공직의 한 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기」에 나타난 역사의 사례를 반추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종 때의 남명 조식(조식) 선생은 선비의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벼슬을 시작할 때와 그만둘 때) 하나에 달려 있다고 했거니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만둘 때를 아는 것’(知止)!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지식인들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과제다. 갑자기, 그만둘 때를 앎으로써 천수를 누린 한고조의 핵심 참모였던 장량(張良) 묘(섬서성 유패)의 바위 벽에 새겨진 「知止」와 「成功不居」(공을 이루면 그곳에 머물지 말라)라는 바위글씨의 사진(본문 278, 279쪽)이 오버랩 된다. 동시에 "천마리의 양의 가죽은 한 마리의 여우 가죽만 못하고, 천사람의 예 예 하는 아첨꾼보다 바른 말하는 한사람의 선비가 귀하다"(사기열전 상앙편)는 사마천 직필의 여운이 가슴 속에서 울려온다. 이만 글을 마쳐야겠다.